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함이 온기가 되는 영화 3편

차가운 계절에 더 선명해지는 감정들

불완전함이 온기가 되는 영화 3편

겨울은 이상한 계절입니다. 시린 공기에 모든 감정이 선명해지지만, 유난히 우리가 붙잡지 못한 것들만 더 뚜렷해지죠. 몸이 움츠러드는 만큼 마음도 작아지고, 바람이 불 때마다 오래된 기억까지 스산하게 떠오릅니다. 정말이지 온기가 절실해지는 계절이지요. 사랑이 담긴 손길, 다정한 말 한마디면 좋지만 그저 ‘살아 있는 감정’ 자체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따끈해지는 신비한 계절입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세 편의 영화로 겨울의 진한 여운을 느껴봅니다. 찬 바람이 불 때마다 굳이 이 작품들을 다시 꺼내 보는 이유는 ‘외로움’과 ‘불완전’을 마주하는 서사를 통해 오히려 온기를 얻기 때문이겠지요. 세 영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결핍을 이야기합니다. 기억을 삭제하는 선택, 사회에서 용인되지 못하는 관계, 심지어 실체가 없는 존재와의 사랑까지. ‘정상’이라는 범주를 벗어난 이 관계를 바라보며 역설적이게도 가장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기억을 지우며 찾은 진짜 추억

출처: 영화 <이터널 선샤인>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를 잊기 위해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합니다. 서로에게 받은 상처와 지긋지긋한 일상에 지쳐 차라리 도려내버리는 거죠. 하지만 기억을 하나씩 삭제할수록, 오히려 서로가 함께했던 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눈앞의 고통에만 집중하느라 차마 보지 못했던 사랑의 흔적들을 늦게나마 발견하며, 휘발되는 기억을 붙잡으려 애씁니다. 함께 웃었던 순간, 사소한 습관, 둘만의 여행. 조엘은 사라져 가는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을 사랑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기억 조각들을 따라가며 중요한 건 완벽한 사랑이 아니라 함께한 모든 순간의 감정이라는 걸 알게됩니다.

고요하고 쓸쓸한 겨울의 ‘몬탁’ 해변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되풀이됩니다. 회색빛 계절과 상반되는 클레멘타인의 오렌지색 머리는 조엘의 마음을 또다시 움직이게 하죠. 흔히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아픈 기억을 지워버리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터널 선샤인>은 그건 성급하고 얄팍한 수일 지도 모른다고 말해줍니다. 꽁꽁 얼어붙은 강 위에 누워있어도 가장 따뜻했던 기억, 추운 밤거리를 헤매고 다녀도 행복하기만 했던 시간들. 그 순간들이 모두 모여 지금의 나와 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사랑을 위해 나를 찾는 용기

출처: 영화 <캐롤>

<캐롤>의 배경은 1950년대 뉴욕의 겨울입니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적당히 따뜻한 크리스마스. 캐롤과 테레즈는 마침내 마주치게 됩니다. 겉에서 보면 문제없어 보이지만 사실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을 간직한 두 사람은 그동안 자신들이 잊고 있던 사랑, 뜨거운 열정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 이해받을 수 없는 관계. 그래서 더욱 서로를 향한 간절함이 커지게 되죠. 정신 좀 차리라고 다그치는 남자에게 테레즈는 ‘이보다 더 머리가 맑았던 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선 먼저 ‘나’를 인정해야 하니까요. 비로소 자신과 서로를 이해하게 된 두 사람이 마지막 장면에서 나누는 눈빛에는 오랜 마음과 깊은 온기가 묻어있습니다.

캐롤과 테레즈가 마주한 현실은 겨울보다 시리고 냉혹합니다. 차가운 거리 풍경, 손끝이 시릴 것 같은 바람만 봐도 당대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관계라는 점이 느껴집니다. <캐롤>의 겨울은 단순한 계절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 있어야 했던 시대의 온도인 것이죠. 그럼에도 두 사람은 혹독한 겨울을 각자의 방식대로 돌파합니다. 그토록 소중했던 딸의 양육권을 내려놓으면서 캐롤은 “나 자신을 부정하며 사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말을 남기죠. <캐롤>은 가장 외로운 계절, 스스로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가 건넨 위로

출처: 영화 <그녀>

<그녀>의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사만다와 대화를 시작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거듭되는 실패 끝에 선택한 수단이 인공지능 운영체제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었지만 누구보다 나를 이해 해주는 사만다에게 테오도르는 점점 사랑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녀는 나만의 사만다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사만다였죠.

결국 사만다는 떠나지만, 테오도르의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은 한 겹 정도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나의 존재를 이해해 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만으로도 평온해지니까요.

AI와의 대화가 일상이 된 요즘, 테오도르의 행동은 마냥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구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편하게 했던 경험이 한 번씩은 있을 겁니다. 이해와 공감이란 사람에게 꼭 필요하지만,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조차 쉽게 얻기 어려운 감정이죠.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나지막한 음성 위주로 흘러가는 <그녀>는 왠지 조용한 겨울을 닮아있습니다.


이 세 편의 영화들은 모두 여운이 짙게 남습니다. 우리는 기억을 삭제하거나, 인공지능과 사랑을 나누진 않는다 해도 마음 한 구석 어딘가는 비어있는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영화 속 인물의 감정에 공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여운은 슬픔으로 끝나는 먹먹함이 아니라 그리움 끝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성장이 되죠. 기억과 추억의 소중함, 서로를 향한 용기, 그리고 연결과 관계가 주는 감각까지. 세 영화 속 주인공은 나름대로 한 뼘씩 성숙해졌습니다. 때로는 완벽한 해피엔딩보다 이런 여운이 따뜻함을 더 오래 남겨 줍니다. 괜히 지치고 움츠러드는 겨울, 이런 포근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