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빈틈을 채운 도쿄 SKAC
미완의 정신으로 완성되는 대도시의 유휴 공간 활용법
자극적인 쇼룸과 화려한 팝업스토어로 가득 찬 거리를 걷다 보면, 문득 도시가 거대한 테마파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아침 개장해 단 하루 동안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도파민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말이에요. 완성도 높은 이 공간들은 사람들에게 더 새롭고 짜릿한 5분간의 경험을 주기 위해 눈부시게 탄생했다가, 소임을 다하면 언제 존재했냐는 듯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도시의 공간들이 이렇듯 '어떻게 주목받을 것인가'를 고민하며 화려한 외형 변신에 의존할 때, 어떤 공간들은 스스로 '미완의 형태'를 자처하며 도시의 빈틈에 조용히 자리 잡습니다. 최근 도쿄를 여행하는 이들 사이에서 뜻밖의 필수 코스로 떠오른 ‘SKAC’은 바로 이러한 미완의 정신을 가장 극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곳입니다.
도심 속 유휴 공간이 문화 시설로 재탄생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지만 SKAC이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필자가 이 곳에 직접 머물며 느낀 감상을 통해, 도파민 가득한 이 도시에서 우리가 정말로 곁에 두고 싶은 공간은 어떤 모습일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고가도로 아래 버려진 공간의 재탄생
‘SKWAT KAMEARI ART CENTRE’, 줄여서 ‘SKAC’이라 불리는 이 공간은 도쿄 중심지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여를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생소한 동네, ‘가메아리’역 근처에 위치해 있습니다. 목적지로 향하며 머릿속에는 ‘왜 하필 이렇게 멀고 낯선 곳일까’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에 내려 고가도로 아래 덩그러니 놓인 유휴 건물을 마주하는 순간, 그 질문은 이 곳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곳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프로젝트 팀 ‘SKWAT’은 ‘불법 점유’를 뜻하는 단어 ‘Squat’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습니다. 설계사무소 ‘다이케이 밀즈(DAIKEI MILLS)’의 나카무라 케이스케를 필두로 한 이들은, 2019년 겨울부터 도시의 유휴 시설을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해방시켜 사회적 가치를 불어넣는 일종의 공간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철길 아래 버려진 땅,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변두리의 유휴 건물이 어떻게 도시에서 가장 뜨거운 문화적 거점이 될 수 있었을까요?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한 SKAC의 입구는 건축 자체에 힘을 실어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반적인 복합 문화 시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SKAC INSIDE: 미완의 공간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이미지 출처 : SKWAT 인스타그램
SKAC에 발을 들이며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는 뜻밖에도 ‘아시바 천국’이었습니다. 공사 현장에서나 볼법한 거친 철제 비계(아시바)들이 공간 전체를 가로지르며 유휴 시설 특유의 날 것 그대로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거친 골조들은 역설적으로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는 ‘일시적 점거’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최소한의 개입으로 최대한의 가능성을 열어둔 이들의 방식은 완성된 공간에 익숙해진 우리의 고정관념을 가볍게 무너뜨립니다.


이미지 출처 : 황예지 에디터
이 차가운 구조물을 생동감 있게 만드는 것은 그 사이사이를 밀도 있게 채운 수천 장의 종이와 오래된 LP들입니다. SKAC은 다양한 파트너들과 함께 공간의 콘텐츠를 만들어 나가는데, 그중 하나가 세계 각국의 아트북을 큐레이션하는 'twelvebooks'입니다. 덕분에 방문객들은 평소 접하기 힘든 희귀 예술 서적들 사이를 유영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 옆으로는 런던의 유명 레코드숍 'VDS(Vinyl Delivery Service)'에서 온 중고 레코드들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수백 장의 앨범을 디깅하다 취향에 닿는 LP를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청음을 해볼 수도, 운이 좋다면 합리적인 가격에 귀한 음반을 손에 넣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경계를 가로질러 공간의 일부가 되는 사람들

이미지 출처 : 황예지 에디터
아시바 계단을 오르내리며 보물 찾기 하듯 공간을 탐색하다 보면 흥미로운 장면과 마주치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진지하게 책장을 넘기는 방문객이, 그 바로 앞에서는 이곳을 거점 삼아 일에 몰두 중인 직원의 모습이 교차하는 것입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어디까지가 매장이고 어디서부터가 일터인지, SKAC은 그 경계를 명쾌하게 지워버립니다. 덕분에 잠시 들른 객체에 불과했던 방문객들은 어느새 책과 음악, 그리고 사람이라는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공간의 일부가 됩니다.


책과 음악으로 가득했던 아시바 숲에서 잠시 빠져나와 옆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카페 'TAWKS'로 향하는 작은 문이 나타납니다. 이 곳에서는 바리스타가 직접 내리는 싱글 오리진 커피와 함께 SKAC의 전시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황예지 에디터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한국의 이광호 작가가 선보이는 ≪GHOST IN THE SHELL≫ 전시가 한창이었습니다.
카페이자 전시 공간인 TAWKS에서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미술관에서라면 '만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과 함께 보호 받았을 예술품들이 이곳에서는 감상의 대상을 넘어 이용객들의 편안한 '의자'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작품이 일정한 간격을 둔 채 딱딱하게 놓인 피사체에 머물지 않고, 누구나 앉아 쉴 수 있는 가구로 스며든 풍경. 다양한 세대와 인종의 사람들이 예술 작품 위에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그 질감을 손끝으로 마음껏 느끼며 공간을 향유하는 모습은 묘한 해방감을 선사했습니다.
모든 공간은 생물과 같아서 사람의 발길에 따라 숨을 쉬기도, 멈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명이 다한 듯 보이는 유휴 공간을 어떻게 정의하고 바라 보느냐에 따라, 어떤 곳들은 환골탈태와 같은 화려한 변신 없이도 이전보다 강력한 생명력을 얻습니다.
건물의 형태나 찰나의 자극에 의존하지 않고, 도시의 맥락과 사람에 집중해 미완의 공간으로서 그 의미를 찾는 SKAC처럼 누군가의 발길에 따라 끊임없이 가변하며 도시와 유기적으로 호응하는 ‘영리한 빈틈’들이 우리 도심 곳곳에 더 많아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SKAC(SKWAT KAMEARI ART CENTRE)
주소:도쿄도 가츠시카구 니시카메아리 3쵸메 26-4
영업시간:11:00~19:00
정기 휴일:월요일・화요일
정보:공식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