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 읽히는 한로로의 음악 3곡

읽는 음악이자 듣는 소설이 청춘에게 건네는 위로

이미지 출처: CJ 문화재단 

퇴근길 지하철이나 늦은 저녁, 하루를 매듭짓는 고요한 시간에 우리 곁에 머무는 음악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귀 기울인 이 선율이 사실 한 편의 소설이라면 어떨까요?

한로로(HANRORO)는 국어국문학 전공 배경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작가이자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입니다. 한국대중음악상이 주목한 그녀의 서사의 힘은 단순한 감상을 넘어 음악과 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가사를 해석하는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펜으로 지어낸 세계에 목소리로 숨을 불어넣는 한로로의 음악 중 독자의 일상에 스며들 3곡을 소개합니다.


자몽살구클럽』, 죽고 싶지만 실은 '살구' 싶은 아이들의 멜로디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한로로의 『자몽살구클럽』 표지
이미지 출처: 벅스, 한로로의 [자몽살구클럽] EP 표지

같은 제목으로 소설과 앨범이 있는 이 이야기는 네 명의 소녀들이 만든 비밀스러운 연대에서 시작됩니다. 학교와 가정이라는 좁은 세계 안에서 버텨내기조차 힘든 현실을 살아가며, 불안한 현실 속에서 도피처를 헤매던 그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기적처럼 자신들의 공간을 만드는 과정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소설 속 소녀들은 독자에게 가장 역설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난 널 버리지 않아 너도 같은 생각이지

수록곡 ‘0+0’의 가사처럼, 이 아이들의 절박한 외침은 앨범의 트랙을 따라 비로소 목소리를 얻습니다. 책을 덮고 이어폰을 꽂는 순간, 활자 속에 갇혀 있던 감정들이 멜로디를 타고 벅차게 흐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7곡이 담긴 이 EP(Extended Play)는 소설의 불완전하고 복잡한 엔딩에 대한 감정의 마침표를 찍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묵직한 위로를 건넵니다.


소설은 EP 앨범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지도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소설이 어두운 현실을 폭로하고 무거운 서사를 제시한다면, 앨범은 그 안에 숨겨진 인물들의 내면을 들리게 하는 확성기가 됩니다. 텍스트로 서사를 읽고 음악으로 감정을 채울 때, 우리는 수동적 청자를 넘어 이야기를 완성하는 능동적인 참여자가 됩니다. 소설 속 아이들을 떠올리며 가사를 곱씹다 보면 이미 당신은 그녀의 세계 깊숙이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입춘>, 차가운 계절을 견디는 이들에게 보내는 첫 봄인사

2022년 데뷔곡이자 한로로의 세계를 여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한 편의 수필처럼 서정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삶을 온전히 사랑하기 힘든 청춘에게 조용하지만 강한 위로를 건넵니다. 그녀 역시 불안정한 시기, 답답함에 나선 밤 산책길에서 피어난 작은 꽃을 보고 곡을 썼다고 합니다.

아슬히 고개 내민 내게 첫 봄인사를 건네줘요 피울 수 있게 도와줘요

새싹이 추위 속에서 아슬하게 고개를 내미는 것처럼, 세상의 지지를 얻고 싶은 심리가 가사에 투영되어 있습니다. 보편적이지만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 취약한 감정은 후렴구에서 폭주하는 듯한 록 기타 사운드를 통해 비로소 해방됩니다. 두려움 대신 용기를 선택하고 리스너들과 유대하려는 한로로의 철학을 담고 있는 이 곡은, 차가운 계절을 견디는 모든 청춘에게 보내는 서정시(詩) 와 같습니다. 가사 한 줄 한 줄에 담긴 문학적인 은유는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에세이를 읽은 듯한 여운을 선사합니다.


<집(H O M E)>, 소화(消化)와 소생(蘇生), 뜨겁고도 현실적인 격려

소설 『자몽살구클럽』이 아이들의 불안한 심리적 연대를 다룬다면, 이 곡은 그 연대가 향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을 보여줍니다. 한로로가 말하는 집은 단순히 돌아갈 안식처가 아니라, 고통을 직면하고 스스로 재건하는 의지의 은유와 같이 느껴집니다. 먼저 완결된 이야기나 감정의 흐름을 글로 정립한 뒤, 그 위에 운율과 호흡에 맞춰 선율로 직조하는 창작 방식은 독자에게 전하는 위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듭니다.

다툼 절망 소화 소화
기쁨 희망 소생 소생

그녀가 짓는 집의 재료는 현실의 잔해입니다. 가사 속 "활활 타오르는 나의 집"은 재난의 현장을 의미합니다. 이 절망 속에서 핵심 가사인 “다툼 절망 소화 소화”를 거쳐 “기쁨 희망 소생 소생”으로 나아갑니다. 파국을 회피하지 않고 능동적인 에너지로 소화(消化)하는 과정을 들려줍니다. 클라이맥스에서는 "사라져가는 자들 여기로 모여라"라는 외침과, 연대를 통해 혼자가 아닌 “뜨거운 우리는 따뜻한 집을 짓네”라며 새로운 목표로 나아갑니다.

어둡게 느껴지는 가사와 달리, 강렬하고 속도감 있는 모던 록 사운드는 왠지 모르는 기묘한 생동감을 부여합니다. 고통을 뚫고 나아가는 생명력 있는 에너지처럼 느껴지죠. 비바람을 막아줄 그녀의 단단한 가사는 무너진 곳에 다시 집을 짓겠다는 건축가의 투지와 같습니다. 그 투지를 느끼며, 독자들도 서로 연대하며 고통을 소화하고 끝내 소생하기를 바랍니다.


가장 빛나는 시기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불안한 시기를 우리는 '청춘'이라 부릅니다. 미래의 불확실성 속에서 수많은 청춘이 흔들리며 하루를 버텨내고 있습니다. 한로로는 소설이 남긴 씁쓸한 여백을 음악으로 채우며, 보다 입체적인 위로를 건넵니다. 그리하여 필자는 그녀의 음악을 통해 연대하며 스스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배웁니다. 오늘도 치열하게, 또 빛나게 살아가고 있는 독자들에게 이어폰 너머로 흐르는 그녀의 노래는 오늘도 가장 숭고한 찬사를 흘려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독자에게 위로가 된 한로로의 가사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