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들, 책을 예술로 만든 출판사
책은 하나의 예술 오브제이다.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전시회를 찾아가 완성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입니다. 또는 예술 작품을 직접 구매해 소장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음악, 연극, 무용과 같은 이른바 ‘시간 예술’은 예술가와 관객이 한 공간에서 시간을 공유하며 함께 예술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들이 늘 우리가 주체적으로 예술을 소비하는 행위인 것만은 아닙니다. 전시나 공연을 관람하는 일 자체는 주체적인 선택일 수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시 일정이나 공연 스케줄에 종속됩니다. 보고 싶었던 전시를 놓치거나, 기대했던 공연이 매진되어 아예 관람할 수 없는 일도 다반사이지요. 그에 비해, 우리가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 중 가장 손쉬운 일은 어쩌면 아트북을 펼쳐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또는 녹화된 공연을 영상으로 감상하거나, 녹음된 음악을 스피커로 듣는 일 말입니다.
이 글에서 소개할 슈타이들(Steidl) 출판사는 전 세계적으로 아트북과 포토북의 기준으로 손꼽히는 독일의 출판사입니다. 이들은 예술을 다룬 책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책 그 자체’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바라보고 만들어냅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특별한 책의 세계, 슈타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게르하르트 슈타이들(Gerhard Steidl)
게르하르트 슈타이들은 1968년, 독일 괴팅엔에서 실크스크린 워크숍을 시작하며 본인의 이름을 건 출판사를 설립했습니다. 흰 작업복에 가슴 주머니엔 Staedtler 펜을 줄지어 꽂은 그의 모습은, 스티브 잡스의 검은 터틀넥과 리바이스 청바지, 뉴발란스 운동화처럼, 그만의 한결같은 시그니처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그의 아날로그적 감성과 장인 정신, 그리고 완벽주의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슈타이들은 오늘날까지도 기획, 출판, 인쇄, 제본의 전 과정을 스스로 관리합니다. 심지어 종이 한 장, 한 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만큼 꼼꼼한 그는, 전 세계 출판인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는 ‘살아있는 출판계의 전설’입니다.
그는 언제나 비용보다 품질과 장인 정신을 우선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합리적인 가격에 대중 출판을 추구하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조화롭게 아우릅니다. 매년 약 300여 종의 아트북을 직접 생산하며, 예술가들의 고유한 시선을 책이라는 예술의 형태로 대중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진짜 장인답게, 그의 삶은 곧 책입니다. 일과 생활, 공간과 시간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녹아 있습니다. 슈타이들의 일상은 곧 작업이고, 작업은 곧 예술입니다. 그는 여전히 새로운 종이와 잉크를 실험하며,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는 출판인입니다.


steidl.de
슈타이들의 책들
슈타이들 출판사는 1994년부터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조엘 스턴펠드(Joel Sternfeld) 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사진가들의 작품집을 출판해 왔습니다. 슈타이들은 ‘인간 중심의 출판 철학’을 지향하며 예술가들과 밀착하여 협업하는 방식을 고수해왔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출판 전에 독일 괴팅엔에 위치한 출판사를 직접 찾아와 머물며, 편집 과정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아트북으로는 짐 다인(Jim Dine)과의 협업으로 제작된 『Hot Dream』이 있습니다. 이 책은 짐 다인의 판화 스타일을 살린 입체적인 아트북으로, 주마다 한 권씩 제작되는 방식으로 아날로그적 감성을 강조합니다. 예술적이면서도 일상적인 현실의 깊이를 담아낸 이 52권의 책은, 예술적 자각의 기록이자 강렬한 아트북 자서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버트 프랭크의 『The Americans』 작품집은 오리지널 사진의 색감과 톤, 구성까지 고스란히 유지하며 이미지 재현의 충실성에 집중한 걸작입니다. 이는 “작가의 비전을 책이라는 형태로 최적으로 구현한다”는 슈타이들의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슈타이들 출판사는 아트북뿐만 아니라 문학 서적도 폭넓게 다룹니다. 1993년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의 전 세계 판권을 확보하면서, 문학 출판 분야에서도 확고한 위상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슈타이들과 칼 라거펠트
슈타이들과 칼 라거펠트의 협업은 현대 출판 예술의 아이콘이라 할 만큼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1993년, 라거펠트는 샤넬의 모노그래프 인쇄를 슈타이들에게 의뢰하게 되는데, 이는 기존 책들의 품질에 깊이 실망한 라거펠트가 인쇄 품질 개선을 요청하며 시작된 인연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닮은 점이 많았습니다. 완벽주의적인 성향, 품질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철학, 그리고 삶과 일의 경계가 따로 없는 태도까지. 라거펠트는 슈타이들을 “세계 최고의 프린터”라 부르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2010년부터는 라거펠트가 슈타이들의 임프린트 L.S.D. (Lagerfeld Steidl Druck)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문학·사진·예술 서적을 직접 기획하고 편집하는 등 더욱 긴밀한 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슈타이들은 그와의 협업을 “매일매일이 영감을 주는 시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사진가들의 작품은 말 그대로 인쇄된 결과물입니다. 어느 인쇄소에서 인쇄되었는지에 따라 작품의 색감, 톤, 질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는 때로 사진가가 의도한 것과 다른 작품이 탄생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슈타이들 출판사는 예술가의 의도를 깊이 존중하며, 스스로 하나의 예술가가 되어 책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단순히 작품을 담는 정보 제공의 역할을 넘어, 책의 물성, 내용, 형식, 편집, 재료, 인쇄 방식, 그리고 독자가 체험하는 모든 과정이 예술적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책이라는 예술 언어는 그 물성과 구조 자체가 하나의 예술 오브제로서 독자로 하여금 예술을 경험하게 합니다.
저는 독일에서 사진을 공부하면서 수많은 슈타이들 출판사의 작품집을 접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을 뿐 아니라, 그들의 숨결이 담긴 작품을 책으로 감상할 수 있음에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사진을 공부한 경험으로 사진을 책으로 담아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구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지 잘 알기에, 슈타이들 출판사의 존재가 더욱 가슴 깊이 와 닿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열린 슈타이들 북 컬처 전시를 다녀오며, 제가 독일에서 얼마나 좋은 환경 속에서 예술을 배울 수 있었는지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슈타이들에서 출판한 책으로 그 예술을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