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사 학경 차, 그리고 차학경
분열된 자아와 화합하는 차학경의 다이스포라 예술

우리는 소속감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딘가에 소속되어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고, 타인과 연결될 수 있다는 안정적인 감각은 비단 한 곳에 정착해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얻을 수 있는게 아닙니다. 특히 모든 것이 쉽게 바뀌는 불안정한 현대 사회에서는 말이죠. 늘 떠돌고 있다는 삶의 감각은 필연적으로 정체성의 균열을 낳기도 합니다.
디아스포라는 자의든, 혹은 외압에 의해서든 원래 있던 곳을 떠나 다른 곳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살고 있는 나라에서는 외국인, 고향에서는 조국을 떠난 이민자인 이들은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갑니다.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외국어로 생활하며 느끼는 혼란과 괴리감은 내가 누구인지,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는건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자아에 여러 갈래의 균열을 냅니다.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디아스포라로 살아갔던 예술가 차학경은 내면의 뒤섞인 자아의 파편속에서 하나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층적인 자아, 그로부터 오는 불안과 불완전의 감각을 인정하고 화합하려 노력했죠. ‘테레사 학경 차(Theresa Hak Kyung Cha)’라는 그의 이름처럼요.
다중 언어의 분열과 감각
이중언어, 혹은 다개국어 사용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Did you just 비웃어 me man” 이라는 밈의 존재가 말해주듯, 두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다 보면 한 문장에 여러 언어가 섞이고, 언어의 전환이 느려지며 어휘를 혼동하곤 하죠. 차학경의 초기작은 한국어가 모국어인 그가 영어와 기타 외국어 습득 과정에서 느낀 혼란과 정체성의 균열을 신체를 활용해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흑백 화면이 지직거리고 입모양이 서서히 클로즈업됩니다. 천천히 한국어의 8개 모음을 발음하죠. 모음만 발음하기에 한국어인지 다른 언어인지 육안으로 쉽게 분간할 수 없고, 흘러나오는 새소리와 물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퍼포먼스 비디오 ‘입에서 입으로(Mouth to Mouth)’는 차학경이 한국어를 배우고 잊어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느낀 언어 단절의 불안감을 시각화합니다.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인 언어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감각도 흔들리게 됩니다. 이러한 불안을 신체 감각으로 치환함으로써 언어 단절의 경험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며, 자신의 일부로 화합합니다.

온통 까만 배경에 영어 단어 ‘see’, ‘empty’, 그리고 ‘sound’가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배경에는 차학경이 단어를 발음하는 소리가 배경과는 묘하게 어긋난 시차를 두고 깔립니다. 이는 ‘바이링구얼', 그러니까 이중언어 사용자의 머릿속을 재현합니다. 각기 다른 문법과 발음 규칙을 가진 두 개 이상의 언어가 머릿속에서 뒤엉켜, 언어를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내뱉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중 언어의 세계인 겁니다. 그러나 ‘비디오엠(Videoeme)’은 이러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새로운 리듬과 감각을 발견합니다. 이민자로서 외국어를 써야 하는 운명에 순응하거나 혼란한 자아로 고통받기 보다 기존 언어 질서 바깥의 소통 방식을 실험하고,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귀환 불가능한 망명자의 기억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저를 포함해 많은 유학생, 이주자들은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현재 살고 있는 국가가 ‘외국’처럼 느껴지는 것 처럼, 오랜만에 방문한 한국마저도 ‘내 나라’가 아니라 잠시 여행하는 외국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말이죠. 다른 문화권에 생활의 기반을 둔 이주자는 나고 자란 나라에서조차 생경함과 어색함을 느낍니다. 이렇듯 이주 경험은 비단 언어 문제뿐 만 아니라 모든 감각과 관계합니다.


차학경, '엑사일레(Exilée)', 1980, 이미지 출처: ResearchGate
그림자가 드리워진 정겨운 툇마루와 찻잔, 구름 등 흐릿하고 서정적이며 한국적인 모티프 이미지가 하나씩 스쳐갑니다. 동시에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망명자’의 언어, 즉 한국어, 영어, 불어가 뒤섞인 목소리가 병치됩니다. 후기작으로 분류되는 ‘엑사일레(Exilée)’는 차학경이 18년 만에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비디오 설치 작품입니다. 이제는 희미해진 한국의 잔상과 이질적이고 불분명한 음성은 그 어디에도 돌아갈 수 없는 망명자의 혼란하고 분열된 감정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귀환이 불가능한 망명자의 감정을 지우거나 억누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날 것의 감정을 꺼내어 시각화하고 작품을 통해 혼란한 내면과의 화해를 시도하죠. 망명자로서의 ‘나’도 그저 ‘나’이기 때문입니다.

