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에서 만난 거장

70여 년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는 운보 김기창전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에서 만난 거장

오색 빛깔 단풍이 절정이던 11월의 어느 날, 천안에 다녀왔습니다. ANTIEGG 에디터 동료들과 함께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자 미술 기행을 떠났는데요. ‘하늘 아래 편안한 곳’이라는 뜻을 지닌 천안은 전국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지만, 흥미로운 미술관이 곳곳에 자리한 도시이기도 합니다.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에서는 현재 한국 근대 화단의 대가라 불리는 김기창 회고전이 개최되고 있었는데요. 조용히 몰입하고 때로는 감탄하다 보니 어느덧 두 시간이 훌쩍 흘렀죠. 그날의 생생한 현장을 되짚어보며, 천안의 대표 갤러리에서 펼쳐지는 한국화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동시대 미술의 실험실
아라리오 갤러리

이미지 출처: 아라리오 갤러리

1989년 개관한 아라리오 갤러리는 아시아 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며 동시대 미술을 활발히 이끄는데 앞장서 왔습니다. 아라리오라는 이름은 한국의 민요 ‘아리랑’에서 따온 것으로, 현재는 서울을 비롯해 천안과 상하이에 지점을 운영하며 다양한 작가들을 조명하고 있죠. 아라리오는 국내 상업 갤러리 중에서도 실험적이고 대담한 작품 선정이 돋보이는 곳인데요. 특히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은 세계 100대 컬렉터에 선정된 미술 애호가 김창일 회장의 남다른 열정이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키스 해링부터 라이프치히 화파 단체전, 중국 현대 미술 단체전 등이 모두 이곳에서 진행되었죠.

이미지 출처: 아라리오 갤러리
이미지 출처: 별별시장 별별여행

아라리오 그룹 김창일 회장은 씨킴(CI KIM)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작가이자 사업가인데요. 28살에 천안 터미널 사업을 인수하며 사업의 길로 뛰어든 그는 천안종합버스터미널을 시작으로 신세계백화점 천안아산점, 서울과 제주의 아라리오 뮤지엄까지 성공적으로 영역을 넓혀 왔습니다. 김창일 회장은 직접 공간을 리노베이션하고 작품을 디스플레이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백화점 바로 옆에 위치한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 입구로 들어서니, 그가 구입한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찬가(Hymn)>가 거대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
운보 김기창 전

이미지 출처: 아라리오 갤러리
이미지 출처: 에디터 본인 제공

현재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에서는 김기창의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 '운보 김기창' 展이 열리고 있습니다. 김기창은 만 원 권 지폐 속 세종대왕을 그린 인물이기도 한데요. 전시장에서는 1930년대 초기작부터 1990년대 후기작까지 총 106점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유성 매직으로 거침없이 써 내려간 파격적인 전시 서문은 45년간 그의 작품을 꾸준히 모은 김창일 회장이 작성한 것이라고 하죠.

이미지 출처: 아라리오 갤러리

7세 무렵 앓은 장티푸스로 인해 청력을 상실한 김기창은 시각적 감각을 고도로 발휘하며 전통 한국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왔는데요. 그는 동물이나 꽃을 그린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부터 당대 일상을 담은 풍속화, 성화, 문자도 등 끊임없는 실험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해 왔습니다. ‘예수의 생애’ 시리즈는 성경 속 장면을 한국적인 풍경으로 묘사해 큰 화제가 되기도 했죠. 1963년에는 한국 작가 최초로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하며 구긴 한지에 물감을 묻혀 찍어낸 마티에르 기법의 작품으로 한국적인 추상화의 가능성을 탐구하기도 했습니다.

전통부터 추상까지
70여 년의 여정을 따라가다

이미지 출처: 아라리오 갤러리
이미지 출처: 아라리오 갤러리

1층의 넓은 전시장에는 부엉이부터 독수리, 꿩, 닭 등 여러 종류의 새를 표현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후반기로 접어들수록 거칠어지고 투박해지는 힘찬 붓놀림이 인상적이었죠.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참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던 <등나무와 참새>는 생동감이 살아있는 작품이었는데요. 이는 김기창과 그의 부인 우향 박래현이 함께 그린 대형 합작도로, 박래현이 그린 등나무에 김기창이 참새를 더해 완성했다고 합니다.

싱그러운 자연을 담은 작품도 여럿 보였는데요. 처음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로 오해했으나, 알고 보니 비파나무를 그린 그림이었죠.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는 비파는 살구처럼 보드라운 질감에 오묘하고도 달큰한 맛이 특징으로, 잎과 뿌리 등은 약재로 쓰이는데요. 발걸음을 옮기니 벽면 한면을 가득 채운 6폭 병풍에 담긴 거대한 비파도가 등장했습니다. 풍성하게 영근 황금빛 열매에 덩달아 기분도 화사해지는 듯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아라리오 갤러리

2층에서는 1980년대에 작업한 청록산수 연작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는 녹색을 가장 좋아했다고 합니다. 오묘한 푸른빛이 도는 시원하게 펼쳐진 산과 들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를 상상해 보기도 했죠. 몇몇 작품은 실크 위에 그려져 은은히 빛을 발했고, 캔버스 곳곳에 칠해진 반짝이는 광물성 안료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주었습니다. 이렇듯 운보 김기창은 하나의 장르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는 탐구 정신으로 한국화의 발전과 현대화에 이바지했습니다.


에디터분들과 함께 서로의 감상과 생각을 공유하며 전시를 감상하니 평소보다 더 깊은 여운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운보 김기창' 展은 2026년 3월 22일까지 진행됩니다. 다가오는 주말, 예술의 정취가 흐르는 천안으로 미술 기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참고문헌]

  • 아라리오 갤러리 공식 홈페이지
  • 디자인프레스 아라리오 김창일 인터뷰
  • 데일리아트, 전통과 추상의 경계에서 -《운보 김기창》회고전, 2025.07.31.
  • 매일경제, 김창일 회장 “사업가의 삶은 고통…희망의 상징 무지개 그렸다”, 2024.03.13.
  • 포브스코리아, [에스.티. 듀퐁클래식에 새긴 그의 스토리]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 2018.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