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어리더는 단지 조연인가?
영화 <빅토리>가 새롭게 발견한 응원의 주체성
스포츠 경기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필드 위의 선수와 그 옆의 치어리더. 치어리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말하자면 영웅 서사의 필수 요소 중 하나인 '조력자'에 가까운 듯하다. 시련을 겪는 주인공 옆에 때마침 나타나 필요한 조언을 해주고 홀연히 사라지는 역할. 즉, 주인공이 없으면 등장조차 할 수 없는 조연.
하지만 정말 치어리더는, 응원하는 사람은 그저 주연을 위해 존재하는 배경 장치에 불과할까? 이들을 누구보다 주체적인 주인공으로 호명하는 영화 <빅토리(2024)>를 통해 응원의 의미를 재해석해 보고자 한다.
*영화 <빅토리>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경기장의 꽃'으로만 불리는 사람들
치어리더는 국내 스포츠의 흥행 요소 중 하나인 응원 문화를 이끄는 핵심 역할이다. 대중에게는 국내 프로야구의 '삐끼삐끼 춤' 열풍을 불러일으킨 이주은 치어리더, 대만에 진출해 치어테이너(치어리더+엔터테이너)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다혜 치어리더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경기장의 꽃'이라는 수식어로 불리곤 한다. 이 단어에는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된 치어리더를 일종의 눈요기, 막간의 오락으로 여기는 대상화의 시선이 그대로 담겨있다. 엄연한 전문성을 갖춘 독립적인 퍼포머가 아닌, 경기장을 보기 좋게 장식하는 도구 정도로 소비하는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포털 사이트에 '치어리더'를 검색하면 특정 신체 부위를 헤드라인 문구에 강조하거나 '섹시한', '애교 있는' 등의 표현을 사용한 기사가 쏟아진다. 반면 이들의 완성도 높은 퍼포먼스나, 현장에서 끌어낸 에너지에 대해서 언급하는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치어리딩의 본고장인 미국은 어떨까? 미국은 텀블링, 점프, 토스 등 체조 기반의 '스턴트 치어리딩'이 주를 이루며, 치어리더는 고난도 동작을 수행하기 위해 선수 못지않은 전문 훈련을 받는다. 그런데도 각종 미디어에서는 오랫동안 치어리딩을 '멍청한 금발 여자애들(Dumb Blonde)'이나 하는 것으로 묘사해 왔다.
"치어리딩에 편견을 가진 사람이 많아요. 치어리더는 그저 멍청한 금발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고작 '파이팅!' 같은 거나 외친다고 생각하죠."
_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치어: 승리를 위하여> 중에서
치어리더(cheerleader)는 응원을 이끄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이들에 대한 실제 인식은 이렇듯 선수의 후광에 기대는 부속품이거나 경기장을 꾸미는 도구에 불과하다. 일부 스포츠 팬들은 그런 치어리더를 향해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있으나 마나 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응원의 진정한 본질은 과연 무엇이며, 치어리딩은 왜 존재해야 할까?
영화 <빅토리>가 치어리더를 바라보는 방법

<빅토리>의 '필선'과 '미나'는 댄서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1999년 거제의 고교생인 이들이 댄스 연습실을 가지기 위해서는 교내 축구부를 응원한다는 명분에 기대야만 했다. 필선과 미나는 서울에서 온 치어리더 출신 전학생 '세현'과 함께 축구부를 위한 치어리딩 동아리 '밀레니엄 걸즈'를 결성한다.
밀레니엄 걸즈를 이루는 아홉 명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 주연에 의존하는 조연의 위치를 강요받는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마치 경기장 위 치어리더에 대한 세간의 인식처럼. 세현은 자신의 이름보다는 축구부 에이스의 여동생으로 불리고, 7자매의 장녀인 미나는 자신의 꿈보다는 식구들을 챙겨야 한다. 필선은 백댄서가 되기 위해 호기롭게 상경하지만, 가수가 돋보이도록 백댄서는 뒤돌아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만년 깍두기, 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 앞에 번번이 가로막히는 '가시나'들. 어리다는 이유로, 춤을 춘다는 이유로 이들의 존재와 의지는 쉽게 무시당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을 들러리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응원의 주체성'에 주목하는데, 이런 관점은 특히 영화 중반부에 잘 드러난다. 호흡이 맞지 않아 실패로 끝난 첫 번째 치어리딩 공연 이후, 밀레니엄 걸즈는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응원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직접 찾아다닌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시장에서, 병원에서, 파업 현장에서 팔과 다리를 쭉쭉 펴가며 힘차게 응원한다.
이 장면들에서 밀레니엄 걸즈의 표정은 그저 그렇게 있다가 사라질 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생생하다. 경기장을 꾸미는 소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응원하기로 스스로 결정한' 가장 주체적인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응원이 사람들에게 실제로 닿는 것을 보며 밀레니엄 걸즈는 응원의 진정한 의미와 함께, 치어리딩을 통해서라면 나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간다.

