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일상 속 차이를 발견하는 법

고유함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반복의 비밀

반복되는 일상 속 차이를 발견하는 법
<백자> 시리즈, 2006, 구본창 (c)구본창 작가 웹사이트

보름달을 닮아 넉넉하고 둥근 품이 곱고 담백하게 흰 빛을 머금은 달항아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 백자입니다. 비슷한 듯 같아 보이는 달항아리라도 가만히 오래 들여다보면 세상 어디에도 똑같은 달항아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미묘하게 기울어있는 곡면과 표면에 그려진 미세한 굴곡, 흙이 구워지며 새겨진 희미한 흔적들이 달항아리 하나하나의 개성을 이루고 있죠.

우리의 하루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똑같아 보이는 날들이 계속될 때, 우리는 삶이 정체된 것처럼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풍경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기만 한다면, 오늘은 결코 어제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자신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유일하게 반복되는 것은 차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죠. 이번 아티클은 현대 유형학적 사진의 기원에서 출발하여, 반복을 통해 세계의 또 다른 얼굴을 포착한 현대 사진 예술가들의 작품 세계를 살펴봅니다.


베허 부부:
현대 유형학적 사진의 기원

<Water Tower>, 1983, Bernd and Hilla Becher (c)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오늘날 현대 사진에서 반복과 유형학이라는 방법론의 근간을 세운 것은 독일 뒤셀도르프 학파의 창시자인 베허 부부(Bernd and Hilla Becher)입니다.

<Framework Houses>, 1959–1972, Bernd and Hilla Becher (c)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베허 부부는 주로 활동하던 뒤셀도르프 근처의 지겐 지역의 건물로부터 시작해 급수탑, 용광로, 곡물 창고 등 산업 시대의 상징인 여러 기능적인 시설물을 촬영했습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주관적인 작가의 시선을 배제하고 촬영 조건을 통제했다는 점입니다. 미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요소들을 제거하고, 직사광선이 흐려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 날을 고르고, 거리감을 없앤 수평을 이루는 구도로 통일했죠. 중립적인 시선으로 촬영된 이미지들은 격자 그리드 형식으로 나란히 배치하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마치 표본처럼 표정이 없는 사진, 비슷한 요소들을 모았을 때 차이가 드러나게 하는 유형학적 사진(Typological Photography)이 이렇게 창시되었죠.

<Water Towers>, 1963-80, Bernd and Hilla Becher (c)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동일한 기능을 가진 시설물들의 반복되는 이미지에서 구조, 재료,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미세한 차이가 포착되었습니다. 베허 부부의 실험은 사진이 객관적인 기록을 한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고, 아래 소개하는 현대 사진가 외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현대 사회의 반복되는 시스템

99cent 사진

<99 Cent>, 1999, Andreas Gursky (c)Andreas Gursky Website

형형색색의 상품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모습은 한국의 대형 마트나 다이소와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매대가 세워진 복도가 무한히 확장할 것만 같은 이 사진은 베허 학파 출신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의 <99 Cent> 라는 작품입니다.

<Tokyo Stock Exchange>, 1990, Andreas Gursky (c)Andreas Gursky Website

안드레아스 구르스키는 여러 장의 사진을 포토샵과 같은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으로 이어 붙여 카메라가 왜곡하는 화면의 한계를 확장해 더 넓고 더 뻗어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작업에 몇 달이 걸리기도 하죠. 사람들은 더 많이 모여 있고, 물건들은 더 많이 반복되고, 더 많이 생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대량 생산되고, 대량 소비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규격화된 패턴을 적나라한 이미지로 보여주고 싶어했습니다. 마트 뿐만 아니라 금융 센터나 경기장 등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과 자본이 구조적으로 모여있는 장면을 커다랗게 인쇄해 벽에 걸었습니다.

<Love Parade>, 2001, Andreas Gursky (c)Andreas Gursky Website

무의식적으로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던 사회 시스템을 사람과 물건이 빽빽하게 응집된 이미지로 마주하면 섬뜩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합니다. 저 많은 물건들이 매 순간 새로 만들어지고, 버려진다고 생각하면 그 압도적인 양을 지구에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하죠. 하지만 동시에 그런 우리 자신을 대면하고 성찰하게 해주는 거울 역할을 합니다. 이미지는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되더라도 인간의 고유한 차이가 소멸되지 않음을 역설하기도 하죠. 경각심을 갖고 삶을 되돌아보는 순간 우리는 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을 마주하게 됩니다. 베허 부부처럼 사물과 거리를 둔 냉철한인 시선이 오히려 개인이 보유한 미세한 차이의 가능성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Andreas Gursky | home
Welcome to the personal website of the German artist Andreas Gursky. Check out his latest exhibitions, get news and explore the artwork of the Düsseldorf based photographer.

