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이들을 돌아보는 스페인 바로크 문학 3선

추운 계절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계절이기도 하죠. 혹시 겨울을 맞아 유럽여행을 계획하는 독자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자는 이맘때면 스페인으로 교환학생을 떠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처음 가는 유럽이라 더욱 설레었죠. 그곳에서 만난 가장 큰 선물이 있다면 바로 스페인 문학사 수업이었습니다. 저의 진로를 바꿀 만큼이나 매혹적이었거든요.

이 글로 안티에그 독자분들을 처음 만나며,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스페인 바로크 문학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해가 바뀌는 이 계절엔 누구나 터닝포인트를 찾게 마련이니까요. 그 가운데 소외된 이들을 돌아보는 눈까지 얻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요.

 

1.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 (작자 미상)

짧게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Lazarillo de Tormes>라고도 불리는 작품입니다. 한국어 번역본의 표지엔 비뚜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 인상적이네요. 악동이지만 분명 연민이 가는 주인공 ‘피카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피카레스크 소설’의 시초가 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이 소설은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가난한 주인공 라사로(Lázaro)가 여러 주인을 섬기며 겪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합니다. 순진했던 소년 라사로는 그가 만나는 다양한 주인들로 말미암아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의 꾀와 재치로 어려운 삶을 타개해 나갑니다. 그 과정에서 악행을 저지르기도, 도덕적으로 타락하기도 하지만 그가 가진 특유의 연민과 말솜씨로 인해 독자는 어느새 그를 응원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 소설은 바로크 시대에 절정을 이룬 피카레스크 소설의 시초가되는 작품이지만, 정확한 집필 시기는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로선 왕이나 귀족이 아닌 평범한 하층 계급의 주인공이자‘반영웅(anti-hero)’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무척이나 파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다른 소설들은 주로 상류층의 무용담이나 사랑이야기를 담은 것이 대부분이었거든요.

라사로가 섬기는 주인들은 라사로보다는 조금 낫지만, 역시 좋지못한 처지에 있습니다. 여인네들에게 기도를 해주며 구걸을 하는장님, 구두쇠 사제, 가난하지만 겉멋과 허세만 가득한 기사의 종자등 당대 스페인의 민중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인물상들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당대 스페인의 약자들이 살아가던 삶과 지배층이라고 할 수 있던 사제들의 모순을 엿볼 수 있죠. 아메리카에서식민지를 늘려 가며 ‘제국의 영광’을 누리던 스페인의 어두운 그늘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칙칙한 분위기일 것만 같지만 이 소설을 읽다 보면의외로 ‘피식’ 웃음이 나는 일이 많습니다. 이는 라사로를 통해 전해지는 작가 특유의 재치와 해학이 돋보이기 때문이죠. 때로는 당대의 지배적인 사상이었던 종교를 과감하게 비판하는 구절들에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이번 연말, 재미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고전을 읽고 싶다면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를 한 번 읽어보세요.

 

2. 푸엔테 오베후나 (로페 데 베가)

다음은 희곡입니다. 이 작품의 작가인 로페 데 베가(Lope de Vega)는 바로크 시대의 대중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 희곡작가였습니다. 당시엔 야외극장에서 상연하는 연극이 유행했는데, 귀족들뿐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즐기던 구경거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로페 데 베가의 작품 중엔 평범한 민중들의 이야기를담은 것들이 종종 발견됩니다. <푸엔테 오베후나Fuente Ovejuna>가 바로 그러한 작품인데요. 실제로 1476년에 동명의마을에서 발생한 농민 봉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푸엔테 오베후나는 평범한 시골 마을입니다. 그러나 사령관 페르난 곤살레스 데 구스만이라는 사령관이 이 마을의 지배자로 부임하며 온갖 악행을 일삼습니다. 주민들을 착취하고, 여인들을 강제로 취하려 하죠. 어쩔 수 없이 구스만의 명령에 따르던 마을 사람들은 어떠한 사건을 기점으로 폭발하고 맙니다. 결국에 합심하여구스만 사령관을 살해하기로 한 것이죠.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구스만 사령관을 살해한 주동자를 찾고자 하는 판사의 고문 장면입니다. 판사는 마을 사람들을 고문하며주동자의 이름을 댈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답합니다. “푸엔테 오베후나가 그랬습니다.” 이때 고문을당하는 이들은 노인, 여성, 소년 등 당시 스페인 사회의 약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굳건히 마을의 결속을 지켜냅니다. 이로써 마을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지배자의 폭정으로부터 해방되죠.

