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하지 않은 디테일에 대하여
영화 <세계의 주인>을 통해 보는 미디어 보도 준칙
영화는 주인공 ‘주인’의 키스신으로 시작한다. 연애가 서툴지만 사랑을 꿈꾸고, 장난기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엄마와 동생을 살뜰하게 챙기는 평범한 고등학생, 주인. 어느 날 동네에 성범죄자가 출소해 돌아온다는 소식에 학교도 술렁인다. 출소 반대 서명 운동이 벌어지고, 전교에서 단 한 명만이 서명을 거부한다. 바로 주인이다.

* 영화 <세계의 주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친구들은 “성폭력에 동의하는 것이냐”, “그냥 사인 한번만 해주라”며 주인공을 회유하지만 주인은 완고하다. 주인은 서명 운동에 적힌 몇 개 문장을 빼거나 수정하면 동의하겠다고 한다.
- “성폭행은 한 인간의 삶을 망가뜨린다”
- “평생 씻지 못할 깊은 상처”
- “한 사람의 인생과 영혼을 파괴하는”
주인은 동의할 수 없었다. 자신이 주인인 삶이, 자신과 함께 힘든 싸움을 이어가는 또 다른 이들의 삶이 통째로 부정 당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주인은 친족 아동 성폭력 피해자였다.
‘피해자다움’은 무엇인가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는 일관적으로 지극히 평범한 청소년의 일상을 보여줬다. 성에 눈을 뜨고, 연애에 설레고,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는 그런 일상. 그러나 주인이 ‘성범죄 피해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관객은 당황했다. 그러나 주인은 여전히 결국 주인다운 발걸음으로, 제 삶이 말 그대로 ‘주인’인 인생을 살아간다. 종종 절망하겠지만 웬만하면 원래 자신의 성격대로 명랑하게, 자신의 세계를 살아간다.
하지만 ‘피해자다움’에 충족하지 않은 대가는 컸다. 막역했던 친구들은 주인에게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분명 조심했으면 좋았을 언행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넘치는 배려심은 때로 그 자체로 주인에게 상처가 됐다. 주인의 책상에는 “니가 무슨 피해자야”라는 익명의 쪽지가 들어 있기도 했다. 피해자답지 않음은 법정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영화에서 또 다른 성폭력 피해자 중 하나로 나오는 미도의 이야기다. 미도는 멋지고 쿨한 성격에, 어린 시절 태권도 유망주로 큰 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수상 이력은 불리한 근거가 된다. 성폭력 가해가 이뤄진 날 ‘멋지게’ 수상했기 때문이다. 가해자 측 변호사는 “그런 일을 겪고도 어떻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는지” 물으며 정상성을 공격한다. 미도가 아버지의 돈을 훔쳤던 사실, 용돈을 달라고 요구했던 사실을 이야기하며 사건의 논지를 흩트린다. 미도는 무너진다.
잠시 상상해보자. 누군가 100억 사기를 당했다. 속은 상했지만 저녁밥은 잘 먹었다. 그렇다고 해서 재판에서 “정말 피해자가 맞느냐”고 묻지 않는다. 저녁을 먹으며 웃었다고 해서 100억 사기가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성폭력 사건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그날 성폭력을 당하셨죠. 근데 왜 웃으면서 화장도 하고 회식에 가신 거예요? 왜요?”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
물론 두 사건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재산상의 피해와 달리, 성폭력은 개인이 입은 정신적·신체적 침해가 재판에서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성희롱의 경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성적 언동으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했는지가 인정 요건에 포함된다. 내가 얼마나 원치 않았는지, 얼마나 굴욕감과 수치감을 느꼈는지를 주장해야 하는 것에 판결의 핵심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해자가 영원히 ‘피해자’에 머무르는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될 것이다. 피해 사실 자체는 사건의 심각성을 판단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 판단의 핵심은 여전히 ‘그 관계가 동의에 기반했는가, 강제력이 있었는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가’라는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성범죄가 한 개인과 가정을 통째로 흔드는지 보여주되, 그것이 낙인으로 찍히는 게 아니라 그 세계는 언제든지 다시 채워질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를 단단히 붙들고 있다. <세계의 주인>은 바로 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관객의 불필요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디테일을 과감히 비워둔다.
디테일하지 않은 디테일에 대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질문하게 된다. ‘도대체 주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하지만 영화는 성폭력 사건의 구체적 묘사를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 디테일이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어떤 관계였어도, 피해자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어도, 가해자가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모든 디테일과 상관없이 단 중요한 사실은, 성범죄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누구라도, 지금 내 옆에서 웃고 있는 누군가라도, 나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만이 중요하다. 피해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정확히 진술하면서도 ‘영혼이 완전히 망가진’ 서사에 갇히지 않도록 회복하는 일만이 중요할 뿐,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우리의 모순된 이중잣대는 어디에도 낄 자리가 없다.