토마스 루프:
반복이 그리는 추상적인 패턴

토마스 루프는 베허 부부가 이끌었던 뒤셀도르프 학파의 2세대로, 형식적인 반복을 추상적인 차원으로 확장했습니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가 보다 현실 사회의 문제를 다뤘다면, 토마스 루프는 '사진이 과연 진실을 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예술 자체의 실험으로 접근했죠.

<Porträts>, 1987, Thomas Ruff (c)Thomas Ruff Website

그의 초기작인 <Porträts> 연작은 동일한 조명과 구도로 찍힌 거대한 인물 사진을 반복적으로 나열합니다. 2m가 넘는 여러 명의 증명사진을 모아둔 것처럼요. <Porträts> 연작 이미지가 늘어날수록 한 명 한 명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익명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눈빛이나 머리색, 미묘한 표정 등이 뚜렷한 차이로 남게 되죠. 토마스 루프는 '사진이 인물의 영혼을 담는다'는 당시 낭만주의적인 관점을 해소하고 개인 존재 자체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23/5714h 30m / -50°>, 1990, Thomas Ruff (c)Thomas Ruff Website

루프는 <Jpeg> 시리즈를 통한 디지털 세계로의 확장에 이어〈Sterne(Stars)〉연작을 통해 우주적 스케일의 반복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유럽 남부 천문대(ESO)의 아카이브에서 구한 천체 사진들을 극도로 확대한 사진들은 빛을 뿜어내는 별이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름의 밝기와 거리 차이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d.o.pe.01>, 2022, Thomas Ruff (c)Thomas Ruff Website

거시적인 물리적 거리를 탐구했던 루프는 이제 미시적인 자연의 패턴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자연의 패턴을 의미하는 프랙탈 패턴을 거대한 융단에 프린트하죠. 실제로 2024년 PKM 갤러리에서 개최한 토마스 루프의 개인전 <d.o.pe.>에서 마주한 작품들은 융단의 미세한 털 하나하나가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듯 끊임없이 패턴이 생성되는 세계를 열어주는 것 같았죠.

'd.o.pe'라는 시리즈 제목은 올더스 헉슬리의 자전적 에세이『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자연에서 발견한 프랙탈 패턴들은 컴퓨터에 입력되어 알고리즘으로 인해 무작위로 변형되고 왜곡되며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냅니다. 루프의 다양한 반복에 대한 실험은 우리에게 무작위적인 반복, 과잉적인 반복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층위의 아름다움에 대해 탐구하게 합니다. 이미지는 이러한 차이의 실험을 통해 창조될 수 있는 결과물인 것이죠.

Thomas Ruff
Künstler

구본창:
깊이 들여다보며 발견한 아름다움

<백자> 시리즈, 2010, 구본창 (c)구본창 작가 웹사이트

한국 현대 사진의 거장 구본창은 반복이라는 주제를 가장 명상적으로 탐구합니다. 그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수년간 전 세계에 흩어진 조선 백자를 찾아 다니며 동일한 배경과 색감으로 촬영합니다. 부드러운 살구빛을 머금은 한지 위에 고요히 놓인 백자는 그가 지닌 미세한 균열과 얼룩으로 세월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먼 곳까지 흘러간 백자를 직접 어루만지며 배치한 <백자> 시리즈에는 백자 하나하나의 혼이 담겨 있죠.

<비누> 연작, 구본창 (c)구본창 작가 웹사이트

각기 다른 빛을 발하는 보석처럼 놓인 <비누> 시리즈는 조금 더 우리 곁으로 다가옵니다. 쓰면 쓸수록 닳아 물러지고 조각나는 비누는 사실 우리가 하루를 깨끗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빛내주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생각해보면 매일 몇 번이나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우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죠.

구본창은 이토록 사소한 일상의 물건을 두고 고요히 바라볼 수 있도록 사진으로 담습니다. 미니멀한 조형적 구도로 담긴 사진과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물들은 아무리 작은 존재라도 고유한 영혼의 울림을 찾아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Koo Bohnchang

몇 년 전, 사하라 사막에서 하늘을 가득 메운 별을 보며 가장 놀랐던 것은 별의 갯수가 아니라 모두 다르게 느껴졌던 별의 거리감이었습니다. 그저 밤 하늘이라는 평면에 나열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별들이 무한한 우주 안에 제각각의 거리로 떠 있었던 것이죠. 무한한 반복이란 단조롭고 지루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이 지닌 고유함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그리고 구본창 작가의 비누처럼 가장 익숙한 형태의 반복에서도 어쩌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던 진정한 차이, 그리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작은 존재의 차이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숨죽이고 있던 미세한 차이가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