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를 합시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와 던전밥

오늘도 무언가 먹고 마셨습니다. 대충 혼자서 허기만 때우기도 하지만, 정성을 들여서 요리해 대접하거나 대접받는 밥,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는 단순히 ‘먹는다’는 표현으로는 충분치 않은 만족감을 주죠. 따뜻한 밥, 고소한 냄새, 든든한 관계. 우리는 ‘밥’이라는 말이 쌀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식사와 요리, 어쩌면 관계 맺기까지 확장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밥 한번 먹자”든가 “밥 먹으러 집에 들어와”라는 흔한 용법처럼 말이에요. 어쩐지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면 밥이 부족한 걸지도 모릅니다. 밥이 주는 충만감과 에너지를 잘 그려낸 두 개의 작품을 소개할게요. 하나는 만화책이자 애니메이션이고, 또 하나는 미술관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 작품이라는 점에서 나란히 놓인 적은 없지만, 밥에 대한 주제 의식과 의지만은 같습니다. 가지각색의 요리가 등장하는 시리즈지만, ‘혼자 먹는 밥’만큼은 등장한 적이 없다는 점도 동일하죠.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길래 이토록 든든하고 풍족하게 느껴질까요?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 무제(Untitled) 시리즈


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퍼지는 팟타이 냄새를 맡으면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해 보시겠어요? 심지어 작가가 대접하는 요리를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작가는 관람객들이 전시장에서 함께 음식을 먹는 행위 그 자체를 작품으로 삼았거든요.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krit Tiravanija)는 1992년 뉴욕에서 시작해 팟타이와 카레 같은 태국 음식을 요리하고 대접하는 프로젝트를 이어갔습니다. ‘화이트 큐브’로 불리는 미술관의 엄숙한 공간에서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는 행위는 여러 관람객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주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당혹스러움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냄새는 강력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미술관을 식당으로 바꾸어 버렸죠.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작업을 어떤 재료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캔버스에 유화’처럼 말이에요. 냄비, 접시, 카레…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티라바니자 작업의 핵심 재료였습니다. 음식을 나눠 먹는 동안 관람객들의 긴장은 풀어지고 웃고 떠들고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관계를 맺도록 하는 행위는 그의 작업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어요. 음식 냄새를 맡고, 똑같이 식사를 하는 동안 관람객들은 촉각, 후각, 미각을 아우르는 공동의 감각을 형성해요. 전시장은 하나의 임시 공동체처럼 변합니다. 이로써 티라바니자는 미술관 제도를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고요.

티라바나자에게 예술은 사람들의 일상 가장 가까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미술관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등장한 건 90년대 티라바니자의 작업이 처음은 아닌데요. 1960년대에 플럭서스(FLUXUS)의 구성원으로 알려진 앨리슨 놀즈(Alison Knowles)는 다같이 샐러드를 만들거나, 샌드위치를 먹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전위적인 활동을 지향하는 예술가 그룹인 플럭서스에서는 일상적 행위를 예술로 승화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어요. 앨리슨 놀즈의 <Identical Lunch>라는 작품은 매일 똑같은 레시피의 샌드위치를 먹는 퍼포먼스 작업인데요. 매일 샌드위치를 먹는 행위 자체도 하나의 예술로 프레이밍한 것이죠. 이처럼 일상을 예술화하는 플럭서스의 작업은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급문화를 지향하는 대신, 미술관 제도에 일상적인 행위를 펼쳐놓고, 관객을 행위자로 끌어들여 함께 교류했습니다. 티라바니자의 퍼포먼스 작업을 두고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관계미학’이라는 용어로 해석하기도 했죠. “예술은 만남(encounter)이다”라고 주장하는 관계미학은 1990년대부터 미술계를 풍미하는 하나의 관점이 되었어요.

티라바니자는 아르헨티나 출생의 태국인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교육을 받았고,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했어요. 자신이 갖고 있는 다문화적 정체성을, 작업을 통해 녹여내고자 했습니다. 초기 작품에는 이민자로서 느끼는 ‘타자’로서의 감각이 드러나기도 하죠. 마침내 그가 택한 ‘음식’은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하고, 서로 다른 정체성을 화합하는 기회를 열어줍니다. 요리를 선사하는 퍼포먼스 시리즈는 중국 차, 독일의 감자와 소시지처럼 각 지역에 맞게 변형되며 이어집니다. 한국에서는 ‘김장’을 시도하기도 했어요. 2022년 제3회 제주비엔날레에서 50여 명의 제주도민들과 함께 ‘감귤 백김치’를 담그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죠. 지역마다 다른 음식은 서로 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힌트가 됩니다. 누군가는 경악할 수 있는 ‘미술관의 식당화’. 티라바니자에게는 이처럼 도전적인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음식을 통해 미술관은 화합의 장이 되었죠. 처음 보는 관람객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는 동안 국경도, 성별도, 이해관계도 허물어지고 서로 간의 느슨한 연대감을 새로이 느낄 수 있습니다.
쿠이 료코, 던전밥


