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존재는 없다
친구들에게 갑자기 연락이 끊긴 적이 있는가? 그것도 아무 이유 없이. 다자키 쓰쿠루는 16년 동안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아니, 묻지 않았다. '내가 부족해서'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관계에 실패했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게 그런 순간에 직면하면 느끼는 상실감과 무력감을 통해 자기질책에 쉽사리 빠진다. 단지 그 순간이었을 뿐인 거지 나의 경험과 색채(개성)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떠난 순례의 해』는 출간 당시 전작들에 비해 떨어지는 완성도와 비슷한 내용들의 반복으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관계에 실패했다고 해서 나를 가둬둘 것인지, 또 실패를 통해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좋은 책이었다.
간략한 줄거리는 다자키 쓰쿠루(소설의 주인공)가 고등학교 시절 절친했던 4명의 친구들로부터 갑작스럽게 배척당한 후, 16년이 지나 그 이유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친구들은 모두 색깔이 들어간 성씨(아카마쓰, 아오, 시라네, 구로노)를 가졌지만, 주인공만 색채와 관련이 없는 성씨를 가진 점이 이야기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상실감, 소외감, 그리고 과거와의 화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클래식 음악(리스트의 순례의 해)1이 중요한 모티프로 자주 등장한다.
스스로를 가둔 색채 없는 존재

배척당한 지난 16년동안 다자키는 본인을 ‘색채가 없는’ 존재로 규정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구들에게도, 독자에게도 충분히 매력이 있는 인물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가 자기 규정 안에 갇혀버렸다는 것이고, 지난 16년동안 그 믿음을 강화시키며 살아간다. 그의 자기 인식과 타인의 인식 사이의 괴리가 소설의 핵심 갈등이며 다자키의 인생을 좌우하게 만들었다. 특히 중요한 건 다자키가 왜 배척당했는지 진짜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회피라는 안전장치

어떤 문제에 직면하면 그 이유를 들춰내는 것은 보통 쉬운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다자키는 덮어두었을 것이다. 그냥 "내가 부족해서, 내가 색채가 없어서"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살아간다. 진실과 직면하기보다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게 자기를 지키는데 더 안전했을지도 모른다.
이 다자키를 보며 영화 <괴물>의 요리2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넌 쓸모없는 돼지"라는 말을 반복해서 세뇌당했던 것처럼 다자키는 스스로를 색채가 없는 사람으로 되뇌이며 그를 고립되게 만든다. 그러나 새 연인 사라와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출발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다자키의 성장의 초석이 된다. 물론 이미 머리 속에 박힌 되뇌임때문에 과거를 정리하고 오라는 사라의 제안에 처음에는 거부감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새로운 관계를 위해 과거를 찾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시로라는 미스터리

이 소설에서 가장 석연치 않은 부분은 시로와 관련된 이야기다. 다자키의 배척에는 4명의 친구들 중 한명 시로가 중점에 있다. 그녀는 다자키에게 겁탈을 당했다는 말을 꾸며내고, 친구들과의 와해를 도모한다. 다자키가 강간범으로 지목됐던 이유와 그녀의 최후 등 모든 게 어딘가 연결된 것 같으면서도 확실하지 않다. 그저 맥거핀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으며, 시로는 그저 다자키를 깨닫게 만들기 위한 도구 정도로 느껴진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특히 다자키가 겪어야 하는 고통이 너무 가혹한데, 그 원인이 된 사건들이 명확히 해소되지 않으니 좀 매끄럽지 않은 느낌이다. 시로의 거짓말도, 그리고 시로의 말만 듣고 다자키를 배척시킨 친구들의 행동도 좀처럼 이해하긴 힘들다.
시로에 대한 미스터리와 주인공이 겪는 고통에 비해 모호한 해답은 감흥을 떨어뜨릴 순 있어도, 이 소설이 절대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상실과 소외감을 다루는 섬세한 필치는 뛰어났고, 다자키가 느끼는 공허함을 묘사하는 부분이 정말 공감됐다.
결국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떠난 순례의 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주제의식은 '직면하고, 나아가자'이다. 16년간 그 상처를 회피하고 살아오며 그저 스스로를 색채가 없는 존재로 규정하며, 깊은 관계를 맺기 두려워 했는데, 사라와의 깊은 관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처를 직면해야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회피하지 않는 게 이 소설의 핵심 포인트인 것 같다.
결론에 다다르면, 결국 나 자신을 너무 낮게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볼 때는 내가 낮아 보여도 남들은 나를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다자키처럼 스스로를 색채가 없는 존재로 규정하며 16년을 보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운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어 직면해야 하며, 진정한 관계를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책을 덮고 필자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혹시 다자키처럼 스스로에게 색채가 없다고 말하고 있진 않을까? 우리 모두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색채를 가진 존재다. 다만 그것을 보려 하지 않았을 뿐.
1) 리스트의 피아노 모음집 '순례의 해' 중 'Le mal du pays'는 향수병이라는 뜻으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다자키의 상실감을 대변한다.
2)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23년작 괴물(MONSTER)의 등장인물 중 하나로, 불량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다. 일련의 학대로 인해 본인이 돼지뇌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