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이에 구차한 돈 이야기
<길모어걸스> 세 모녀의 서툰 유대 쌓기
최근 애인과 밥값 얘기를 하다 잠시 서먹해졌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오가는 돈의 규모가 커지고, 주머니 사정은 무한하지 않으니 민망하게 사정을 따지게 됩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노동으로 번 돈은 소중하다는 생각에 사용처를 낯낯이 확인하게 됩니다.
학비를 지원받은 자식은 당연한 후원이라 여기고, 내어주는 부모는 투자로 여길 때 입장차이는 커집니다. 시시콜콜 개입하는 말들에 어린 쪽은 외칩니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해!” 그렇게 한두마디 강경하게 나가다가도 지원을 끊는다는 말에 깨갱하고 꼬리를 내립니다.

미국 드라마 <길모어걸스(Gilmore Girls)>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주인공 로렐라이 길모어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왔습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덜컥 임신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로렐라이는 체면을 위해서라도 결혼을 해야 한다는 양쪽 집안의 강요로부터 도망쳐 독립합니다. 시간이 흘러 로렐라이의 딸 로리가 장성해 명문 사립고등학교에 합격합니다. 목돈이 없었고 은행에서도 거절당한 로렐라이는 고민끝에 부모님에게 대출을 부탁합니다. 로렐라이의 어머니이자 로리의 할머니인 에밀리는 ‘금요일 가족식사’를 돈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내겁니다.
칠튼 고등학교에 합격한 로리
로리는 동네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영특하게 자랐습니다. 책을 좋아하고 학구열 있는 그녀는 칠튼 고등학교 합격 연락을 받고 뛸듯이 기뻐하죠.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자라나며 교류가 많지 않던 조부모와 소통하게 되는 것도 로리에게는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로렐라이의 삶이 늘 탐탁치 않던 에밀리는 로리를 ‘제2의 딸’처럼 대합니다. 상류사회 입문파티에 참여하게 하고,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과 어울리도록 하며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로리의 남자친구를 낮잡아보기도 합니다.
할머니의 방식을 따르는 건 사회적 리스크가 적습니다. 좋은 인맥과 좋은 커리어 경로, 그리고 이를 위한 경제적 뒷바라지까지 따른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로리는 한동안은 할머니의 요구에 응하다가 문득 이질감을 느낍니다. 꼭두각시처럼 할머니가 원하는대로 움직이는데에는 목적성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로리의 반항에 에밀리는 ‘내가 학비를 대준 것 잊었느냐’며 묵직하게 말합니다.
우리 사이 채무관계가 사라졌을 때
로리의 친부이자 로렐라이의 전 남자친구인 크리스토퍼가 사업 성공으로 일약 부자가 됩니다. 로리가 자라나는 동안 경제적 지원과 감정적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한 게 미안했던 크리스토퍼는 ‘이제부터 로리의 학비는 내가 전부 책임지겠다’고 선언합니다. 부모님과 달리 내거는 조건도 없었습니다. 이제 금요일 가족식사는 의무가 아닙니다. 로렐라이는 가족식사를 느슨하게라도 지속하려고 했지만, 에밀리는 “이제 그럴 필요 없다”며 매몰차게 로렐라이와 로리의 방문을 거부합니다.

사실 ‘오지 말라’는 건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습니다. 에밀리는 서운했고, 표현에 서툴렀습니다. 에밀리의 소통방식은 ‘개입’과 ‘잔소리’였습니다. 그렇게 줄곧 딸과 손녀를 향해 관심을 표현했죠. 그러고보면 우리는 가족사이에 적당한 안부를 묻는 법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는 일은 잘 되니? 취업은 언제 하니?”라는 불편한 말에 자식은 툴툴대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부모로서 요즘 뭐하고 지내는지도 모르는 자식에게 뭘 물어봐야할지 막막합니다.
아빠인 크리스토퍼가 학비를 대주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들으며 로리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아빠가 학비를 대주면) 여러 이점이 있을 거라는 거죠. 제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제일 큰 장점인 것 같네요. 두분이 약점 잡은 것처럼 행동하시는 게 싫어요. 두분에게 빚지는 것도 싫고요. 압박도 심하고 기대하시는 바도 너무 많아요. 인생의 너무 많은 부분이 엮여서 이젠 피로할 지경이에요.
<Gilmore Girls> Season 6, Episode 10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사랑하지만, 그들에게 나의 모든 결정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로리가 세운 인생계획에도 이유가 있었고, 조부모 세대에게는 다소 낯선 방식일 수 있기에 이해시키기엔 피로했습니다. 더이상 조부모님을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로리와 로렐라이, 에밀리는 이 새로운 관계정립에서 혼란스러워합니다.
홀로 남은 에밀리

에밀리와 50여년을 함께한 남편 리처드 길모어가 병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큰집에 남은 에밀리는 오래된 물건을 정리하고 인생 처음으로 청바지를 입는 등 새로운 면모를 보입니다. 딸과 손녀의 ‘상담을 받아보아라’, ‘사회적 활동을 다시 시작하라’는 조언에도 에밀리는 완고히 ‘나는 멀쩡하다’고 주장합니다. 딸과 한참을 실랑이 한 끝에 에밀리는 인정합니다. 리처드가 너무 그립다고.
이제 세 모녀는 서로 물질적인 빚을 지지 않습니다. 같이 저녁식사를 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사교활동을 할 필요도 없는 관계에서 세 사람은 비로소 서로를 ‘사회적’으로 원하고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세 사람은 앞으로도 서툴게 교류할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가끔 너무 큰 힘으로 작용합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이 식거나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가까운 우리 사이에 돈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면 본질을 잘 살펴야 합니다. 돈과 의사결정권을 동등하게 판단하지 않는 관계만이 경제적으로 엮이지 않은 상태에서도 건강하게 지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