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은 왜 개인의 몫으로 남겨졌는가

의존의 의미를 다시 묻는 연극 3편

연극 <비Bea>, 이미지 출처: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의존은 흔히 개인의 문제로 여겨집니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 타인에게 짐이 되는 모습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독립적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애 아동, 중증 환자, 치매 노인 등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애, 질병, 노화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돌봄은 대부분 가족의 몫으로 남겨지고 맙니다.

연극은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솔직하게, 가장 가까이에서 그 고통을 보여줍니다. 2024년부터 2025년까지, 돌보는 사람과 돌봄 받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연극 <비Bea>, <더 파더>, <킬 미 나우>가 연이어 무대에 올랐습니다. 어쩌면 이 세 작품이 거듭 무대에 오른 이유는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장면을 다시 바라보게 하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돌보고, 그 돌봄은 자연스럽게 가족의 몫이 되는 장면 말입니다.


연극 <비(Bea)>

누구의 행복을 위한 돌봄인가

연극 <비Bea>, 이미지 출처: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극은 주인공 비가 음악에 맞춰 침대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 모습은 비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고, 현실의 비는 침대에 누워 꼼짝할 수 없습니다. 만성 체력 저하증을 앓고 있거든요. 온힘을 다해 웅얼거리는 것이 비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세상은 네모난 침대가 전부가 되어버렸죠. 그것을 보여주듯, 비는 극이 진행되는 내내 침대 위에서만 머뭅니다. 무대는 그의 내면과 현실을 교차하면서 비의 움직이지 못하는 삶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딸을 포기할 수 없는 엄마 캐서린은 8년째 간병을 이어갑니다. ​비는 간병인 레이의 도움을 받아 엄마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제 자유로워지고 싶어요."라고요. 레이는 두 모녀의 일상을 도우면서, 생을 마치고 싶다는 비의 바람과 비와 함께했기에 행복했던 캐서린의 기억을 서로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극의 마지막에서 비는 끝내 자신의 바람을 이루고, 처음으로 침대를 벗어나 무대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연극 <비Bea> 하이라이트 영상(2016)

연극 <비Bea>는 영국의 극작가 겸 연출가 믹 고든(Mick Gordon)의 대표작입니다. 2010년 런던 소호 극장에서 초연을 올린 이후 캐나다, 그리스에서 화제를 모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2016년 아시아 초연으로 공연된 이후, 2019년 재연, 2024년에 삼연으로 꾸준히 관객을 찾았습니다. 2024년 공연에서는 프로듀서 석재원과 연출 이준우가 작품을 이끌고, 이지혜·김주연이 비 역으로, 강기둥·김세환이 레이 역으로, 방은진·강명주가 캐서린 역으로 분했습니다.

<비Bea>는 존엄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동시에 돌봄 받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비가 원한 것은 단순히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권이었습니다. 우리는 의존하는 사람들을 돌보면서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까요?

연극 <비Bea> 공연 정보

2024년 2월17일~2024년 3월 24일 LG아트센터 U+ 스테이지

LG아트센터 서울 > 연극 <비Bea>
예술가들과 관객들 모두에게 놀라운 영감을 주는 공연장, LG아트센터 서울

연극 <비Bea> 극본집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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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더 파더>

혼란 속에서 작아지는 한 노인의 초상

연극 <더 파더>, 이미지 출처: 스튜디오 반

연극 <더 파더>는 치매를 앓는 80세 노인 앙드레가 기억의 혼란을 겪으며 정체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딸 안느는 아버지의 간병인을 구하는 문제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앙드레는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딸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극은 앙드레의 시선을 따라 진행됩니다. 안느가 연인 피에르와 함께 영국을 떠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니, 떠나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30년을 넘게 살아온 집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당연히 있어야 할 물건들이 사라졌습니다.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던 남자도 온데간데없습니다. 그런데 안느는 애초에 아무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어쩐지 안느가 내 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앙드레의 기억력과 분별력이 점차 떨어지면서 꼿꼿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사라지고, 한없이 작아진 한 노인만이 남습니다. 관객은 앙드레의 혼란을 함께 겪습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파악하기 어렵죠.

연극 <더 파더> 하이라이트 영상(2023)

<더 파더>는 프랑스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Florian Zeller)의 작품입니다. 2012년 초연 이후 몰리에르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으며 프랑스는 물론 런던과 뉴욕 무대까지 사로잡았습니다. 국내에서는 2016년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국립극단이 첫선을 보였습니다. 이후 공연예술 창작집단 스튜디오 반이 2023년과 2024년 <더 파더>로 무대에 올렸는데, 실제 부녀 사이인 전무송과 전현아가 앙드레와 안느로 호흡을 맞추며 몰입감을 한층 높였습니다.

<더 파더>는 치매 환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의 혼란과 두려움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이 작품은 '이해한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연극 <더 파더> 공연 정보

2024.11.15~2024.12.8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연극 〈더 파더〉

영화 <더 파더> 영화 정보

더 파더 (2020) ⭐ 8.2 | Drama, Mystery
1h 37m | 12

연극 <킬 미 나우>

돌봄의 주체와 대상이 바뀌는 순간

연극 <킬 미 나우>, 이미지 출처: 연극열전

17살 소년 조이는 선천적으로 지체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조이의 곁에는 늘 아버지 제이크가 함께합니다. 조이는 아버지와 함께라면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제이크에게 조이는 어린아이 같기만 한데, 조이는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다” 말하며 독립을 원합니다. 사실 제이크는 촉망받는 작가입니다. 그러나, 작가의 삶을 포기하고 오직 아들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연극 포스터에 적힌 ​"나한텐 심각한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어. 나한테 '나'는 없어."라는 문장은 제이크의 삶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극이 중반에 이르자 제이크는 갑작스럽게 병을 얻습니다. 이때부터 둘의 관계는 역전됩니다. 돌봄의 대상과 주체가 바뀌는 것이죠. 이제 제이크는 돌봄을 필요로 하는 처지가 되고, 조이는 아버지의 병과 죽음 앞에서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이 과정은 의존이 특정한 사람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병세가 악화한 제이크는 고통스러워하며 "나를 죽여 줘(킬 미 나우)"라고 말하고, 조이는 아버지의 바람을 돕습니다.

연극 <킬 미 나우> 하이라이트 영상(2025)

<킬 미 나우>는 캐나다의 극작가 브래드 프레이저(Brad Fraser)가 2013년 발표한 작품입니다. 2016년 국내 초연 이후 지난해 네 번째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오경택이 연출을 맡고, 이석준·배수빈(제이크 역), 최석진·김시유·이석준(조이 역)이 출연해 깊은 울림을 전했습니다.

<킬 미 나우>는 돌봄의 방향이 언제든 뒤바뀔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돌보던 사람이 돌봄을 받게 되는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의존은 특정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우리 모두가 맞닥뜨릴 수 있는 삶의 조건이라는 사실을요.

연극 <킬 미 나우> 공연 정보

2025년 6월 6~2025.8.17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중구문화재단 > 연극 <킬 미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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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킬 미 나우> 공연 정보

My Son (2022) ⭐ 4.5 | Drama
1h 59m | 15

우리는 객석에서, 의존하는 이들과 그들을 돌보며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고통을 목격합니다. 이 장면들은 불편합니다. 그러나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무대 위의 허구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남에게 기대고 살 거야?"라는 질문은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왜 돌봄은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졌는가?"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