약간의 생소한 충격과 유머, 휴머니즘을 혼합한 음식 이야기는 <던전밥>에도 있습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만화는 ‘마물(몬스터)’을 식재료로 삼아 요리해 먹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어요. 마물이 등장하는 던전을 모험한다는 설정과 엘프, 오크, 드워프 같은 다양한 종족의 등장인물은 판타지 만화의 토대를 갖추었지만, 먹음직스러운 레시피 소개에 공들이는 점과 “수고를 들일수록 맛있어진다는 건 요리의 기본”이라든지 “요리는 자신을 돌아보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대사에서는 요리 만화의 정수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던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물을 요리해 먹는다는 스토리는 단순하고 기상천외해 보일지 모르지만, 읽어갈수록 식사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갑니다. 서로 다른 종족을 평등한 식사 자리에 앉히고, 똑같이 마시고 씹고 음미하는 과정은 우스꽝스럽지만 의미심장하죠. 산뜻하고 낙관적인 태도와 유머로 무장한 <던전밥>은 ‘밥’의 문제를 생태계와 죽음, 진정한 연대와 화합으로 끌고 갑니다.
만화는 주인공 ‘라이오스’의 여동생이 마물에 잡아먹히는 비극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절망은 잠시뿐, ‘밥부터 먹자’고 말하는 대책 없는 낙관이 헛웃음을 짓게 하는데요. 그렇다고 상실을 우습고 가벼운 태도로 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하고 규칙적인 식사가 상실을 극복하는 에너지와 희망을 만든다고 힘주어 말하고, 밥이 만드는 낙관적인 태도를 삶의 지침으로 삼죠. 모험 도중에 ‘영양 균형’과 ‘규칙적인 식사’를 외치는 장면은 피식 웃음을 짓게 합니다. 사실 그리 웃긴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밥은 정말로, 인생의 만사를 해결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니까요.


그러나, 주인공의 일행은 소지품과 재산을 모두 잃어 일반적인 식사는 불가능했는데요. 던전에 등장하는 마물을 먹는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10년 넘게 마물식을 연구해 온 ‘센시’를 만나게 됩니다. 발이 달린 버섯과 슬라임은 팔팔 끓여 전골로, 식인 식물의 열매는 파이로 만들어 먹죠. 만화 속 인물들이 대체로 시도하지 않는 마물식을 혼자서 요리해 온 센시는 명확한 요리 철학과 생태관을 갖고 있습니다. ‘먹을 만큼만 수확하고 가져간다’든지, 감사를 표하며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해 행동하려고 한다든지요. 자연의 일원으로서 무언가를 잡아먹으며 살아가야 하지만, 불필요한 사냥과 파괴는 지양하죠.


이미지 출처ㅣ 소미미디어
밥은 오랜 종족 갈등도 능수능란하게 넘어섭니다. 이를테면 서로 적대하는 엘프와 오크, 두 종족은 함께 요리하는 과정에서 갈등의 수위를 해결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는데요. 마침내 식사 자리는 대화의 웅성거림과 즐거운 미식으로 가득찹니다. 만화는 ‘의견은 달라도 배고프기는 마찬가지’라며 능청스럽게 화합을 제시하죠. ‘밥’을 주제로 하는 만큼 요리와 식사는 스토리의 갈등을 해결하는 중요하고도 유일한 수단입니다. 생김새도, 수명도, 습성도 모두 다른 종족이지만 아무리 달라도 공통점은 있습니다. 밥은 누구나 먹는다는 것. 살아있는 존재는 모두 밥을 먹습니다. 그래서 <던전밥>의 내레이션은 종종 외칩니다. “먹는다는 건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라고요.
다 같이 잔치를 벌이듯이 식사하는 장관은 만화 <던전밥>이 선보이는 하이라이트입니다. 함께 모여서 웃고 떠드는 ‘연회의 즐거움’은 티라바니자의 작업과도 궤를 같이하죠. 서로 다른 문화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음식’은 잠시라도 모두를 평등하게 만듭니다. 같은 음식을 씹고, 냄새를 맡고, 삼키는 과정이 동질감을 주죠. 밥이 만든 일시적인 공동체와 연대는 서로의 차이점이 아무리 크게 보이더라도 ‘어쩌면 화합이 가능할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품습니다. 차별, 소외, 혐오, 갈등의 세계에서 더더욱 따뜻한 밥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오늘의 식사는 누구와 함께했나요?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먹느냐, 어디서 먹느냐의 문제만큼이나 ‘누구와 먹느냐’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늘 누군가와 함께 먹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배를 채우는 행위를 넘어서 ‘같이 먹는다’는 감각을 필요로 합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나란히 음식을 먹으며 연대를 꿈꾸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요리 대접 퍼포먼스와 만화 <던전밥>, 즐거운 식사 자리로 초대하는 두 작품을 통해 연대와 화합의 감각을 느낄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