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이 바라본 인간의 미래
발전이라는 오래된 질문
AI라는 단어가 일상의 언어가 되고, 유전자 복제가 뉴스의 헤드라인이 되고, 가상 세계가 현실의 연장으로 받아들여지는 오늘, 우리는 놀랄 겨를도 물을 틈도 없이 앞으로 내몰립니다. 하지만 발전은 단순한 도구의 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정의해 온 방식 자체의 변화입니다. 이성의 유일함이 흔들리고, 자연의 신비가 해체되고, 공간의 유한함은 사라집니다. 우리가 세계라고 불러온 것의 테두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리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SF 소설은 그 무너짐의 자리에 섭니다. 현재가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실험실로 삼아 사고 실험을 반복합니다. 기술의 진보가 기존의 윤리를 어떻게 흔들어 놓을지, 시스템이 인간의 정체성을 어디까지 규정할 수 있을지,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서로 다른 세기에 쓰인 3편의 소설을 통해 발전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고찰해 봅니다.
에드윈 애벗 애벗 - 『플랫랜드』 (1884)

플랫랜드는 2차원의 세계입니다. 도형의 몸을 가진 존재들이 살아가고, 각의 수가 계급을 결정합니다. 이 세계의 질서는 의심받지 않습니다. 그곳에 다른 차원을 알고 있는 정사각형이 나타납니다. 애벗이 포착하는 것은 앎의 고독입니다. 세계는 때때로 진실보다 질서를 선택합니다. 2차원의 언어로는 3차원을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됩니다. 진실을 알게 되는 자는 해방됨과 동시에 기존 세계에서 추방됩니다. 홀로 마주한 진실은 자유롭기보다 고독합니다.

이것은 1884년에 쓰인 이야기이지만 인간 사회가 반복해 온 장면이기도 합니다. 지동설, 진화론 그리고 오늘날까지,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발견이 등장할 때마다 기존 질서는 질문받습니다. 새로운 차원은 변화의 순간에 언제나 이미 존재합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그 차원이 존재하느냐의 여부보다 균열 사이로 보이는 새로운 세계에 어떤 가치를 쌓아 올릴 것이냐 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올더스 헉슬리 - 『멋진 신세계』 (1932)

세계국에서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설계됩니다. 계급에 맞게 배양되고, 고통은 소마라는 약물로 처리됩니다. 고통도 갈등도 없이 ‘행복’을 관리하는 그야말로 ‘멋진 신세계’입니다. 그곳에 보호 구역 출신의 야만인 존이 들어오면서 균열이 발생합니다. 존이 ‘멋진 신세계’를 거부합니다. 그는 안락함 대신 신과 시와 참된 위험과 자유와 선, 그리고 악을 원합니다. 관리되는 행복보다 차라리 불행해질 권리를 원합니다. 그것은 세계국의 질서로는 이해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취향이 설계하고, AI가 인간을 분석하는 시대를 삽니다. 기술이 인간성을 말소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오래된 감각입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향해야 할 곳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다는 위선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입니다. 진짜 공포는 그 시스템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때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발전의 편리함 앞에서 기민하게 세워야 하는 것은 상실에 대한 감각입니다.
앤디 위어 - 『The Egg』 (2009)

사고로 죽은 한 남자가 ‘신’을 만납니다. 그는 죽음 이후를 묻고 ‘신’은 그가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답합니다. 그것도 내일이 아닌 과거로요.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시간은 선형이 아니고 존재는 유일하지 않습니다. 애벗과 헉슬리가 발전의 그늘을 응시한다면 위어는 발전의 의미 자체를 다시 묻습니다. 그는 발전을 기술의 축적이 아닌 의식의 성숙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모든 삶이 당신이 살아갈 모든 삶이기도 하다는 메시지는 인류의 모든 움직임이 거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과학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인간은 언제나 상상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빅뱅 이전의 시간, 우주의 바깥, 죽음 이후의 세계. 그 상상이 허황되어 보일지라도, 아직 알 수 없는 영역에서 어떤 가능성도 완전히 닫힐 수는 없습니다. 위어의 이야기는 그 열린 가능성 위에 사랑을 놓습니다.
발전은 언제나 기존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낭떠러지인 줄 알았던 세계의 바깥으로 더 넓은 세계가 열립니다. 그 세계가 더 나은 세계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앞에 놓여야 할 것은 그 넓어진 세계에 어떤 가치를 다시 세울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SF 소설은 미래를 예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가능성의 세계가 담아야 하는 질문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