1980년, 차학경은 남동생과 뉴욕에서 한국으로 건너옵니다. 사진, 소설, 영화 등 장르를 넘나드는 영화 ‘몽고에서 온 하얀 먼지(white dust from Mongoloa)’ 촬영을 위해서였죠. 하지만 그의 야심찬 구상은 전두환의 정권 장악과 그에 따른 정치적 불안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단됩니다.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은 작품에서는 식민 통치를 피해 만주로 이주한 그의 어머니의 삶을 기억을 되찾는 기억상실증 여성으로 은유합니다. 이민과 전쟁 등 다양한 이유때문에 버림받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수많은 집단적 정체성들을 대변하죠. 어쩌면 자신이 넘나들 수밖에 없었던 경계들—국가, 언어, 젠더, 장르—을 흐리고 스스로와의 화합을 이뤄 이방인으로서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을 지 모릅니다.
말해지지 못한 이야기들, 들리지 못한 목소리들
차학경의 대표작이자 유작인 ‘딕테(Dictée)’의 제목은 불어로 ‘받아쓰기’를 뜻합니다. 정형화된 형식과 언어를 따르기보다는, 그것들을 해체하고 균열시키는 방식으로 기억과 정체성을 다루죠. 특히 작가 자신의 이주 배경, 여성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역사적 억압 속에서 말할 수 없었던 존재들의 목소리가 교차하는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말해지지 못한 이야기들’, ‘들리지 못한 목소리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학경은 혼돈과 단절의 상태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그 불완전 속에서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딕테’는 고대 그리스의 9명의 뮤즈 이름을 딴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마다 실존 인물인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잔 다르크, 유관순, 성 테레사, 그리고 작가의 어머니 허형순 등은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에 존재하지만, 모두 억압 속에서 침묵을 강요받거나 불가능한 말하기를 시도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 각자의 기억과 이야기를 담은 텍스트는 신화와 섞여 앞뒤가 맞지 않고 불완전합니다. 한국어, 영어, 불어 등 다섯 개의 언어와 함께 사진, 드로잉, 신문, 시, 산문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분열된 자아와 사라져가는 기억을 시각화한 겁니다. 이러한 파편적 구조를 통해 침묵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의 경험과 목소리는 역사적이고 신화적인 서사 위에 겹쳐집니다.

차학경은 단절과 침묵, 분열을 극복하거나 지우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이질적 파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충돌과 겹침 속에서 새로운 의미의 층위를 만들어갑니다. 분열된 자아와 억압된 기억들은 날 것 그대로 드러나 말해지지 못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복원하죠. 강요된 침묵과 타국어 속에서의 언어 상실을 거부하고, 분절되고 균열된 자기 목소리를 시각화함으로써 억압된 ‘나’와 화합하고자 합니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혼돈과 강요를 거부하며 스스로와 화합하려는 고뇌의 표현입니다.
별자리, 혈액형, MBTI, 사주처럼 나를 설명해주는 체계들이 유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품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택과 변화 속에서 나의 ‘진짜’ 자아는 무엇인지,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단정하기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체성은 정말 단일하고 명확해야만 할까요? 어딘가에 속하지 못한 자아를 억지로 설명하기보다, 그 불완전하고 분열된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감각이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차학경은 바로 그 질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한 사회에 온전히 속하지 못했던 그는, 혼란스럽고 단절된 자아를 애써 하나로 통합하려 하기보다, 분열된 조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감각과 의미를 다시 엮어 나가려 했습니다. 어느 사회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이방인의 자리에서, 세계와 접속하고 관계 맺으려는 새로운 화합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여러 문화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혹은 내면의 다양한 자아를 이해하려 애쓴 적이 있다면, 그의 작품은 당신에게 말을 겁니다. ‘정체성’은 꼭 단단하고 명확해야만 할까요? 아니면, 흐릿하고 불완전하더라도 그 자체로 진실한 것일 수는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