마지막 장면에 국왕이 마치 ‘해결사’처럼 등장하는 것은 평민들이귀족을 살해하는 이 이야기의 필연적인 장치이자 한계점이기도합니다. 종교와 왕실이 사회의 가장 큰 권력이었던 당대에 왕의 권위를 빌려 농민들의 반란을 정당화하는 것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필요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큰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만 약자들의 봉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가 현대에도 이 작품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3. 돈 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스페인 바로크 문학을 논하며 <돈 키호테Don Quijote>를 빼놓을 수 없죠. <맨 오브 라만차> 등의 2차 창작물들로 <돈 키호테>를 친숙하게 접한 독자분들 역시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정작 <돈 키호테>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작품의 두께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올겨울 쉽지 않은 고전을 독파하는 ‘도전’을 하고 싶은 분들이라면 단연 <돈 키호테>를 추천합니다.

<돈 키호테>는 ‘미친 노인네가 기사를 자처하며 엉뚱한 모험을 하는 이야기’라고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틀린 요약은 아닙니다만, 단지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훨씬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이야기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쇠한 하급귀족(이달고Hidalgo)입니다. 한때 유럽을 휩쓸었던 기사 소설의 광팬이죠. 읽고 또 읽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돈 키호테는 직접 기사로서 모험을 나서기로 합니다.

하지만 이미 편력기사의 모험은 시대착오가 되었습니다. 그는 왕과 공주, 괴물을 만나는 대신 다양한 계층의 일반적인 사람들을 마주치게 됩니다. 그가 성주로 착각하는 여관 주인, 귀족 아가씨들로 착각하는 창녀들이 대표적입니다. 돈 키호테의 모험을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평범한 여관의 사람들, 귀족에게 순결을 빼앗긴 평민 아가씨, 북아프리카에서 탈출한 포로, 그를 따라온 무슬림 여인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당대의 결혼식이라든가 축제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 장면들로부터 스페인의 전통 문화나 음식에 대해서도 배우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는 돈 키호테와 그의 종자 산초 판사의 콤비입니다. 돈 키호테의 평범한 이웃이었던 산초는 편력 기사가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부자의 꿈을 안고 얼떨결에 돈 키호테를 따라 나섭니다. 모험의 고단함으로부터 좋은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를 얻고자 하는 산초와 허황된 꿈을 꾸는 돈 키호테가 부딪히며 코믹한 장면들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어느새 누구보다 끈끈한 사이가 된 돈 키호테와 산초의 우정 역시 감격스러운 부분이죠.

보잘 것 없는 인물이 영웅을 꿈꾸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돈 키호테’라 새로이 칭하며 과감히 모험을 나서는 노인의 이야기, 삶을 살아가는 재치, 믿음에 관한 지혜, 정체성에 대한 탐구까지, <돈 키호테>를 완독하고 나면 작품이 주는 감동에서 한동안 헤어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스페인 바로크 시대의 문학 셋을 소개했습니다. 구미가 당기는 작품이 있으신가요? 이 작품들을 읽고 나면 스페인에 대해, ‘고전 문학’에 대해 새로운 눈을 갖게 되실 거라 장담합니다.

겨울은 많은 이들에게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연말을 보내고 새해를 맞는 계절입니다. 하지만 소외된 이들은 언제보다도 더욱이 외로운 계절이라고 하죠. 모두가 누군가와 함께 이 계절을 즐기는 가운데 혼자임이 더욱 사무치기 때문이라고 해요.

제가 소개해 드린 작품으로부터 감동을 얻으셨다면,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들까지 돌아보는 마음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모쪼록 따뜻한 겨울을 보내시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