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불안을 말할 때 불안해 하는가
세 철학자가 말하는 불안과의 조우
우리는 흔히 불안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불안’이란 단어 낱자 하나하나 살펴보면, ‘편안하지 아니하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편안’이 무엇인지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편안함은 일반적으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안락감을 뜻하는 단어로, 정신과 내면의 평정을 의미하는 ‘평안’과는 미묘하게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 자신의 몸과 사회적 안위가 충분히 보장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불안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불안은 특정한 대상 없이 막연히 나타나는 불쾌한 정서적 상태를 의미하며, 이러한 감정이 무엇 때문에 드는 것인지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공포’와는 구분되는 정서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번 글의 주제로 불안이라는 정서를 들고 온 까닭은 단순히 의학 서적에서 볼 수 있는 불안의 정의, 생리적 반응, 의학적 조치와 같은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정보도 불안이라는 감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겠지만, 엄밀하게 이러한 내용은 의학저널을 탐색해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제가 아래로 펼쳐낼 이번 글에서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각인된 세 명의 위인의 어록을 통해, 먼 후세의 우리 삶에까지 그 가치를 확장시키는 데 대한 시도를 해보고자 합니다.

다만 들어가기에 앞서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불안을 단순히 좋고 나쁨으로 그 편을 가르겠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안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감정 중 하나로, 지극히 정상적인 정서적 반응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불유쾌의 영역에 속한다고 우리의 뇌는 이미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감정을 선악의 범주로 명확히 구분하여 어느 한쪽에 닻을 내려 고정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랭 드 보통 : 불안이란 무엇일까?

“불안은 세상의 눈으로 본 나 자신의 가치나 중요성에 의해 촉발된다. 특히 사랑 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라는 다섯 가지 큰 원인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사랑받지 못하면 불안하다. 사회적 지위와 인정에 지나치게 기대면 불안이 커진다. 현대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동시에 소비와 비교를 부추기기에 더 큰 불안을 낳는다. 기대가 높아질수록 결국 우리 마음은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채 계속 불안해진다. 불안은 단순히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현대인의 삶에서 내재된 갈등 그 자체이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작가입니다. 그는 현대 사회가 가진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현대인들의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지나친 물질주의, 치열한 경쟁, 인정 욕구로 인해 사람들이 사회적 성공과 사랑, 자아실현 영역에서 큰 압박을 받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불안을 사회 구조와 문화 변화라는 넓은 맥락 속에서 해석합니다.
그의 연구는 사회, 경제, 정치 등의 영역을 개별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이를 한 인간 삶을 좌우할 수 있는 ‘인간의 날씨’같은 존재로 비유할 수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는 사회적 변화가 개인 내면의 불안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깊이 탐구한 그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새로운 불안에 직면하고 그것을 떨쳐내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인간 존재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과 인정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속물근성,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 능력주의 사회에서의 경쟁,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언제나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불안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놔두는 대신, 불안을 이해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불안은 단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알랭드 보통이 말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법’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사회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과학의 달이되면 미래 사회에 대한 상상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막대한 임무를 대회라는 명분을 통해 부여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저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하늘을 나는 자동차와 강아지를 산책시켜 주는 휴머노이드 로봇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미래’가 정확히 언제를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지만, 고작 십몇년 후를 미래라고 생각하며 그리진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새 과거에 그리던 미래가, 이렇게나 빨리 현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경악스럽도록 가파른 시간입니다. 그만큼 세상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변모하고 있음을 느낄 때 불안감이 듭니다.

