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지워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법
청계천과 을지로의 남겨진 기록에 관한 책 3권
얼마 전 충무로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리빙 을지로(Living Euljiro)〉 상영회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의 도시 개발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 감독이 코로나 시기에 한국으로 건너와, 산림동의 장인들을 인터뷰하며 시작된 작품입니다. 철거를 앞둔 시기의 이야기와 실제로 철거되는 모습, 그리고 을지로에서 일찍부터 장사를 해 터를 잡은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을지로 1호 노가리집으로 알려진 오비베어의 이야기도 담겨 있었습니다.
상영이 끝나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을지로와 청계천은 서울에서 9년을 살며 제게 꽤 가까운 동네였어요. 세운상가에도 자주 갔고, 골목길 사진을 찍고, 노포를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깊이 들여다본 적은 솔직히 없었습니다. 낭만적으로 소비하기만 했던 거죠.
한때 도시 빈곤 문제에 깊이 관심을 두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었습니다. 노점상과 홈리스에 관한 영상을 제작하면서 '가난을 밀어낸 자리에 세워진 도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서울의 아름다운 면만 보려 했던 것 같습니다. 〈리빙 을지로〉는 그렇게 한동안 잊고 있던 도시 이면의 이야기에 다시 눈을 돌리게 해준 계기가 되었어요.
이 글은 그 상영회 이후 다시 펼쳐본 세 권의 책 이야기입니다. 청계천과 을지로라는 같은 공간을, 빈민운동가·활동가·연구자 세 사람의 시선으로 기록한 책들입니다.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지워진 사람들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낭만적으로 소비하는 도시의 뒷이야기
최인기,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2003년, 청계 고가도로 철거를 시작으로 청계천 복원 사업이 시작됩니다. 5.8킬로미터에 달하는 도심 하천을 복원하는 데 투입된 시간은 불과 2년 3개월. 3,800억 원의 예산이 쏟아졌습니다. 해외에서는 비슷한 규모의 하천을 복원할 때 이해당사자들 간의 협의 과정을 거쳐 약 10년 가까이 시간을 두는데, 한국에서는 그 과정이 통째로 생략된 셈이었습니다. 공권력과 공무원, 용역 5,000명이 노점상을 단속하는 데 투입되었고요.
이주 대책으로 송파구 문정동이 상인들에게, 숭인동 서울풍물시장이 노점상에게 마련되었지만, 장사가 시원치 않고 임대 형식이라 안정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계천 복원으로 갈 길을 잃은 상인들이 서울시와의 협의를 통해 동대문에 풍물벼룩시장을 조성했지만, 5년 뒤 시장이 바뀌자 DDP 건설로 인해 또다시 내몰렸다는 이야기는 이 책에서 가장 씁쓸한 대목 중 하나입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2만 개에 달했던 서울의 노점상은 2014년 기준 8,000개 정도로 축소되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평화시장, 청계천을 기록한 노무라 할아버지. 이 책은 우리가 감성적이고 낭만적으로 소비하는 도시 풍경의 뒤편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를 처음으로 보여준 책이었습니다.
가난의 시선으로 다시 쓰는 서울의 역사
김윤영,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
빈곤사회연대 활동가인 김윤영의 이 책은, 일반적인 시선으로 쓰여진 역사가 아닌 '가난의 시선'으로 쓰여진 서울의 역사입니다. 최인기 작가의 책이 청계천 재개발의 구체적 과정을 기록했다면, 김윤영 활동가는 그 과정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도시 전체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따라갑니다.
1977년, 답십리까지 청계천 복원 공사가 완료된 이후 판자촌 사람들이 완전히 쫓겨났고, 이들이 서울 곳곳의 달동네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철거민, 노점상, 홈리스. 빈곤과 도시 빈민을 가리기 위해 도시 개발이 빚어낸 폭력의 이야기가 이 책에는 담겨 있습니다.
특히 '국일고시원' 화재 사건을 다루는 대목이 인상 깊었습니다. 고시원은 현대 빈곤을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개발이 진행되고 오피스텔이 들어서면, 고시원에 살던 사람들은 또 어디로 밀려나게 될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기존에 보던 세상을 아예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
리슨투더시티, 『산림동의 만드는 사람들』
세 번째 책은 도시공학 박사이자 리슨투더시티 디렉터인 박은선이 기획한 작업입니다.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 산림동이라 불리는 곳에는 수십 년간 쇠를 다루고 기계를 만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6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금속제조업 밀집 지역. 이곳의 장인들은 45년 넘게 기술을 이어왔습니다.
이 책은 그 장인 38명의 인터뷰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각자의 간판과 명함, 일하는 모습의 사진, 어떤 작업을 하는지,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마치 민속학적인 기록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미시적으로 담겨 있어요.
이것은 단순히 '오래된 것은 좋다'라는 감성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장인들이 한국 제조업을 밑에서 받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의 시제품을 만들고, 다른 곳에서 만들지 못하는 부품을 제작하던 기술 생태계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던 청계천·을지로 생태계가 얼마나 기술집약적인 곳이었는지, 그곳을 잃게 된 것이 어떤 손실인지를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감각할 수 있었습니다.
2025년 가을, 이들은 모두 철거되었습니다. 이주단지에 입주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단순히 도시의 미관 때문에, 그냥 낡았다는 이유로요. 무엇보다 이 책이 가진 힘은, 사라질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이름 불러 기록했다는 것 자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은 그 자체로 저항이 됩니다.
세 권의 책을 다시 펼치면서 계속 떠오르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발전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우리가 매일 걷는 깨끗한 거리, 높이 올라가는 새 건물, 정비된 하천 산책로. 그 아래에는 삶의 터전을 잃고 흩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노점상이 밀려나고, 판자촌이 철거되고, 장인들이 흩어지는 과정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들어선 새로운 풍경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오래된 것과 새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규모의 문제도 아니입니다. 도시를 구성해온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한 존엄한 개인으로서의 삶이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쉽게 짓밟혀 왔는지의 문제입니다. 이미 우리는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밟고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은 그만큼의 가속이 더 이상 필요한 시대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 대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시를 걸을 때, 새로 지어진 건물 앞에 설 때,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원래 무엇이 있었을까.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질문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발전의 방향은 달라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