경계 밖에서 움직이는 글쓰기 3선
장르 밖의 자유로운 텍스트
책을 펼칠 때 우리는 먼저 장르를 확인합니다. 소설인지, 시인지, 산문인지—읽기의 목적을 미리 정해두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만약 책이 이런 분류에서 벗어난다면, 어떤 자유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일 수 있을지 말입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바로 그런 상상에서 출발한 세 편의 텍스트를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정해진 장르나 형식에 기대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쓰이고 움직이는 문장들로 세계를 확장하는 작업들입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열린 텍스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세 사례를 함께 살펴보며, 우리가 읽기라는 행위 안에서 어떤 새로운 경험을 마주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열린 공간에서 태어나는 시적 상상력
김리윤, 김선오 | 웹 구독 플랫폼 ‘아지테이트’

아지테이트는 시인 김리윤, 김선오의 미발표·기발표 작업물을 연재하는 구독제 웹사이트입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열려 있는 동시에 닫혀 있는 집을 상상해 봅니다. 이곳은 우리의 불완전한 실험을 보호하는 동시에 연결을 꿈꾸는 단면을 가집니다.”
저는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텍스트가 반드시 단단한 제본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오래된 관념이 조용히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곳에서의 텍스트는 한 번 인쇄되면 닫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읽는 순간마다 다시 열리고, 매번 다른 온도로 반응하는 집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지테이트에는 시와 산문, 인터뷰와 비평, 시작 노트와 낙서, 일기처럼 장르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드는 텍스트들이 이어집니다. 때로는 장르로 구분하기 어려운 파편적 문서들까지도 자연스럽게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또한 다른 협업자를 초대해 일시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퀴어, 출간, 제도, 번역 등 조심스레 다뤄져 왔던 주제들에 보다 선명한 목소리를 더합니다. 낙서와 편지, 쓰다 만 일기 같은 텍스트에게도 지면을 내어주며, 미완의 문장과 모호한 완결을 낯선 탐험의 입구처럼 다룹니다.

아지테이트는 말 그대로 ‘쓰기’라는 행위를 하나의 공간으로 펼쳐 보이고, 그 열린 공간에 타인을 초대하는 집에 가깝습니다. 이 개방성 안에서 텍스트는 제도나 제본 속에 갇혀 있던 목소리를 다시 비추고, 상상 가능한 모든 항로의 사유를 담아냅니다. 그 움직임 속에서 독자는 하나의 결론이나 메시지를 찾기보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미완의 감각을 마주하게 됩니다. 아지테이트의 텍스트는 어떤 의미로 수렴되기보다 계속 열려 있으며, 독자의 시선과 감각에 따라 매번 다르게 읽힙니다. 읽을 때마다 다른 장면을 드러내고, 다른 질문을 남깁니다.
아지테이트는 하나의 시집으로 닫히지 않습니다. 대신 시집이라는 형식이 담아내지 못했던 움직임과 여백을 품은 채, 열린 공간으로 존재합니다. 정해지지 않았기에 머무를 수 있고, 완결되지 않았기에 더 멀리 이어질 수 있는 텍스트들입니다. 이곳에서 글은 끝맺음이라기보다, 다음 상상으로 건너가기 위한 하나의 문턱처럼 놓여 있습니다.
책의 형태를 다시 묻는 출판
독립출판사 퓽(PYOONG)

아지테이트가 글의 ‘집’을 확장했다면, 독립출판사 퓽은 책의 ‘형태’ 자체를 다시 질문합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는 책의 모습은 직사각형의 종이 묶음이지만, 퓽은 그 전제를 한 번 더 되묻습니다. 어떤 책은 카세트테이프의 몸을 하고 있고, 또 어떤 책은 CD 케이스의 구조를 빌립니다. 이는 시각적 변주를 위한 장식이 아니라, “이 글은 어떤 형태로 존재할 때 가장 자연스러울까”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선택에 가깝습니다.
퓽의 작업에서 특히 인상적인 지점은 텍스트와 ‘소리’를 하나의 독서 경험 안에 나란히 배치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소리는 독립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텍스트에 하나의 공간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독자는 QR코드를 통해 소리를 듣거나, 소리 없이 텍스트만 읽을 수도 있습니다. 같은 책이지만,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서로 다른 밤과 다른 리듬이 열립니다. 하나의 책 안에 여러 개의 입구가 마련된 셈입니다.

