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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시 개인전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것만큼 성가신 일이 있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소리를 듣는 건 아니었다. 남들처럼 들었다. 간혹 평균에서 벗어나는 때가 있었는지도 모르나, 그의 비일상을 구성하기엔 턱 없이 모자랐다.
그는 소리를 듣는 것에 있어 당연하다시피 제약이 있는 사내다. 다만 지금까지 그를 묘사적으로 내세우는 까닭은 그는 빈번하게 성가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감정은 그가 비일상을 뛰어넘도록 했으며 늦은 밤과 이른 새벽을 동일시하게도 했다.
한때 범람하기도 했던 그의 얼굴은 마른 표정으로 진동한다. 미세한 떨림이 길게 고개를 빼고 주위를 눈부시게 하려 든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숨긴 기색이었다(저마다 정도는 다르긴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나 성장을 멈춘 기억 혹은 바닥을 드러낸 견딤일까.
감춤은 이동을 빌미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를 알고도 모른척해야 마땅한지도. 그렇게 된다면 나는 이 거리에서 유일하게 멈춘 존재로서 결핍을 관망하고 한편으론 이를 애석하게 여길 터다.

어제와 같은 장소에서 다른 것을 본다. 날씨는 고스란히 전날의 자신을 가져온 듯하다.오늘은 객관적으로 오래 걸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객관적으로 오래'란 대체 뭔지 이에 대해 생각한다. 생각의 연장, 그것의 이어달리기는 연신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현실의 책상과 의자를 <책상보다 높은 의자>와 <의자보다 낮은 책상>으로 규정한다. 아래를 굽어보는 모양새가 영 시원치 않다면 기분과 삭막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으리라.
한동안 사람들에 섞여 이동했다. 그들의 목적과 엇갈린 투정은 흥미로운 일이었고, 관찰은 계속되었다. 이를 지속하기 위해 한때 무리가 된 것을 여전히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손끝에 닿은 생활상이 사실 전부인 사람. 그는 저 너머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오지 말 걸'과 '가지 말 걸' 사이에 놓인 기간은 처참하다.
비에 젖은 나뭇잎 생각. 썩은 나무 밑동, 울창한 숲의 일부였던 뭇 가지들.

정확한 수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적당히 한 무더기 정도 될 거야. 그쯤 되는 숫자. 그래도 두 자리는 넘지 않네.
바닥으로 떨어지는 시대상에 포함된 이는 다목적의 그와 어수선한 나뿐이다. 우리가 표한 의도투성이 사상은 좀체 낯선 기색이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둥을 세우는 것 같은데 그게 딱히 숭고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니고, 그저 대단할 뿐이다. 높이의 문제가 대두되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일까.
상대적으로 낮고 높음이 절대적인 영역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극한으로 치달을 때 여실히 공백을 증명한 주변과 사사로운 관계 사이에서 나는 천천히 눈 감았다가 뜰 뿐. 눈에 어쭙잖은 것들을 제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