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도시, 독일 라이프치히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반드시 찾아야 할 도시

책의 도시, 독일 라이프치히
© Leipziger Buchmesse

바람이 선선히 부는 요즘, 책의 계절인 가을이 어느새 깊게 찾아왔습니다. 가을은 여름과 달리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는 계절이라 합니다. 해가 짧아지고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감성의 농도도 짙어집니다. 생각이 많아지고, 책을 읽기 좋은 시간들이 찾아옵니다. 지난여름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습니다. 책 문화와 독서의 흐름을 직접 체감할 수 있는 뜻깊은 행사였지요. 세계적으로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이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의 도시’라는 별칭을 가진 곳은 프랑크푸르트가 아닌, 독일 동쪽의 라이프치히(Leipzig) 입니다. 한국인에게는 아직 낯선 도시이기도 하지요. 라이프치히는 현재 프랑크푸르트 다음으로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서박람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습니다. 그 기원은 프랑크푸르트보다 더 오래된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또한 이곳에는 유서 깊은 라이프치히 대학교가 자리해 있어, 일찍부터 학술 도서 출판과 인쇄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17세기에는 독일어권 최대의 출판 산업 중심지로 성장했고, 독일의 거의 모든 출판사와 인쇄소, 서점, 그리고 그래픽 산업이 이곳에 모여들었습니다. 오늘은 책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독일인들이 사랑하는 도시, 라이프치히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라이프치히 도서전 (Leipziger Buchmesse)

© 24books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독일 출판업의 심장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분단되며 동서 간의 교류가 끊어졌을 때에도, 이 도서전은 양 진영의 책이 유일하게 만날 수 있었던 소중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도서전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전 세계의 출판 관계자와 독자들이 몰려드는 비즈니스의 장이자 국제 교류의 무대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서전이지만, 그 본질은 ‘독자를 위한 문화 축제’ 에 있습니다.

매년 3월에 열리는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독일에서 가장 문화적인 의미가 깊은 행사 중 하나입니다. 이곳의 중심은 거래가 아니라 저자와 독자가 만나는 것입니다. 출판 비즈니스보다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한 축제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일반 독자들이 참여하는 비율이 매우 높아, 매년 약 25만 명의 방문객이 찾아옵니다. 저자, 출판사, 독자가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말 그대로 ‘책의 축제’인 셈이지요. 도서전이 열리는 기간 동안 도시 전체가 책으로 물듭니다. 전시장뿐 아니라 서점, 카페, 도서관 등 곳곳에서 수천 건의 낭독회와 토론회, 강연이 이어집니다. 저자와 독자가 함께 문학을 이야기하며, 책이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도서전은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위한 만화·코믹 컨벤션을 함께 운영하며 새로운 문화 장르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매년 방문객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라이프치히는 봄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젊은 관람객들로 가득 차며 도시 전체가 축제의 열기로 물듭니다.


독일 도서 및 서체 박물관 (Deutsches Buch- und Schriftmuseum)

© Deutsche Nationalbibliothek

라이프치히에는 독일 국립도서관 본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독일에서 발행되는 모든 출판물을 수집하는 기관으로, 책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국립도서관 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을 주제로 한 박물관 중 하나인 독일 도서 및 서체 박물관이 있습니다.

1884년에 설립된 이 박물관은 단순히 책의 내용이나 작가를 다루기보다는, ‘책 그 자체의 물성’에 집중합니다. 이곳에서는 점토판, 파피루스, 양피지, 종이책, 그리고 현대의 전자 매체에 이르기까지 지식 전달의 모든 형식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전시관을 따라 걷다 보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부터 현대의 디지털 출판에 이르기까지, 책의 제작 기술과 사회적 역할이 시대별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박물관의 또 하나의 핵심 주제는 ‘서체와 인쇄’입니다. 문자의 발전, 서체 디자인, 활판 인쇄 기술 등 책이 어떻게 시각적 예술로 발전해왔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책 디자인이 하나의 예술 분야로 자리 잡은 나라입니다. 표지, 일러스트레이션, 제본까지 — 책 한 권이 예술 작품으로 완성되는 전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독일 도서 및 서체 박물관은 단순히 옛 인쇄물들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책을 통해 지식을 기록하고 전하는 인간의 행위 자체를 탐구하는, 깊이 있는 문화적 실험의 장입니다. 책이 단지 읽히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와 기술, 예술이 응축된 결과물임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공간입니다.