"내는 니 옆에 있으면서 조연이라도 된 거 같아 갖고 늘 좋았다."
"미나야, 니는 누가 뭐라 캐도 주연이다. 니도 내도 다 주연이다."
_영화 <빅토리> 중에서
영화의 결말부, 교내 축구부는 밀레니엄 걸즈의 응원에 힘입어 3, 4위 결정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카메라는 환호하는 선수들 뒤에서 말없이 웃고 있는 밀레니엄 걸즈를 오래 비춰준다. 언뜻 경기장 한쪽의 배경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온 관객만은 안다. 뿌듯한 표정과 맞잡은 손에는 '이 장면을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다'라는 자부심이 맺혀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응원한다'는 말을 실제로 건네본 적 있는가? 필자는 이 영화를 보며 그동안 응원을 너무 아끼지는 않았는지 생각했다. 응원을 받기만 하는 주연이 되고 싶은 마음에, 옆에서 박수를 보내는 조연을 자처하는 건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로 응원에 너무 박하지 않았던가.
<빅토리>는 필자처럼 응원을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사실 응원은 조연이 되는 일이 아니라, 먼저 손을 건네기로 마음먹은 주연의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응원하는 것은 나를 응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응원은 상호 의존의 시작점이다

"응원한다. 내를. 그리고 느그를."
_영화 <빅토리> 중에서
'경기의 곁다리에 불과한 응원단이 왜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빅토리>는 응원이 존재할 때 비로소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응원은 주인공의 스포트라이트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행위이며, 더 나아가 응원하는 사람과 응원받는 사람의 상호 의존을 가능케 하는 첫 시작점이라는 시각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우리의 현실에도 존재한다. 2024년 12월, 추운 거리를 색색의 빛으로 채웠던 수많은 응원봉. 그해 겨울 누군가를 응원하는 마음을 들고나온 '응원단'들은 결코 조연이 아니었다. 누구든 좋아하는 대상의 응원봉을 들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응원봉이 없는 사람들은 일부러 빌리거나 만들기도 했다.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강아지 발냄새 연구회'처럼 저마다의 관심사에 맞는 재치 있는 문구를 쓴 깃발들도 응원의 물결에 당당히 합류했다.
한 명씩 용기 낸 응원은 또 다른 응원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사람들은 응원하는 사람을 응원하며 서로에게 기대는 상호 의존의 장면을 직접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영화 <빅토리>가 조명하고자 한 '응원의 본질'이 아닐까?
치어리더는 선수와 관중 사이에 선다. 관중의 환호를 유도해 선수에게 닿을 수 있게 만들고, 선수는 그 덕분에 응원을 들으며 힘을 낸다. 실제로 2018년 미국 존스홉킨스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의 응원을 받은 선수 중 90%가 더 높은 성과를 낸다[1]고 한다.
이렇듯 응원은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기대거나 종속되는 것이 아닌, 그 자리의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고 흩어진 개인을 한데 모아 서로 의지하게 만드는 최초의 연결고리다. 이런 관점으로 응원석의 치어리더들을 다시 바라본다면 어떨까? 그저 경기장의 장식이 아닌, 우리가 서로 의지할 수 있도록 먼저 손을 건네는 적극적인 주연으로 보일 것이다.
Johns Hopkins University Hub, Having an audience might make you perform better, study finds(2018.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