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없이 설 수 있다는 착각

‘자립’이라는 신화와 사회적 성원권

그림자 없이 설 수 있다는 착각
“혹시 그림자 얼마예요? 그림자 판매하실래요?”

당신이 지금 이 순간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대상을 떠올려보자. 원하는 곳으로의 취업, 내 집 마련, 막대한 부 혹은 사랑하는 가족의 건강. 그것을 얻는 대가로 당신의 발밑에 붙은 그림자를 돌돌 말아 넘겨달라는 상인이 나타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콩팥을 떼어가는 것도 아닌데’라며 잠시 혹할지도 모른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고전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주인공 페터 슐레밀처럼 말이다.

없어도 그만인 것 같은 그림자에 대하여

음식, 공기, 물과 다르게 그림자는 생존의 필수 조건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소설 속 슐레밀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금화가 무한히 쏟아지는 마법의 주머니를 얻는 대가로 자신의 그림자를 내어준다. 하지만 대가는 가혹했다.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연인조차 그를 거부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소한의 조건은 돈도, 외모도 아닌… 발밑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다소 의아할 수 있다. 그림자 없는 게 뭐 대수라고. 하지만 너무나 당연해서 눈치채지 못했던 그림자의 중요성은 충격적일 정도로 자명하다.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고 있든, 당신의 손끝 발끝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있을 것이다. 물리학적으로도 그림자 없는 실존은 불가능하다. 그림자는 직진하는 빛이 불투명한 물체를 만났을 때, 그 물체가 빛의 경로를 가로막아 발생하는 '부재의 영역'이다. 즉,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부피를 차지하고 서서 쏟아지는 빛과 에너지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는 가장 정직한 물성(物性)의 증거다. 그림자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과 같다. 질량과 부피를 잃고 세계의 인과관계 밖으로 밀려났음을 의미한다. 슐레밀은 그렇게 그림자를 판매함으로써 이 세계에 발붙인 존재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 

김현경 교수는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이 그림자를 성원권(Membership)의 은유라고 해석한다. 성원권이란 공동체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함께 살아가도 좋다’는 승인이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현실과 맞닿는다. 우리 사회에도 분명 존재하지만 마치 그림자가 없다는 듯이 취급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슐레밀이 오늘날 살아가고 있다면, 현대인에게 어떤 반응을 받을지 상상해보자. 아마 그림자를 직접 매도했다는 점에 “자기가 돈 벌려고 팔아놓고 이제 와서 피해자인 척하냐” 혹은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함?)’이라는 비정한 일갈이 뒤따를 것이다. 이러한 반응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을 찾아보면, 현대판 슐레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림자를 팔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서 그 첫 번째 사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침공에 외국 용병들을 적극 동원하고 있다. 2만여 명의 외국 용병들은 행정 업무만 할 것이라는 계약서를 믿고 러시아 땅을 밟았지만, 본국 여권이 불태워진 채 전쟁터로 내몰린다. ‘1년 계약’이라고 적혀 있던 조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기한 징집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관련 기사에는 어김없이 이런 댓글이 달린다. “어쨌든 돈 받고 선택한 거잖아요.” 슐레밀이 돈을 받고 그림자를 넘겼으니 그 설움을 응당 견뎌야 한다는 논리와 일치한다. 무고한 시민이 폭격을 받아 사망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비판은, 전쟁이라는 이념보다 ‘그림자를 판 개인’에게 향한다. 포로가 된 사람들은 그렇게 사라진다.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수백 명의 포로들은 우크라이나 감옥에 갇혀 세상에서 잊히고 있다. 그림자가 없는 존재처럼. 

우리나라 서울 한복판에도 비슷한 이들이 있다. 성판매 노동자들이다. 최근 미아리 텍사스 ‘집창촌’ 재개발 논란에서 그들의 비가시성은 더욱 극명하게 요구됐다. 성노동자들은 이미 수십 년간,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 국가의 비공식적 관리 아래 그 존재가 지워져왔다. 하지만 재개발 사업 과정에서 다시 한번 투명인간이 됐다. 건물주와 업주는 그들의 '그림자'를 인정받아 막대한 이익을 챙겼지만, 여성들은 불법 노동에 참여해왔다는 이유로 존재 자체가 무효화된 것이다. “그러게 누가 성노동 하라고 했냐”라는 말들은 그들이 딛고 서 있던 땅의 성착취 구조를 지워버린 채 개인의 선택만을 비난한다. 전쟁 대신 전쟁 포로를 손가락질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뒤늦게, 두 사례가 사실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 상황에 딱 맞는 사례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총을 손에 들고 불안한 걸음을 내딛는, 용병의 발끝에 그림자가 없었을까? 포주의 부름을 듣고 닭장같이 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성판매 노동자의 손끝에 그림자가 없었을까? 그들은 분명히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림자는 애초에 거래가 가능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타인의 그림자를 돌돌 말아 주머니에 쏙 넣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소한의 조건은 매매될 수 없다. 외국 용병이나 성노동자가 판매한 것은 그들의 노동력일 뿐, 그림자를 판 적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그림자를 보지 못한 척하며 성원권을 박탈하는 이유는? 

(또 하나의 차이점을 짚자면, 슐레밀은 그림자를 판 대가로 무한한 돈주머니라도 얻었지, 현실의 사례들은 위험한 환경에서 일한 것에 대한 정당한 값조차 지불받지 못했다.) 

자립이라는 특권적 망각

우리가 그들을 그림자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이유는, 발밑의 그림자가 너무도 당연하다고 믿는 특권적 망각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성원권 안에서, 즉 그림자가 우리를 지탱하고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데도 이를 오롯이 자신의 ‘자립’이라 착각한다. 사실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망각해도 좋을 만큼의 특권’일 뿐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망각 안에서 자발적 선택이라는 프레임은 개인의 성원권을 박탈하는 무기로 작동한다. 홈리스, 이주민 노동자, 난민을 향해 “왜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느냐”고 묻는 것은 자신 발밑 그림자의 역할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서 기인한다. 

샤미소가 이 소설을 썼던 1814년, 그림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성의 마지막 경계’였다. 200년이 넘게 지난 지금은 그 경계는 더욱 흐려졌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더 자주 착각한다. 

흔히 ‘혐오’하는 대상이 그림자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존재가 흐릿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비추는 사회의 조명이 고장 났거나 바닥이 무너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자는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에 빛이 비추어질 때 드러나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단단한 땅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의지가 강해서만이 아니라, 당신이 인식하지 못한 동안에도 사회적 성원권이라는 그림자가 당신의 발을 떠받치고 있는 덕분이다. 지금 당신의 발밑을 내려다보라.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당신의 그림자는 안녕할 것이다. 전쟁터로 향해야 했던 이들의 발끝에도, 성판매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믿었던 여성의 손끝에도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2024, 열림원
  •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2015, 문학과지성사
  • BBC, 나왈 알-마가피, 2026. 01. 14., "우리는 속았다"... 외국인 청년들을 러시아 최전선으로 유인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
  • SBS, 권지윤, 2018. 4. 3., 성매매 리포트 ⑤ "포주는 정부였다"… 수요 차단에 집중 '노르딕 모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