라이프치히 인쇄 예술 박물관 (Museum für Druckkunst Leipzig)

© Leipzig Travel

출판업의 중심지였던 라이프치히에는 특별한 박물관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500년 인쇄 역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인쇄 예술 박물관(Museum für Druckkunst Leipzig)’입니다. 이곳은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지금도 실제 인쇄 작업이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워크숍 공간이기도 합니다. 박물관 건물 자체가 이미 역사입니다. 100년 동안 실제 인쇄소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은, 지금은 아르데코 양식으로 재설계되어 그 자체로 건축미를 자랑합니다. 기술과 예술이 공존하는 공간, 과거와 현재가 맞닿아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박물관은 총 4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약 100대의 가동 가능한 인쇄기계와 프레스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전시실에서는 활판 인쇄, 동판 인쇄, 석판 인쇄 등 인류 인쇄의 3대 기술이 직접 시연됩니다. 특히 지금은 독일에서도 보기 드문 활자 주조 공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납 활자를 수동 또는 기계로 주조하는 과정을 눈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활자 컬렉션 또한 인상적입니다. 유럽과 동양에서 유래한 납 활자, 목 활자, 활자 모형 등 4,000여 종의 서체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콜로타이프(Lichtdruck)’라 불리는, 현재 세계적으로도 유지하기 어려운 고급 인쇄 기법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조용히 바라보는 전시의 공간이 아닙니다. 기계가 돌아가고, 잉크 냄새가 풍기며, 인쇄물이 실제로 만들어지는 현장입니다. 관람객은 단순히 과거의 기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체험’합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 속에는 인쇄의 정신과 문화가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라이프치히 인쇄 예술 박물관은 시간이 멈추지 않은 역사, 그리고 손끝에서 이어지는 인간의 기술과 예술의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책을 정말 좋아합니다. 책의 내용도 물론 좋지만, 저는 특히 책이라는 물성을 사랑합니다. 종이의 질감, 서체의 곡선, 잉크 냄새까지, 책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예술입니다. 독일에서 예술을 공부하던 시절, 저는 깊은 회의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왜 예술을 공부하고 있을까? 예술이란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질문은 꽤 오래 저를 괴롭혔습니다. 예술이 단지 자기만족으로 끝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가 새롭게 만난 예술이 ‘책의 예술’이었습니다. 책의 표지, 서체, 색상, 그리고 인쇄 기술까지 — 그것은 어떤 미술 작품보다 실용적이면서도 예술적인 매체였습니다. 저는 그 매력에 완전히 빠져 도서관에서 오래된 자료를 찾아보며,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시각 언어의 변화를 탐구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직접 라이프치히를 찾게 되었습니다. 도서전이 열리는 시기에는 가지 못했지만, 그곳의 여러 박물관을 돌아보며 책의 역사와 활자의 기술을 보고, 듣고, 체험했습니다. 그 경험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매체의 발전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류의 예술적 진보였다는 것을요. 그 순간, 저는 예술을 공부하길 정말 잘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도 책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훌륭한 작가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독립 출판물도 다양하게 발간되고 있습니다. 책을 주제로 한 행사들도 많아졌지요. 이런 흐름이 일시적인 트렌드로 끝나지 않고, 우리 문화 속에 깊이 스며드는 정신으로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책은 단순히 지식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가장 오래된 예술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