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기술이 잊어버린 것에 대하여
진정한 발전을 위하여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하는 시대, 편리함이 크게 향상되는 것과 동시에 기술의 부정적인 파급력도 언제나 우리의 걱정거리가 되곤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도 듭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나타나는 문제들이 과연 과학기술에 의해 새롭게 생겨난 것일까요? 우리는 과학에 의해 탄생한 기술을 표백된 상태로 인지하기 쉽습니다.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중립적인 진리와 지식으로부터 탄생했다고 착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소개해 드리는 작품들은 과학 역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한 권력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방향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달려 나가기만 한다면 제대로 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날 첨단 기술이 잊은 것은 무엇일까요? 달리 말해, 우리가 첨단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무작정 달려 나가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고 점검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요? 기술을 만드는 것도 사용하는 것도 인간이라면 우리는 인간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문제들을 먼저 살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다큐멘터리 <로봇이 아닙니다>는 이 문제를 아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철학서 『포스트휴먼』은 그러한 문제의 기저에 있는 권력과 주체성의 문제를 탐구합니다. 그리고 소설 『천 개의 파랑』은 ‘포스트휴먼’의 시대에 기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질문합니다. 세 작품을 통해 우리가 바로 지금 무엇을 숙고해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어쩌면 문제는, <로봇이 아닙니다>
웹사이트에 로그인할 때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는 일은 이제 인터넷을 활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경험입니다. 그런데 혹시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이미지 퍼즐에 유달리 신호등, 자동차, 오토바이 등의 제시어가 많이 나오지 않았나요? 이는 구글이 인수한 보안인증 회사 ‘리캡차(reCAPTCHA)’가 사용자가 입력한 데이터를 수집해 자율주행 자동차의 인공지능 학습에 활용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예솔 감독의 다큐멘터리 <로봇이 아닙니다>는 우리가 사람임을 증명할 때 마주치게 되는 익숙한 문구를 제목으로 사용합니다. 다큐멘터리에는 이렇게 전 세계 사람들의 눈을 자신의 눈으로 삼아 하나의 ‘절대눈’이 되어 가는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자동차로 인해 발생한 사고를 시뮬레이션하는 전문가의 이야기가 교차해 나옵니다.

28분 남짓한 짧은 러닝타임의 후반부에 우리는 한 가지 섬뜩한 결말을 마주하게 되는데요. 시뮬레이션 전문가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낸 사고가 알고리즘의 ‘오류’ 때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알고리즘이 아주 합리적인 선택에 따라 사람을 치었다는 것인데요. 길가에는 20대 백인 남성과 10대 유색인종 여성이 서 있었습니다. 인공지능이 판단하기로 20대 백인 남성인 ‘인간’일 가능성이 90%, 10대 유색인종 여성은 ‘인간’일 가능성이 50%에 가깝게 나왔기 때문에 '인간일 가능성이 적은' 사람을 들이받은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는 아직 정교하지 못한 인공지능 시스템으로 인한 사고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문이 들지 않나요? 어째서 인공지능은 인종이나 성별이나 나이가 다르다고 해서 그가 인간일 가능성을 낮게 혹은 높게 측정한 것일까요? 인공지능 시스템이 결국은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 학습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더 섬뜩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포스트휴먼』
<로봇이 아닙니다>의 예시는 ‘휴머니즘’에 대한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의 비판을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브라이도티는 『포스트휴먼』의 서문과 1장에서 근현대 휴머니즘의 인간이 얼마나 제한적인 개념인지를 강조합니다. 이 ‘인간’은 유럽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이며 규범적인 틀 안에 갇힌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인간이 우리가 굳게 믿어 온 과학기술에서의 ‘인간’이라고 지적합니다. 브라이도티의 이러한 비판이 유효하다면, <로봇이 아닙니다>에 등장한 인공지능의 ‘합리적인 판단’이 설명됩니다. 과학기술이 제한적인 이미지의 인간 개념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면, 그 기술이 실생활에 적용되었을 때는 위와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기술에 의해 인간이 억울하게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 ‘인간’의 정의를 잘 조정하면 되는 것일까요? 브라이도티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고도로 기술이 발전된 이 사회는 ‘인간’이라는 종 사이의 불평등을 해소한다고 해서 충분히 윤리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술을 매개로 인간이 자연, 동식물, 그리고 기계 장치에 너무나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브라이도티는 ‘인간 너머의 인간’을 상상하고,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주체성을 탐색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것이 바로 책의 제목 ‘포스트휴먼’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인간 이후의 인간’ 혹은 ‘탈-인간’을 의미하는 ‘포스트휴먼(posthuman)’은 인간종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새롭게 정의되는 인간 공동체입니다.
