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를 믿고 읽는 시집 3권
해설로 마음을 움직이는 시의 안내자
서점에서 시집을 고르면 맨 뒤쪽 해설을 먼저 펼쳐봅니다.
만약 시집을 해설한 사람 이름이 ‘신형철’이라면 더 보지 않고 계산대로 갑니다. 그의 글을 읽는 경험은 한 편의 비평을 넘어, 한 사람의 감각과 사유가 얼마나 멀리 도달할 수 있는지 알게 해줍니다. 그는 작품을 해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문학이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섬세한 온도와 떨림을 정확한 문장으로 포착해 냅니다.
특히 신형철의 해설은 작가의 목소리와 작품의 결을 존중하면서도 독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지점들(가려진 아름다움, 발견하지 못한 슬픔 등)을 드러내는 데 탁월합니다.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문장과 단어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고 움직이는지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은 신형철 평론가가 해설한 3권의 시집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웃음 뒤에 말못한 표정을 알아채주는 문장
빛을 비추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서
웃기만 했어
얼마나 오래 이럴 수 있을까
정말 웃기만 했어
_『빛이 밝아서 빛이라면 내 표정은 빛이겠다 』 부분
이원하의 시를 읽다 보면 마음속 어두운 구석에서 오래 방치되어 있던 감정 하나가 ‘사실 나 여기 있었어’ 하고 작은 손을 드는 순간과 마주하게 됩니다. 신형철은 바로 그 조용한 신호를 놓치지 않습니다. ‘웃음’ 뒤에 숨어 있던 결핍을, 웃어야만 관계가 유지된다고 믿어왔던 시인의 몸짓을 그는 과장 없이 정확한 문장으로 꺼내놓곤 합니다.
웃음과 울음 사이에서, 감정의 관리와 표현 사이에서, 시인이 자주 고민해 왔음을 짐작하기 위해서 더 많은 구절을 인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웃음을 택해 내 안의 결여를 감춰야만 타인이 나를 받아주리라 믿었는데, 그랬더니 내 안에 있는 것을 아무도 읽어내지 못하는 외로운 상황에 자주 놓였을 것이다. _신형철 해설 중
시인이 감정을 표현해 온 방식, ‘웃음으로 결여를 덮어야 했던 시간’에 대해 신형철은 비난도 연민도 아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따뜻한 이해의 온도로 다가갑니다. 담담하게 그의 해설을 따라가면서 시인이 왜 웃음을 선택했는지보다 그 웃음 뒤에 어떤 말 하지 못한 표정이 있었는지가 훨씬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의 글을 잠시 우리에게 비춰보자면, 우리 모두에게 있는 ‘밝은 표정’은 사실 저 깊숙한 곳에 흐르는 ‘고요한 슬픔’을 비추어주는 희미한 빛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외면해 온 감정의 윤곽을 선명히 그려줍니다. 시집을 덮으며 누군가 내 마음의 저편을 정확히 읽어준다는 경험을 갖게 된다면, 그게 이 시집과 해설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일 겁니다.
작품이 될 수 없는 슬픔을 마주할 때
뱃속에 있던 아기의 심장이 멎었다. 휴일이라 병원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식은 몸으로 이틀을 더 머물다 떠나는 아기를 위해 여자는 혼자서 자장가를 불렀다
태명이 풀별이었지 작명가는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덤으로 바뀐 배를 안고 신호가 끊어진 우주선 하나가 유영하는 우주 공간을 허우적거린 이틀
_『바다 무덤』 부분
뱃속의 아기가 세상을 떠났다는 극단적이고 본질적인 상실 앞에서 이 시는 더이상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다시는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두 사람의 시간을 조심스럽게 복원하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상처를 글로 쓰는 일이 자칫 감정의 전시나 슬픔의 소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긴장 속에서, 이 시는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 견디어낼 수 있는지를 깊은 고민 끝에 보여줍니다.
편지나 시로도 쓰기 어려운 일들이 있다. 작품이 될 수 없는 사건이 있다는 말은 그 일을 다시 떠올리기가 고통스럽다는 뜻이고 또 아무리 노력해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만, 그런 사건일수록 한 번은 작품으로 만들어서 그 사건이 ‘작품이 될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멈추게 만들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_신형철 해설 중
신형철이 특히 주목하는 지점은 애도의 역설입니다. “잊으려 할수록 선명해지고, 기억하려 애쓰면 서서히 사라지는 것.” 잊으려는 시도가 어쩌면 더 큰 고통을 불러오고, 기억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비로소 슬픔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아닐까요. 그의 해설을 읽으며 애도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상실을 외면하는 대신 그 상실을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이야말로 치유의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곱씹어봅니다.
오래 애정이 어리게 지켜본 이만이 가질 수 있는 온도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_『선잠』 부분
문장 하나가 기억의 뒤편에 묻어두었던 감정을 끄집어내기도 합니다. 박준의 시를 읽다 보면 종종 그런 경험을 하곤 합니다. 시인이 써내린 상황을 직접 한 경험은 아니지만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듯한 장면이 그려집니다. 이런 섬세함을 알기에 박준의 시를 해석하는 신형철의 방식은 감상이나 평가가 아니라 ‘질감의 분석’에 가깝습니다.
박준의 '나'가 하는 사랑이란 '열정적 사랑'도 아니고 '낭만적 사랑'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남성 시인의 격정적인 에로스가 상대방을 집어삼키고 자신도 파멸할 듯이 분출하는 순간도 없고, 운명적인 만남으로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자아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도 보이지 않는다. 내 식대로 말하면 그는 작은 차이들의 연인이어서, 그의 사랑도 그저 작은 차이들에 민감한 사랑인 것으로 족하다. 이 작은 차이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없는' 차이이지만 일단 감지하기만 하면 '큰' 차이가 된다._신형철 해설 중
해설에서 평론가는 박준 시의 ‘작은 차이’에 대한 민감성을 정확히 읽어냅니다. 박준의 사랑은 거창하거나 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아예 느끼지 못할 사소한 변화, 작은 온도 차이, 미묘한 흔들림을 놓치지 않는 그런 사랑입니다. 신형철은 그것이 ‘작은 차이의 연인’으로서 박준이 가진 미덕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해설을 따라가다보면 익숙하고 당연했던 사랑의 모양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쩌면 사랑이란, 거대한 감정의 파도보다 미세한 진동에 귀 기울이는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해설의 마지막 문단을 다 읽고나면, 박준이라는 시인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만이 쓸 수 있는 온도의 문장이구나 싶습니다. 시 자체가 주는 감동도 있지만 누군가의 시선이 시가 가진 고요한 온도와 여백의 깊이를 더 환하게 드러낼 수 있구나 깨닫습니다.
좋은 평론은 작품이 말하려 했던 자리까지 독자를 부드럽게 데려다 놓습니다. 신형철의 글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그 정직한 안내의 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시인이 감당한 마음의 무게를 가볍게 해석하지도, 과장해 옮기지도 않습니다. 그저 작품의 결을 따라가며 우리가 놓친 정서를 또렷이 밝혀줍니다.
그래서 그의 해설을 읽는 경험은 시를 ‘이해하는 시간’이 아니라, 시를 통해 읽는 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이 세 권의 시집은 그런 안내자가 곁에 있을 때 비로소 깊게 도달할 수 있는 세계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