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진 일상을 깨우는 아름다움, 도심의 티하우스 5곳
타인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고유한 나를 만나고 싶을 때
지난 해를 이어 사람들의 손과 입을 온통 초록색으로 물들인 ‘말차 코어(Matcha Core)’를 들어보셨나요? 이 현상을 단순히 유행으로만 치부하기엔 차(Tea)가 우리 삶에 스며드는 방식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갈증을 해소하는 음료를 넘어, 찻잎을 우려내는 지난한 과정을 즐기고 취향에 맞는 다기를 수집하는 ‘라이프스타일’ 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확장은 400년 전, 다성(茶聖) 센노 리큐(Sen no Rikyu)가 정립한 다도(茶道)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다도란 차를 마시는 행위뿐 아니라 차가 놓인 공간, 그 안의 기물, 차를 나누는 주인과 손님의 마음까지 아우르는 ‘종합 예술’과도 같거든요. 찻잎이 우러나는 물소리는 음악이 되고, 다기의 질감은 조각이 되며, 공간을 채우는 향기와 혀끝에 닿는 맛은 무뎌진 감각을 다시 깨웁니다. 차는 오감을 통해 우리를 '비루한 현실(sordid facts)'에서 잠시 건져내 ' 아름다움'의 세계로 데려다주죠.
"Teaism is a cult founded on the adoration of the beautiful among the sordid facts of everyday existence." ("다도(茶道)는 일상의 비루한 현실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의식이다") 오카쿠라 카쿠조(Okakura Kakuzo), 『차의 책(The Book of Tea)』
일본의 미학가 오카쿠라 카쿠조의 말처럼 다도는 스쳐 지나가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요. 차를 마시며 사람들은 여유를 갖고 자신에 대해 돌아볼 시간을 가질 기회를 갖게 됩니다. 일상을 긍정하는 힘으로 차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따뜻하게 유지되어올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정성스럽게 우려낸 차 한 잔을 대접받으며, 나와 주변을 존중하는 법을 일깨우는 서울 도심의 차 공간 5곳을 소개합니다.
1. 마포구 망원동, 티노마드 (Tea Nomad)
위치 : 서울 마포구 포은로 112 2층
추천 메뉴 : 차세트(말차, 호지차 등)*차와 함께 화과자, 다구 플레이팅을 함께 경험할 수 있습니다. / 말차빙수

"아름다움은 물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가 만들어내는 그늘의 무늬, 명암 속에 있다."
일본의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산문집 『음예예찬』에서 동양의 미(美)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망원동의 '티노마드'는 이 문장을 공간으로 구현한 듯해요. 나무의 온기로 채워진 실내에는 얇은 발과 창을 통해 부드럽게 걸러진 빛만이 스며듭니다. 어둑한 공간에 들어서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추게 됩니다. 이곳의 암묵적인 약속인 '서로의 고요를 방해하지 않는 것'은 타인을 위한 배려이자, 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기 위한 장치가 되어줍니다. 중앙 테이블의 탕관(물 끓이는 주전자)에서 직접 뜨거운 물을 길어오는 불편함조차, 이곳에서는 정적을 깨지 않으려는 하나의 우아한 수행이 됩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쥐고 있노라면, 비로소 가려져 있던 마음의 윤곽을 마주하게 될 수 있을 거예요.
2.용산구 한남동, 산수화티하우스
위치 : 서울 용산구 한남대로20길 21-14
추천 메뉴 : 백서향, 자닮녹차 *기호에 맞춰 추천을 받아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액체를 넘기는 것이 아닙니다. 차를 담는 그릇, 찻자리 주변에 놓인 꽃 한 송이,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우는 마음까지 아우르는 '종합 문화'를 향유하는 일입니다. 한남동의 '산수화 티하우스'는 차를 파는 상점을 넘어, 차를 매개로 삶을 깊이 있게 사유하는 '인문학적 공간'을 지향합니다. 계절에 맞는 찻자리를 여는 차회(茶會)부터 인문학 수업, 다구와 연계된 공예인 킨츠기와 바느질 클래스까지, 차 문화를 매개로 사물에 깃든 세월과 정성을 읽어내는 법을 제안합니다.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이어 붙여 새로운 예술로 승화시키는 킨츠기처럼, 완벽하지 않은 것들의 가치를 발견하는 과정은 우리 삶의 태도와도 닮아 있습니다. 투박한 다기의 물성을 손끝으로 느끼며,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순간을 경험해 보세요. 차를 즐긴다는 건, 차를 둘러싼 모든 사물과 시간,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을 깊이 있게 어루만지는 일이니까요.
3. 성동구 성수동, OMOT 오므오트
위치 : 서울 성동구 서울숲2길 12 지하1층
추천 메뉴 : 티세레모니(예약제 티코스)

