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을 미학으로 완성한 3인의 창작자
완성을 만들어낸 반복에 관하여
우리는 예술을 떠올릴 때 종종 ‘하나의 완성된 순간’만 기억합니다. 공간을 압도하는 설치 작품의 장면, 벽면을 가르는 선들의 질서, 런웨이를 스치는 의상의 실루엣처럼 눈에 남는 결과들 말입니다. 하지만 완성 전에 실제로 많은 창작자들은 같은 동작을 끝없이 되짚는 반복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으로 자신만의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죠. 이 글은 그 반복을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미학으로 끌어올린 세 명의 창작자를 통해, 예술이 어떻게 되풀이의 시간 속에서 형성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쿠사마 야요이 – 점이 세계를 이루는 방식

1950년대 일본에서 자라던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에게 반복되는 점무늬는 공포와 집착이 뒤섞인 환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반복을 통제 불가능한 혼란이 아니라 예술적 언어로 전환하며 삶의 질서를 세우려 했습니다. 반복되는 점이 곧 세계를 재편하는 방식이라는 믿음이 그녀의 출발점이었죠.
쿠사마의 점은 단순한 패턴이 아닙니다. 같은 크기와 같은 간격의 반복은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리듬처럼, 공간 전체를 일정한 맥박으로 채우죠. 그 점들이 끝없이 증식할 때 우리는 어느 순간, 시작과 끝이 없는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대표작<Infinity Mirror Room> 에서는 거울 속 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무한’이라는 비가시적 개념을 가시화합니다. <Dots Obsession>에서는 부풀어 오른 물체들이 점을 품고 공간을 압도하며, 점이라는 반복적 언어가 감정적 스케일을 만들어 내죠. 반복은 더 이상 강박이 아니라 어떤 세계를 열어젖히는 문처럼 작동합니다.
쿠사마의 반복은 ‘무한을 향한 집요함’에서 태어났지만, 그 끝에서는 오히려 평온함이 남습니다. 속도가 빠른 세상과 달리, 변하지 않는 패턴으로 들어가는 순간 인간의 마음은 단순해지죠. 어쩌면 반복은, 세계를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솔 르윗 – 규칙이 세계를 만드는 순간

1960년대 뉴욕 미니멀리즘의 흐름 속에서 솔 르윗(Sol LeWitt)은 예술의 핵심이 ‘작가의 손’이 아니라 ‘작가의 개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감정이나 즉흥성 대신, 선을 긋는 방식·간격·방향 같은 명확한 규칙을 세웠습니다. 그 후 정해진 것들을 집요하게 반복하며 세계를 만들어 갔죠.
그에게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개념을 물질로 옮기는 절차였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예술의 주도권은 완전히 구조로 이동되었습니다. 르윗의 선들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며 벽을 채우고, 그 선들이 얽히고 쌓이면서 관객은 형태보다 ‘규칙의 존재’를 먼저 인식하게 됩니다
규칙이 반복될수록 시각적 표면은 단순해지는 듯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수학처럼 복잡한 변주가 일어납니다. 동일한 규칙으로 그려진 작업이 공간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면서 그의 반복은 복제를 위한 반복이 아니게 됩니다. ‘규칙과 현실의 충돌’을 드러내는 실험이 되는 것이죠.

대표작 <Wall Drawings> 는 작가가 아닌 조력자들이 르윗이 남긴 지시문을 따라 직접 그리는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하나의 지시문은 여러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실행되지만, 각 공간의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동일한 규칙이 반복되면서도 시간, 벽의 질감, 작업자들의 손길이 자연스럽게 작품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죠.

<Variations of Incomplete Open Cubes>에서는 열린 정육면체 구조를 반복 배열하며 모양의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탐구하는데, 반복이 수학적 사고를 시각적 조형으로 바꾸는 관문처럼 기능하죠. 그는 끝없는 반복이 결국 개념의 힘을 드러내며, 예술을 감각에서 구조로 이동시키는 전환을 이끌었습니다.
르윗의 반복은 ‘비슷함’이 아니라 ‘차이’를 발견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같은 규칙을 수백 번 따라가면서도 매번 새로운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반복이 세계를 더 단단하게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업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반복이 지루함의 반대편에서 세계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틴 마르지엘라 – 해체를 되풀이하며 쌓은 태도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는 “왜 옷은 완성된 면만 보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붙잡고 겉과 속을 바꾸거나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의 해체를 거듭하며 독특한 언어를 만들었습니다. 반복되는 해체는 마르지엘라가 만든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의 태도와 세계관을 구축하는 근간이 되었죠.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의 의상은 안쪽 솔기나 덧댐, 원래 숨겨져야 할 구조를 드러내며 옷의 규칙을 다시 쓰도록 유도합니다. 반복적으로 ‘뒤집힌 시선’을 제안하며 패션이 가진 권위와 문법을 흔들었고, 이 과정에서 옷은 형태보다 질문을 먼저 말하는 존재가 되었죠. 해체가 반복될수록 브랜드는 더 선명한 정체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Replica> 라인은 과거의 실제 의상을 연구하고, 그 실루엣과 감각을 거의 동일하게 복원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라인은 마르지엘라가 즐겨 사용하는 ‘기존 사물의 재해석’이라는 태도와 맞닿아 있죠. 동시에 얼굴을 가린 쇼나 익명성을 중시한 연출처럼, 브랜드는 반복되는 코드를 통해 ‘무엇을 만드는가’보다 ‘어떤 태도로 존재하는가’를 말해 왔습니다.
마르지엘라의 반복을 따라가다 보면 옷이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같은 해체가 이어질수록 브랜드의 본질은 더 또렷해지고, 패션은 새로운 질문을 향하게 되죠. 반복은 정체성을 고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방향을 잃지 않도록 붙드는 힘이 됩니다.
세 창작자는 서로 다른 시대와 방식으로 작업하지만, 공통으로 ‘반복’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세웠습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통해 두려움을 다루고, 또 다른 이는 개념을 실험하며, 누군가는 자신의 존재 방식을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같은 구조가 계속 이어지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변화와 축적된 시간, 그리고 더 단단해진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복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닮아 있다고 느낍니다. 매일 비슷해 보이는 하루에도 아주 작은 흔들림과 변화가 스며 있듯, 창작자들의 반복에도 각자의 사유와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결국 반복은 우리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멀리 보게 하고 더 깊이 생각하게 하는 힘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