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이지 않은 채로, 함께

부부 아티스트 ‘잇은’이 만들어낸 사랑의 형태

섞이지 않은 채로, 함께
아들 이든을 목마 태운 홍정욱 작가(왼쪽)와 김효정 작가(오른쪽), 이미지 출처 : 노화랑

우리는 사랑을 하면 하나가 된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곱씹어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사랑하다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는 동사인데, 우리는 그것이 반드시하나라는 고정된 명사에 박제되어야 한다고 믿는 걸까요. 어쩌면 완결에 대한 갈망은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타인이라는 거대한 미지를 견디지 못하는 우리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지구상의 서로 다른 좌표와 시간 속에서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며 살아온 사람이 만납니다. 사이의 간극이 넓고 깊을수록 사랑은 더욱 애달프고 간절해진다고들 하죠. 그렇다면 사랑이란 간극을 메워가는 과정일까요, 아니면 결코 메울 없다는 무력한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일까요

부부 아티스트 ‘잇은(itt-eun)’의 작업실은 그 질문에 대해 조용히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서로를 지워 0.5와 0.5가 만나는 무력한 합일이 아니라, 두 개의 온전한 ‘1’이 끝내 섞이지 않더라도 나란히 설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이들에게 사랑의 언어는 유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 , 면이라는 정직한 물성의 궤적으로 팽팽하게 버티는 형태였습니다.


점(Dot) : 사랑은 1이 되는 일일까?

이미지 출처 : unsplash

아티스트 그룹잇은 작업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서로 다른 가지 온도가 공존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서정적인 평면 회화를 그리는김효정 명료한 입체 설치 작업을 하는  ‘홍정욱’. 두 사람은 잇다라는 이름으로 모인 팀이지만, 이들의 작업은 섣불리 융화되기보다 오히려 각자의 경계를 선명하게 드러내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김효정의 색채는 따스합니다. 화면 경계는 명확하면서도 날카롭지 않으며, 납작한 평면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빈약함 대신 고요한 깊이감이 돋보입니다. 반면 홍정욱이 택한 재료는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차갑고 예리한 나무 구조물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선들이 주를 이루지만, 역설적이게도 위태로운 구조 안에서 작품은 자유롭고 다정한 숨을 내뱉습니다.

잇은,"그냥-3 JUST BECAUSE-3", 2022, 물푸레나무 프레임에 와이어 &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사람의 작업이 화면 안으로 온도를 채워 넣는다면, 다른 사람은 대비를 높이며 밖으로 뻗어 나갑니다. 붓결이 머무는 2차원과 구조가 설계되는 3차원은 애초에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평행선 위의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잇은’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기 전, 각자의 영역에서 이미 완결된 독립적인 존재들인 셈입니다.

잇은 ,"그냥-2 JUST BECAUSE-2", 2022, 소나무 구조물에 와이어와 와이어 채색,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사랑의 출발은 ‘우리는 같다’는 안일한 확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결코 겹쳐질 수 없는 두 개의 점(1+1)이 존재한다는 그 무력한 고독을 끝내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두 점이 완전히 포개어져 하나가 되어버린다면, 역설적으로 더 이상 서로를 바라볼 수도, 서로를 향해 선을 그을 수도 없을 테니까요. 각자의 자리에서 또렷하게 빛나는 이 두 점은 과연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선(Line) : 연결하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결코 섞이지 않을 같았던 고립된 점이 서로를 향해 손을 뻗기 시작합니다. 세계를 잇는 선은 과연 어떤 궤적을 그리며 그어질까요. ‘잇은 내놓은 답은 달콤한 합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를 향한 무모할 정도의 신뢰와 내가 예측할 없는 우연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기에 가깝습니다

이들의 용기는상의 없는 인계라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구체화됩니다. 김효정이 캔버스 위에 서정적인 온기를 채워 넣으면, 홍정욱은 이어서 그림을 자신의 작업대로 가져가 거친 나무 구조물과 차가운 와이어를 덧댑니다. 반대로 홍정욱이 정교한 입체의 골조를 먼저 세워두면, 김효정은 프레임 안을 의도하지 않은 색들로 가로질러 침범합니다. 사람은 서로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도, 상대가 남긴 도발적인 여백 속에서만 대화가 살아납니다

잇은 홍정욱 작가 <inter- (사이)>전에서, 이미지 출처 : 서울문화IN

잇은에게 형식은 고정된 규칙이 아니라 인계의 과정일 뿐입니다. 작업이 놓이는 공간과 서로의 손길이 닿는 순서에 따라 형태는 순간 달라집니다. 이들은 이를환경적 형식주의' 부릅니다. 형식이 환경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이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낸다는 믿음이지요. 믿음이 정체된 ‘1’ 흔들어 움직이게 합니다.