아무리 바쁜 일상 탓이라지만, 요즘은 계절의 보폭 자체가 예전보다 빨라진 것만 같아 아쉬움이 남곤 하죠. 시간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호흡해보고 싶다면 차를 통해 계절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성수동의 '오므오트'로 향해보세요. 이곳의 '티 세레모니(Tea Ceremony)'는 매년 하나의 큰 주제를 정하고 계절에 맞는 새로운 이야기로 코스를 펼쳐냅니다. 한국 차를 베이스로 한 5가지의 티와 다과 페어링은 마치 기승전결이 있는 한 편의 소설처럼 이어지죠. 국내 작가들이 빚어낸 감각적인 티웨어에 담겨 나오는 차는 시각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을 현대적인 식문화로 재해석하려는 철학도 대변한답니다. 빠르게 휘발되는 일상 속에서 추억할 만한 순간을 기록하고 전하려는 이들의 방식은 우리에게 '시간을 소유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이곳에서 계절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지금의 가치를 찾아보기를 추천합니다.
4. 강동구 고덕동, 카페제이 (Cafe J)
위치 : 서울 강동구 동남로82길 19
추천 메뉴 : 교토아이스맛차, 교토박스, 말차소다.

다도(茶道)라고 하면 엄숙하고 어려운 격식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본래 차는 '일상다반사'라는 말처럼,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지극히 평범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카페제이'는 교토와 서울을 오가며 이 소박한 진리를 가장 트렌디한 방식으로 실천하는 공간이에요. 이곳은 예약이라는 높은 문턱을 없애고, 누구나 언제든 들러 즐길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맛의 깊이는 결코 가볍지 않아요. 교토 현지에서 직접 공수한 질 좋은 말차를 사용하되,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경쾌하기 그지없답니다. 톡 쏘는 탄산 토닉에 말차를 더한 '말차 소다' 같은 위트 있는 메뉴부터, 고요히 음미할 때 진가가 발휘되는 녹차까지. 카페제이는 낯선 다도의 세계를 가장 친숙한 언어로 번역해 우리 앞에 놓아둡니다. 특별한 날의 기념이 아닌 매일의 위로가 필요할 때,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해 보시길 권해 드려요.
5. 종로구 계동, 델픽 안국 플래그십 스토어
위치 : 서울 종로구 계동길 84-3 2층
추천 메뉴 : 드 미테라De Mitera(시그니처) / 밀리 필리Mili Fili(시그니처) / 케이티 디드 Katy Did

북촌의 기와지붕이 내려다보이는 ‘델픽’은 차 문화 앞에 놓인 보이지 않는 문턱을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허무는 공간입니다. 창밖은 수백 년 된 과거의 풍경이지만, 내부는 차가운 금속과 거친 돌의 물성이 지배하는 전위적인 현대 미술관을 닮았습니다. 이러한 공간적 파격은 델픽이 지향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습니다. 이곳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찻집을 넘어, 차 문화를 아우르는 플랫폼으로도 기능하기 때문이에요. 아직은 차가 낯선 이들을 위해 녹차나 홍차의 복잡한 등급 대신, 직관적인 향과 맛을 즐길 수 있는 ‘블렌딩 티’로 가볍게 악수를 청하죠. 갤러리처럼 펼쳐진 공간에서 나의 취향에 맞는 다구와 찻잎을 감상하는 과정은, 내 취향에 맞는 작품을 고르는 일과도 같습니다. 차를 마시는 것을 넘어, 차와 함께하는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설계하고 싶다면 델픽이라는 플랫폼에 접속해 보세요.
Editor's Note
다섯 곳의 공간이 지향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차 한 잔을 통해 일상의 지루함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간의 경험이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적 의식(Ritual)이 된다는 사실이죠.
식후 생존을 위해 습관적으로 커피를 들이키던 우리의 일상에, 차(Tea)가 스며들 틈이 생겼다는 건 참 반가운 일입니다. 서울 도심 곳곳에 차의 미학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이토록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숨 가쁜 속도전 속에서 차가 건네는 ‘여유’와 ‘멈춤’을 아끼게 되었다는 방증 아닐까요?
나를 둘러싼 시간과 물건이 곧 나를 만듭니다. 이번 주말에는 나를 채찍질하는 대신, 따뜻한 찻물이 전하는 건강한 영양과 느긋한 시간으로 온전히 나를 채워보시길 권합니다. 오늘 소개해 드린 다섯 곳의 공간에서 찻잔 속에 담긴 아름다움을 발견해 나가는 여유를 마음껏 즐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