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언 마음을 녹여줄 영화
여름의 열기를 가득 담은 성장 서사를 원한다면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겨울용 외투와 털모자, 목도리와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겨울입니다. 겨울바람이 얼굴을 강타할 생각에, 이불을 걷어내고 하루를 시작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만 하죠.
그런 겨울에 전기장판을 틀거나 따뜻한 물에 반신욕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하게 녹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지나온 여름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울창한 나무, 시끄러운 매미의 울음소리, 뜨거운 태양빛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몸도 마음도 그때의 열기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답니다.
이렇게 지난 여름을 떠올릴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만약 쉽게 떠오르지 않거나 상상하는 것만으로 여름을 느끼기 어려우시다면 실망하지 마세요. 그런 분들에게 추천해드릴 수 있는 여름 영화 세 편이 여기 있거든요. 여름을 진득하게 담아낸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마치 그 영화의 계절 속 한복판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드실 거예요.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우는 어린이들, <여름정원> (1994)

영화 <여름정원>은 1994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90년대 일본의 여름을 착실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세 소년은 곧 죽을지도 모를 만큼 나이를 많이 먹은 동네의 할아버지를 몰래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할아버지가 죽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기 때문인데요, 그러다 존재를 들켜버린 세 소년은 조금씩 할아버지와 가까워지게 됩니다. 세 소년과 할아버지가 함께 정원에 자라난 잡초를 뽑고 망가진 집을 보수하고 과일을 나눠 먹는 여름의 장면들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지난 여름방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영화가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시선으로 죽음을 보여주기 때문인데요. 영화가 끝나고 세 소년이 할아버지와의 여름을 후에 어떻게 기억할까 혼자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주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너무 어렸기도 했고 바쁘게 살다 보면 더 중요한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우리만 해도 그렇지 않나요. 하지만 이 여름의 감각은 소년들의 마음속 어딘가에 분명 새겨져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뜨거운 여름 속에서 어린 세 소년도 나이 많은 할아버지도 각자만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우리는 뜨겁게 데워지고 또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자꾸 포기하게 되면 언젠가 우리 마음의 집도 잡초로 무성해지지 않을까요?
중요한 건 심부름이 아니었다, <콩나물> (2013)

최근 <세계의 주인>이라는 영화로 다시 한번 이름을 알린 감독, 윤가은의 2013년 작품 <콩나물> 또한 여름을 다루고 있는 영화입니다. 러닝타임 20분의 짧은 영화지만 다 보고 나면 그 작고 견고한 세계에서 어쩐지 오래도록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데요.
할아버지의 기일에 제사음식을 준비하던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생전 좋아하셨던 콩나물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집안에서 가장 막내인 꼬마 보리에게 콩나물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킵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보리가 콩나물을 사러 슈퍼까지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아주 소소하지만 사랑스러운 여행기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짧으면서도 긴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보리는 결국 ‘콩나물 사오기’라는 미션 수행에는 실패했지만, 그 과정을 함께 따라갔던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콩나물은 없어도 괜찮다는 것을요. 계단을 오르내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닮은 의문의 할아버지와 만나는 동안 보리는 계속해서 자신 앞에 놓인 커다란 문을 힘차게 열었으니까요.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뿌듯함을 느끼던 나날들은 이제 우리에게서 너무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점점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보다 하지 못했다, 부족했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는 애처로운 어른이 되어가죠. 하지만 콩나물 사오기를 실패했다고 해서 보리의 심부름길이 무의미해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나날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때로는 조급히 발걸음을 옮기기보다는 조금 천천히, 보리처럼 다른 길로 새어주기도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요?
무언가를 뜨겁게 사랑해 본 적 있나요, <스윙걸즈> (2006)

사실 이 영화는 완전히 여름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름으로 시작해서 겨울로 끝나는 영화이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상하게 여름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2006년에 개봉한 영화 <스윙걸즈>는 보충수업을 받던 소녀들이 브라스 밴드가 두고 간 도시락을 대신 전달해주며 시작됩니다. 예상치 못한 일들 때문에 배달 시간이 길어지고, 결국 한여름의 날씨를 이겨내지 못한 도시락은 상한 채로 브라스 밴드에게 배달되고 맙니다. 그 도시락을 먹은 밴드의 단원들이 전부 식중독에 걸리자 소녀들이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모이게 됩니다. 그렇게 음악과 전혀 조예가 깊지 않던 소녀들이 스윙 재즈 밴드로 모여 하나의 무대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여름은 무르익어 가을이 되고, 가을은 거두어져 겨울이 됩니다.

소녀들이 하나의 무대를 완성해낸 겨울의 장면보다 처음 음악을 접하고 깔깔대던 여름의 장면이 더 오래 마음속에 남는 것은,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는 그 마음이 그토록 강렬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영화를 보면서 나도 이렇게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해 본 적이 있나, 하고 되짚어보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영화 속 소녀들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살아가기 위해서 사랑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이 팍팍한 세상 속에 사는 우리를 살게 하는 거죠. 하지만 사랑은, 아무리 그것을 원해도 쉽게 찾아오지 않잖아요. 반면 그렇기에 더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흔하지 않은 일인 만큼 그런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찾아왔을 때, 두 팔 벌려 환영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름이 아름다운 이유는 ‘자라나고 싶은 열망’으로 세상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지금과는 다른 자리를 꿈꾸게 되는 그 마음. 찬 바람이 쌩쌩 불고 입에서 허연 입김이 나올 때쯤이면 종종 지나간 마음들을 떠올리며 그 마음이 내게 다시 생긴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되기도 하는데요. 지나간 여름을 그리워하기보다는 또 다가올 새로운 여름을 생각하며 이번 추위를 견뎌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름 영화들과 함께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