잇은, "dimensions variable", 2024, 나무 공과 철사 장식물에 아크릴 채색

나의 의도를 비껴가는 상대의 창작은 결코 나의 세계를 망가뜨리는 훼손이 아닙니다. 오히려 혼자서는 결코 닿을 없었을 낯선 지평으로의 확장이며, 불확실성이 선물하는 경이로운 순간이지요. 연결은 이처럼 감정의 유희가 아니라, 상대가 던진 우연을 삶의 일부로 끝까지 견뎌내겠다는 치열한 의지의 결과입니다. 그렇게 선이 그어지고 나면, 사이에는 비로소 이전에 없던 새로운 차원의 무엇인가가 생겨납니다.


면(Plane) : 머물다

마침내 마주한잇은 작품에는 하나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지워낸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캔버스의 천은 여전히 부드러운 질감을 유지하고, 금속 프레임은 차갑고 단단한 본연의 성질을 고수합니다. 물감은 위에 고요히 내려앉아 차분하게 침잠해 있지만, 나무 구조물은 더욱 확고히 도드라지며 자기만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잇은, "그냥-1 JUST BECAUSE-1",2022, 아크릴 채색, 새틴-아크릴(satin-acrylic)판넬, 자작나무 구조물에 무반사유리 &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완성된 작품 안에서 천과 나무, 알루미늄은 억지로 융합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질감과 물성을 선명하게 유지하며 하나의 면을 이룰 뿐입니다. 잇은 작품이 전형적인 사각형의 틀을 벗어나 뒤틀리거나 공간 밖으로 튀어나온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하나가 소멸되어 전체에 흡수되는 대신, 끝내 지워지지 않은 존재가 서로의 무게를 온몸으로  지탱하는 응력. 부드러움은 날카로움을, 차가움은 따뜻함을 견뎌내며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잇은, "그냥-7 JUST BECAUSE-7", 2022, 자작나무 구조물에 아크릴 채색,와이어,우드볼&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이들이 도달한 '1'이라는 형상은, 서로를 지우지 않아도 공간에 공존할 있다는 진실된 증거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꿈꿔야 사랑의 종착지 역시 나를 잃어버린 합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나의 물성을 지킨 당신이라는 변수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치열한 견딤의 그것이 우리가 마주해야 사랑의 진짜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사랑의 ‘1’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코 겹쳐질 없는 점을 인정하되, 유약한 인정이 결코 체념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는 . ‘잇은 작업실에서 마주한 사랑은 바로 그러한 형상이었습니다

섞일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서로를 향해 선을 긋고, 상대가 던져 뜻밖의 우연을 환대하며, 통제할 없는 무력감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연결을 멈추지 않는 . 그렇게 지워지지 않은 자아를 지닌 같은 위에 위태롭지만 단단히 머무는 . 그것이 바로잇은 직시하고 만들어낸 ‘1’ 실체입니다

이제 질문을 독자 여러분께 돌려봅니다. 섞이지 않은 채로 함께 서기 위해, 여러분은 오늘 어떤 선을 긋고 있나요. 그리고 지금 여러분의 사랑은 어떤 형태의 ‘1’ 그려가고 있나요.


참고문헌

  1. 중부일보, [우리동네 옆집 예술가] 홍정욱·김효정 작가, 삶도 예술도 함께… 부부라서 더 즐겁습니다 (2026.04.04)
  2. 아시아경제, [갤러리 산책]작품과 공간을 잇는 시각적 리듬의 '입체회화' (2024.08.28)
  3. 잇은 itt_eun : 그냥- JUST BECAUSE- (2022.6.15-7.17), 2022, https://pageroom8.com/exhibition/?bmode=view&idx=11800442
  4. Inter-, 2024, https://kiaf.org/en/insights/46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