이러한 시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책이 바로 『REC 01: 밤을 걷는 동안』입니다. 이 책은 퓽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REC 시리즈의 첫 번째 사운드 단상집입니다.
" 모든 것에 닿을 수 있는 밤을 걷는다. 어둠을 건너면 다 그곳에 있으므로. "
밤을 걸으며 마주했던 안도위 순간을 기록한 단상집으로, 독자는 산책의 소리와 풍경을 배치한 이 지면 안에서 마음대로 머물고 거닐 수 있습니다. 산책에도 가는 길과 돌아가는 길이 있는 것처럼, 카세트 테이프를 모티브로 하여 Side A 와 Side B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또렷해지는 감각, 반복되는 오늘에 남는 미세한 무늬, 기억을 다시 바라보는 태도들이 텍스트와 소리 사이를 오가며 천천히 드러납니다. 낮보다 밤에 더 분명해지는 마음의 결, 걷는 리듬에 맞춰 정리되는 생각들은 독자의 속도에 맞게 열립니다. 퓽이 사용하는 소리는 독서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가 자신의 생각과 마주할 수 있도록 조용히 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밤을 걷는 동안』은 책을 ‘읽는 대상’이라기보다, 잠시 머물 수 있는 공간에 가깝게 만듭니다. 작고 얇은 책이지만, 그 안에서 독자는 얼마든지 오래 머물며 자신의 밤과 조우할 수 있습니다. 퓽이 꾸준히 지향해온 “머물러도 되는 독서 경험”이 이 책에서 가장 섬세하게 구현되는 이유입니다.
퓽의 책들은 결국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책은 반드시 한 가지 방식으로만 읽힐 필요가 없다는 것. 읽는 이의 속도와 상태, 지금의 시간에 따라 다르게 열릴 수 있다는 것.
그 작은 자유가 모여, 퓽의 책은 독서라는 행위 자체를 조금 더 느슨하고 넓은 방향으로 이끌어 갑니다.
결말을 향하지 않는 대화
신이인 × 유이우 | 《절교 직전의 마지막 대화》
출판사 소소사

세 번째 작품인 『절교 직전의 마지막 대화』는 두 시인 신이인·유이우가 한 권의 노트를 사이에 두고 주고받은 필담을 엮은 책입니다. 이 책은 총 14개의 주제로 나뉘어 있지만, 각 주제는 글의 방향을 규정하기보다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는 출발점에 가깝습니다. 하나의 주제를 두고 두 작가는 번갈아 글을 쓰며 질문을 건네고, 생각을 확장하고, 다시 응답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갑니다.

각 장은 정해진 분량이나 형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시에 가까운 문장, 산문처럼 흘러가는 생각, 짧은 메모와 즉흥적인 기록이 뒤섞이며 하나의 대화 단위를 이룹니다. 문장은 완성을 목표로 다듬기보다, 서로에게 건넨 질문과 마음이 머물렀던 상태 그대로 남겨집니다. 노트 속 작은 낙서나 비뚤어진 선, “ㅋㅋ” 같은 표기까지 삭제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대화가 오갔던 실제의 호흡을 최대한 보존하려는 선택입니다.
이러한 구성 덕분에 독자는 이 책을 ‘읽는다’기보다 두 사람이 나누던 대화를 곁에서 듣는 감각에 가까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제목과 달리 절교의 구체적인 사연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두 시인이 하나의 주제를 두고 어떻게 사유를 주고받고, 서로를 이해하려 하며, 때로는 엇갈리는지를 따라가게 됩니다.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서사가 아니라, 대화와 사유의 흐름 자체로 이루어진 이 책은 형식 밖에서 텍스트가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정해진 틀 없이 이어지는 필담은 텍스트가 반드시 완결을 향하지 않아도 충분히 밀도 있는 세계를 만들 수 있음을 조용히 증명합니다.
세 작업은 글의 힘이 정해진 경계 안에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아지테이트의 미완의 문장들, 퓽의 형태 실험, 『절교 직전의 마지막 대화』의 자유로운 필담은 모두 텍스트가 스스로 형식을 만들어가는 순간을 기록합니다.
완성을 향하기보다 생성되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는 글쓰기 방식입니다.
때로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바로 그 느슨함이 독자가 머물 자리를 넓혀 줍니다. 정리되기 전의 언어와 다듬기 전의 마음은독자의 속도에 따라 새롭게 읽힙니다. 문장은 하나의 이름에 고정되지 않아도 충분히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완결된 글보다 열려 있는 문장은 더 자유롭게 확장됩니다. 독자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고, 그 의미들은 다시 다음 문장을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열린 문장들 사이에서 우리는 새로운 읽기와 사유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고, 그 가능성들이 모일 때 텍스트는 기존의 세계 밖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