세상이 변화되고 있다는 가시적인 흐름이 흥미롭긴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동시에 불확실성과 불안정 또한 동반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무작정 앞으로 뛰쳐 나아가는 사회 속에서도 살아가야하는 것이 필연이고 숙명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쉼과 여유를 찾으려는 의도조차도 점차 나태함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은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던 유목민들의 삶이 지금의 우리보다 더 평온하지 않았을까 하는 오만한 생각을 해봅니다. 그들은 풀이 무성한 곳을 발견하면 잠시라도 머무를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테지만, 우리는 오늘의 무거워진 눈꺼풀을 내려놓기 전에 끊임없이 다가오는 내일의 불안을 감당해야 합니다. 마치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져버릴 지붕처럼 안정감을 잃어버리고, 그로 인해 밤새도록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뜬 눈으로 긴 밤을 지새워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오늘날의 불안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에픽테토스 : 불안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은 외적 현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내 마음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즉, 불안은 우리의 인식, 즉 ‘표상’에 기인한다. 어떤 사건이나 대상 자체가 좋고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불안의 근원이 된다.”
에픽테토스는 로마 제국 시대의 노예 출신 철학자이자 후기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철학에서 등장하는 불안이라는 개념 역시 스토아 철학의 기본 원리인 ‘이성(logos)’가 뚜렷하게 물들어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 감정은 우리의 ‘판단’에서 비롯됩니다. 어떤 사건을 ‘나쁘다’고 판단할 때 비로소 불안이라는 감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즉, 사건 그 자체보다는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가 불안의 실체를 결정짓습니다.

불안을 유발하는 상황은 대체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상황은 내가 만들었다기보다는, 사실 어느 누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보편적 경험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이 개인에게 맞닿았을 때, 우리는 이를 사고를 통해 판단하게 되고, 이 판단을 토대로 새로운 감정적 반응, 즉 불안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는 어떤 사건이나 대상 자체가 좋고 나쁨을 결정짓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가 곧 불안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에픽테토스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성을 활용해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점검하고, 스토아 철학의 실천적 지혜인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판단과 태도(프로하이레시스) 뿐이므로 ,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 감정에 휘둘려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관조적 시선을 통해 감정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감정이 일어나는 현상 자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 불안이란 무엇일까

“삶은 끊임없는 고통과 불안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과 고통이 바로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우리가 직면하는 내부의 혼돈과 불안은 우리 자신을 성장시키는 산고와 같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불안에 얽매이지 않고 삶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자기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9세기 혼란스러운 유럽, 기존의 도덕과 철학 체계가 붕괴되던 혼동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 철학자입니다. 그에게 불안과 고통은 단순히 심리적으로 괴로운 감정이 아니라, 삶의 불가피한 일부이며 동시에 본질적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니체는 불안과 고통을 도피하거나 적대시해야 할 장애물이 아닌, 우리의 인생 한편으로 수용하고 마주해야 할 무엇으로 바라봅니다.
운명애(amor-fati)-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통해 내면의 자유를 얻고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힘과 원동력을 획득할 수 있는 귀중한 자산임을 강조합니다.

니체의 저서 <선악의 저편>에서는
“당신이 깊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본다.”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심연’은 마음속 깊이 잠재된 불확실성과 혼돈, 그리고 우리가 마주하기 두려워하는 불안과 고통을 상징합니다. 심연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두려움을 직면한다는 의미이고, 심연이 우리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본질과 한계를 마주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니체는 이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바로 이 고통 속에서 우리가 진정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불안을 단순히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것으로만 보기보다,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가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며, 이쯤에서 불안을 재정의해보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철학자의 통찰은 각기 다른 시대와 배경 속에서도 불안이라는 인간의 공통된 감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처럼 불안은 시간을 타고 넘으면서 끊임없이 탐구되고 사유되어 온 주제입니다. 그만큼 불안이란 감정이 인간 존재에 깊숙이 내재된 너무도 당연하고 보편적인 감정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불안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와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어느 인간에게나 불안은 힘겹고 풀기 어려운 감정이며, 인류가 지금까지도, 어쩌면 앞으로도 풀어가야 할 힘겨운 난제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불안을 마주하고, 그 불안한 자신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일은 우리에게 큰 용기를 요구합니다. 특히 삶의 불확실성과 변화 속에서 더욱 짙게 드러나는 ‘불안’을 통해 우리가 구축한 존재의 틀을 확장하고, 자아를 성장시킬 기회로 삼는 것은 어떨까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이를 삶의 도전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순간은 우리 삶에서 매우 의미있는 장면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