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쉼표가 되어줄 3곳

시간이 위로가 되는 풍경들

다양한 디자인의 새해 달력들이 하나 둘 알고리즘에 보이기 시작하고, 올 한 해 가장 많이 들은 음악을 확인하라는 알림이 뜨면 12월이 왔음을 실감합니다. 한 해를 기록하고, 다가올 시간에 대한 준비 역시 나날이 간편해지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AI가 눈 깜짝할 사이 해결해주는 세상이 되었음에 놀라워하면서 말이에요. 그럴수록 필자는 이맘때면 그런 세상의 변화의 대척점에 있는, 세월의 흔적이 남은 공간을 찾습니다.

오늘은 싱숭생숭하지만 설렘으로 가득한 연말, 생각을 천천히 정리하고 스스로에게 다정해지기 좋은 세 곳을 소개하려 합니다. 직접 머물러야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따뜻함으로 가득한 이 공간들이 여러분의 연말에도 작은 쉼표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에 만나는 부처님의 맑은 온기, 성북동 길상사

몇 해 전 성탄절, 성북동 언덕을 오르다 우연히 서울의 사찰 '길상사'에 다다른 적이 있습니다. ‘맑고 향기롭게’라는 문구가 적힌 명패를 보는 순간, 한 해 동안 구겨지고 굳어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듯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서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 덕분인지 도심을 잠시 벗어난 듯한 여유가 생겼고, 경내를 걷다 보니 미워했던 마음도, 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던 순간들도 서서히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길상사가 자리한 이곳은 과거 시인 백석과 연인 자야가 살던 집터이자, 이후 법정 스님이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머물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많은 시간이 층층이 쌓여 지금의 고요함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이 사찰을 더욱 깊고 특별하게 느끼게 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도, 새로운 다짐을 하는 일도 버겁게 느껴지는 날이라면 성북동 길상사에서 잠시 발걸음을 늦추고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마음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 경험이 조용히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서두르지 않는 저녁의 아름다움, 라칸티나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필자는 한동안 오래된 풍경을 찾아다니는 데 마음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국 최초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소개되는 식당을 발견했고, 망설임 없이 예약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전화로 예약을 하는 아날로그 시스템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고, 지하로 내려가는 길부터 벽돌 인테리어부터 백발의 서버분들이 양복을 입고 자부심 넘치게 일하는 모습, 반듯하게 코팅된 메뉴판, 무겁고 진지하게 생긴 식기들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온 모든 요소들이 완벽히 어우러져 왠지 모를 감동을 주었습니다.

해장국처럼 편안한 양파수프, 기교 없이 기본에 충실한 스테이크와 파스타처럼, 이곳은 화려함보다 ‘제 역할을 다하는 것’에서 오는 특별함을 보여줍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따뜻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한 해의 마지막 식사를 하며, 잠시 시공간을 건너는 듯한 즐거움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전성기 시절 삼성가 임원들이 즐겨 찾았다는 ‘삼성 세트’가 메뉴판 밖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꼭 기억해두세요.)


50년을 견딘 호텔의 단단한 밤, 온양온천관광호텔 

 ‘호텔’은 365일 24시간 내내 움직이며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든다는 점에서 언제나 특별합니다. 한때는 사치스럽고 낯선 공간이라 느껴 선뜻 찾지 않았지만, 지역의 오래된 호텔들을 방문하기 시작한 뒤 호텔에 대한 인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직원들의 노련함과 단단한 나무 가구들이 주는 안정감은 새로 지은 호텔에서 느끼기 어려운 편안함을 줍니다.

1966년 개관 이후 50년 넘게 충남 아산을 대표해온 ‘온양관광호텔’에 도착하면, 먼저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예고하는 듯한 웅장한 기와문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레드 카펫 복도를 지나 객실 문을 열면 정성스레 관리된 침구와 함께 1,300년간 끊임없이 이어져 온 온천수가 여행의 피로를 말없이 풀어줍니다.

대전 유성호텔과 남산 힐튼처럼 한 때 시대를 상징했던 호텔들이 문을 닫으며 계속해서 사라져 가는 지금, 과거와 현재를 잇는 몇 안 되는 호텔이라는 사실이 온양관광호텔을 더욱 소중하게 만듭니다. 시간의 끝과 시작이 만나는 연말, 온양에서 마지막 남은 피로와 고민을 온천에 녹여 보내며 낯설지만 편안한 혼자만의 밤을 보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효율과 새로운 자극에 익숙한 시대지만, 때로는 어떤 지식도 기술도 필요 없이 내 속도로 머물 수 있는 공간 하나가 가장 큰 위로가 됩니다. 묵묵히 시간을 견디며 이야기를 쌓아온 장소는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우리를 단단하게 지지해주는 존재가 되어주고, 그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시 다정해지는 법을 배웁니다. 올해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여러분에게도 그런 편안함 속에 작은 설렘이 깃든 공간이 하나쯤 떠오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