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도화지가 된 자연, 일러스트레이터 언호
나만의 속도로, 더 나은 삶을 살아내는 방식

‘업무 자동화 하기’, ‘일주일 만에 이 분야의 전문가 되기’.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들이 낯설지 않게 들려옵니다. 효율성과 속도에 주목하는 요즘, 때론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성장만이 정답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삶의 실전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죠. 오히려 성장은 어느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들이 모여서 조금씩 빚어져 가는데요. 이번 인터뷰에서는 다양한 선택지를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며,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해온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언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성장의 바탕이 되어준
강원도와 자연
Q. 언호 작가님은 어떤 곳에서 성장해오셨나요?
저는 강원도 영월에서 20여 년을 살았고, 서울과 용인에서 지낸 4~5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강원도에서 보냈어요. 저에게 강원도의 산과 바다는 단순히 특별한 순간에만 영감을 주는 자원이나 콘텐츠가 아니라, 삶의 리듬과 감각을 회복시켜주는 일상의 바탕 같은 존재에요.
예전에는 자연을 영감의 원천 정도로 여겼지만, 지금은 창작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창작자에게 ‘여유’는 새로운 영감을 낳는 도화지인데, 강원도의 자연이 바로 그 여유를 만들어 주거든요. 그래서 제 작업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늘 강원도의 자연과 연결되어 있고, 강원도라는 지역성이 제 창작을 떠받치는 기초가 됩니다.
Q. 대도시와 강원도를 번갈아 지내면서 가장 크게 느낀 변화는 무엇이었나요?
서울로 이주할 때 나름 각오는 했지만, 막상 와보니 예상보다 훨씬 과밀화된 도시였어요.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빈 하늘조차 보기 힘들었고, 구역마다 기능적으로 분리된 느낌이 강했어요. 어떤 동네는 사무실만, 또 어떤 곳은 관광객만, 혹은 사회 초년생들만 모여 사는 식이었죠.
언호 작가의 과거 작업물.
저 역시 초년생으로서 고시원과 사무실 밀집 구역을 오가며 살았는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대부분 어수선하고 지저분했어요. 특별히 힘을 내서 전시를 보러 가거나 한강에 나가지 않으면 시선을 환기할 여유조차 없었죠. 그 때 ‘이 도시는 사람을 위한 도시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적어도 주민 스스로 주도해 만든 공간이 아니라, 구조와 효율에 맞춰 사람들이 끼워져 살아가는 곳처럼 느껴졌어요.
서울은 한때 제게 사회가 바라는 이상적인 삶의 표본 이었지만, 실제로 살아보니 개인은 주체라기 보다 수용자에 불과했어요. 그 경험을 통해 저는 서울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고, 학창 시절 내내 저를 압박하던 ‘정답 같은 삶의 틀’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Q. 강원도로 돌아와 일러스트 작가로서 작업을 이어가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저는 원래 은퇴 즈음 바닷가에 작업실을 두고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요. 그런데 용인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중 우연히 ‘강릉살자’라는 지역살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고, 그 순간 ‘굳이 수도권에 매달려 있을 필요가 있을까? 꿈을 미룰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 그렇게 다소 무모하게 강릉으로 내려왔어요.
주변의 걱정이 많았고 저 스스로도 확신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 의구심들을 ‘더 나은 삶을 살아내는 방식’으로 지우고 싶었어요. 강릉에서 지내며 저는 단순히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가 바라는 삶의 형태를 직접 제안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죠.
‘살기 좋다’는 기준은 주관적인 것이지만, 제 안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함께한다면 강원도도, 서울도 조금 더 살기 좋은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소멸과 회복,
자연의 성장을 바라보는 시선


Q. 강원도에서 했던 경험과 생각들이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강원도로 돌아와 가장 먼저 떠올린 큰 작업의 방향 중 하나가 ‘대지미술’이었어요. 2019년부터 고민해온 아이디어인데요. 특정 장소에서만 감상할 수 있고 시간이 흐르며 형태가 변하는 작품에 대한 상상이었어요.
예를 들어, 나무의 생장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가지를 구부리거나, 잎을 더하거나 덜어내 그림자의 형태를 조작해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에요. 그렇게 하면 해와 나무의 각도가 맞아 떨어지는 특정 계절, 특정 시간에만 작품이 온전히 드러나는데요. 그 순간의 희소성과 독점적 경험이 곧 작품의 본질이 되는 셈이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무가 성장하면서 그림자가 흐트러지고 사라지는 과정은 또 다른 메시지를 품게 되는데요. 그것을 ‘소멸’이라 볼 것인지, 혹은 자연이 본래의 형태로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볼 것인지, 관람자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죠. 여기에 인공 광원을 활용한다면 밤에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데요.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가능성도 상상했어요.

저는 일상의 여백에서 영감을 얻어요. 강원도의 풍경과 생활 자체가 제 작업의 큰 원천이고, 사람들과 대화나 작은 발견도 그림의 실마리가 되죠. ‘대지미술’에 대한 아이디어는 단순히 작품의 한 형식이 아니라, 강원도에서 예술을 통해 제안하고 싶은 삶의 방식과도 맞닿아 있어요.
새로운 실험이 남긴
성장의 결
Q. 그림의 실마리가 되는 관계가 있으신가요?
강릉에서 친구들과 시작한 작은 커뮤니티 ‘솔방울들’이 있어요.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면 경제활동은 이어갈 수 있지만 사람을 만나 대화하거나 소속감을 느낄 기회는 확실히 적은데요. 그 빈틈을 채우고 싶어 시작한 모임이 바로 ‘솔방울들’이었어요.
함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면서 단순한 성취감을 넘어, 지역과 관계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실험할 수 있었어요. 그 경험이 확장되어 ‘강릉 골목 아트페어’라는 조금 더 구조화된 기획으로 이어지기도 했어요.
저에게 ‘솔방울들’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기획자’라는 층위를 더해준 중요한 경험이에요.

Q.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성장했다’고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요?
예술가라는 정체성에 기획자의 정체성이 더해진 시기였어요. ‘솔방울들’과 ‘강릉 골목 아트페어’를 함께 기획하면서, 단순히 제 그림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경험을 했어요. 덕분에 저의 정체성이 한 겹 더 깊어졌다고 생각해요.
Q. 앞으로 실현하고 싶은 새로운 기획이나 작업이 있나요?
앞으로도 강원도의 자연과 지역을 기반으로 한 예술적 실험을 이어가고 싶어요. ‘대지미술’은 언젠가 꼭 실현하고 싶은 작업이고, ‘강릉 골목 아트페어’는 더 다채롭고 지속 가능한 형태로 발전시키고 싶어요.
최근에는 ‘드립스톤 카페(Dripstone Café)’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강원도 영월의 ‘석회동굴의 종유석’에서 출발한 지역적 뿌리와 상징을 매개로, 커피와 시각예술, 교육과 체험을 아우르는 문화적 허브를 구상하고 있는데요. 맛있고 개성 있는 커피를 제공하면서 시각적 영감과 문화적 다양성을 전하려는 기획이에요.
저에게 ‘드립스톤 카페’는 하나의 ‘대지미술’이자, 지역에서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제안하는 예술적 실험이기도 해요.
“오히려 그 의구심들을 ‘더 나은 삶을 살아내는 방식’으로 지우고 싶었어요.”
언호 작가의 여정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삶의 불확실성을 회피하기보다 실험과 선택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성숙을 쌓아가는데요. 그 과정을 통해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며, 우리에게도 용기를 건네줍니다. 앞으로 이 성숙은 또 다른 형태로 결실을 맺어, 누군가의 삶에도 작은 영양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