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전시도 시각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페르난도 조벨
서울에서 전시를 볼 때 내가 보고 느끼는 이 시각이 맞는지 의문을 가질 때쯤 다른 나라에서 전시만 보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호기심에 싱가포르로 갔습니다.
싱가포르에서도 단독 회고전이 열리는 첫 사례라는 점에 이끌려 내셔널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페르난도 조벨Fernando Zóbel [Order is Essential] 을 보게 되었습니다.
4층의 우관증 갤러리에 들어서는 순간 하얗게 번진 벽면 위로 얇은 선들이 숨 쉬듯 펼쳐지고, 그 사이로 바다처럼 고요한 빛이 스며들었습니다. 200여 점 이상의 회화, 드로잉, 판화, 사진, 아카이브 자료가 포함되어 있는 전시를 둘러보면서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라 '질서(Order)'라는 단어가 감각적 언어로 번역되는 공간적 체험이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페르난도 조벨의 예술이 단일 지역이나 문화에 묶이지 않고, 동남아시아 · 남아시아 · 유럽 · 북미를 오가며 근대 미술 단면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이 전시는 "현대미술의 지형을 다시 읽기"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또, 전시가 지역(필리핀, 스페인, 미국) 간의 교차점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단일 시각이 아닌 복합적 · 글로벌한 미술사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교육적 · 미학적으로 가치가 높습니다.


조벨의 Saeta 시리즈(1950년대)는 시린지를 통해 뿜어낸 아주 얇은 선들이 공기 중에 습도와 만나며 살아 움직이는 듯했으며 캔버스에 뿌리듯 그리는 독특한 방식으로 유명합니다. Serie Negra(1960년대)는 흑과 백의 대비를 통해 극단적 단순성과 리듬을 탐구한 흔적들이 보이는 회화입니다. 후기작에서는 자연 풍광, 흐르는 시간, 움직임을 회화로 환유하는 작업이 나타납니다.
서울의 미술관 공간은 대체로 흰 벽과 정적인 조명, 균일한 온도로 통제된 감각의 장소이고 작품은 차갑게 보존되고 감각은 지적 행위로 제한된 공간입니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이 전시는 달랐습니다. 내셔널 갤러리는 건축적으로 '빛'을 적극 끌어들였고 외부의 열대 일광이 전시장 내부의 흰 벽을 타고 흐르며, 작품의 선과 색은 시시각각 변주합니다. 다시 말해 서울의 시각이 분석적이라면 싱가포르의 시각은 감각적입니다.
두 도시의 '질서'는 다르게 숨 쉽니다. 서울에서 본 조벨은 논리의 화가였고 싱가포르에서 본 조벨은 시(時)의 화가였습니다. 그의 선은 질서의 증거가 아니라, 혼돈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미묘한 깨달음은 정제된 서울의 흰 벽이 아니라 빛이 흔들리는 싱가포르의 공기 속에서 완성된 듯합니다.
밖으로 나와 뜨거운 공기를 마시며 문득 깨달았습니다.
질서는 완벽함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잠시 머무는 평형이라는 것을.
빛과 공기 , 그리고 조용한 질서의 형태로 혼돈 속에서 조화를 찾아가는 한 호흡의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