영화의 막바지에 달하며, 주인에게 전달됐던 익명의 쪽지의 발신인이 ‘사실은 나도 너 같은 피해자다’라고 고백한다. 쪽지를 읽는 목소리와 얼굴은 여자였다가, 남자였다가, 어린아이였다가, 성인이었다가 하며 빠르게 바뀌며 연출된다. 주인뿐 아니라 영화에 등장했던 또 다른 누군가도 주인과 같은 피해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누구였을까? 이 친구였을까? 저 친구였을까? 이것 역시 상상하게 되는 우리지만, 역시 끝까지 알 수 없다. 감독이 불필요한 오해와 상상을 불러일으킬 만한 디테일을 철저하게 제거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디테일에 중독되었을까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우리는 너무 많은 ‘디테일’에 노출되어 있다. 범죄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 내밀해서 혐오스러운 그 호기심에 다양한 매체가 충실히 보답한다. 오히려 부추긴다. 드라마와 영화뿐 아니라 심지어 뉴스에서도 성폭력 사건은 유난히 감정적이고 자극적으로 다뤄진다. 심지어 실제 사실을 가지고 더 큰 드라마를 만든다. 가해자가 ‘몹쓸 짓’을 했다고, 피해자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고 격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상상력을 부추긴다. XX녀, XX남과 같은 별명이 붙으며 유행어로 변질되기도 한다. 불필요한 자료 화면까지 만들어내며 사실 전달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편견을 자극한다.
* 주의, 편견을 강화하는 사진이 있습니다.

신정동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잡혔다는 뉴스다. 여성의 불안해하는 눈과 두려움에 떠는 손이 반복해서 재생된다. 좌측 상단에는 ‘AI 생성 영상’이라고 떠 있었다. AI 영상은 과연 어떤 프롬프트를 입력해서 만들어졌을까? AI는 범죄 피해자에 대해 어떤 학습을 기반으로 했기에, 움츠러든 무기력한 ‘완벽한’ 여성 피해자의 모습을 만들어 냈을까? 피해 상황에 대해 불필요한 상상을 자극하는 것은 범죄의 예방 및 처벌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공익적인 도움이 될까?

심지어 2차 가해를 한 판사를 비판하는 기사조차 불필요한 이미지를 첨부하여 2차 가해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화 <세계의 주인>에서처럼, 명랑하고 쾌활한, 사랑과 연애가 가장 궁금한, 태권도 대회에서 우승을 한 피해자들에 대해 눈을 뜨고 “너 피해 당한 것 맞아?”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처럼 보인다.
언론노조는 이미 2023년 「젠더 보도 가이드라인」을 통해 ‘몹쓸 짓’이라고 보도하는 것이 ‘몹쓸 짓’이라고 지적하며 미디어 생태계에서의 언어 표현에 대한 자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피해자의 피해가 분명하고, 가해자는 나쁜 사람이므로 이러한 이미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자주 반복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의 피해가 매우 크다는 생각은 성차별적 생각입니다. 피해의 트라우마는 당연히 피해자의 일생에 남을 것이지만 그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며, 극복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은 성적 순결을 중시하는 가부장제 관념에 따른 인식이기도 합니다.” 「젠더 보도 가이드라인」(2023)
성폭력 가해는 끔찍한 범죄다. 하지만 그것이 ‘성’폭력이어서가 아니라, 여느 사기, 사고, 협박, 폭행 등과 같이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무력 혹은 권력으로 짓밟고 ‘평범한 일상’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끔찍한 것이다.
영화 <세계의 주인>은 피해를 입은 개인과 사건 대신, 그 피해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더욱 디테일하게 살피자고 제안한다. 디테일하지 않은 디테일을 챙기면서. 더 많은 묘사가 아니라 더 적절한 언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