사실 ‘포스트휴먼’이라는 용어는 기술에 의한 인간 신체의 향상을 지향하는 ‘트랜스휴머니즘’부터 브라이도티처럼 인간종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까지 넓은 영역에서 두루 쓰이는 용어입니다. 어떤 입장의 포스트휴먼에 더 친숙하든, 이러한 주장들의 등장으로 우리가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더 이상은 과거의 방식으로 인간을 정의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인간과 인간이 발전시킨 기술이 세상을 재정의하고 재조립하는 시대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시대에 우리가 더 인간다운 인간, 혹은 브라이도티가 주장하는 ‘인간 너머의 인간’에 닿을 수 있으려면 어떤 설계가 필요한 걸까요? 다음 작품에서 더 이야기해 보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작가의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은 휴머노이드 로봇이 상용화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폐기처분된 기수로봇, 다리를 다친 경주마,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지금보다 발전된 과학기술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하지만, 이 글에서는 특히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체장애인 ‘은혜’의 이야기를 자세히 언급하고 싶습니다.

은혜는 소아마비로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소설 속에선 신체 적합성 의족이 개발되어 상용화되어 있지만, 은혜는 값비싼 의족 대신 휠체어를 타고 일상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과학기술이 발전한 시대에도 휠체어 위에서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능하지 못하는 신체를 기계장치로 대체하기 때문에 계단을 대신하는 경사로나 폭넓은 진입로, 리프트 등의 설치는 뒷전으로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발전하여 ‘다치고 아픈 몸’을 소위 ‘정상적인 몸’으로 돌려놓을 수 있게 되면 정상성에서 벗어난 몸이 다시금 비가시적인 바깥 영역으로 밀려나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소설 속 경마장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수 로봇의 개발로 경주마들의 빠른 질주가 가능해지자 다시금 경마에 많은 자본이 몰리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주로에서 뛰는 말들은 관절이 부서지도록 혹사당하고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 안락사당하기 일쑤입니다.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모두가 더 잘 살기 위함인데, 어째서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렇게 다시 바깥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생겨나는 걸까요? 소설 속의 가정일 뿐이지만, 우리가 제대로 된 발전의 방향을 끊임없이 점검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입니다.
소설 속 한 인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미 이 행성은 인간 중심의 행성이 됐잖아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세상 밖으로 나가면 어느 동물도 살아남지 못해요. […]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을 고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다시 프로그래밍을 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이 사회가(p. 157).” 『포스트휴먼』에서 브라이도티가 지적한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입니다. 우리의 기술로 말미암아 지구는 이미 우리가 ‘인간’이라고 정의한 이들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인간’에 은혜와 같은 이들은 제대로 속해 있을까요? 우리가 이토록 인간을 중심으로 이 행성을 바꾸어 놓았다면, 우리는 지구를 함께 사용하는 다른 생명체들에 대해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요?
『천 개의 파랑』은 서로 다른 이유로 고통을 겪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숙고하게 만듭니다. 인공지능의 판단은 정말 합리적인지, 기술로 정말 향상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이죠.
이렇게 기술의 발전 속에서 우리가 놓치는 것은 없는지 숙고할 수 있게 도와줄 세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세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사실 기술 분야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기술의 발전으로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에서 드러나는 여러 문제는 우리 사회에 언제나 숨어 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만큼 이러한 문제들도 다양한 형태로 증폭될 수 있다는 것이 현대 사회의 진정한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과 그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느낌을 받곤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성찰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성찰할 수 있을까요? 이제 와서 기술의 발전이 여러 새로운 문제를 가져온다는 걸 안다고 해도 그걸 멈추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막연한 낙관이나 공포가 아니라, 기술이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적용되고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논의일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이들이 기술로 말미암아 더욱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는 언제나 생각하고 질문하는 일을 멈추어선 안 될 것입니다.
리캡차, 당신이 모르는 사이 AI 성능 향상에 일조 < 일반 < 컴퓨팅·AI < 기사본문 - IT조선
노대원(2018), 포스트휴머니즘 비평과 SF: 미래 인간을 위한 문학과 비평 이론의 모색, 비평문학(68), 110-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