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하고서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있나요
'시詩'가 상기시키는 잃어버린 3가지 감각
발전은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더 빠르게 연결되고 더 많은 것을 소비합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자주 공회전하며, 세계를 느끼는 근육은 점점 빠져갑니다. 일상에서 경이로운 순간은 쉽게 발견되지 않고 사람을 만나도 깊이 스며들지 못하며, 무언가에 완전히 빠져드는 경험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내 삶에서 무엇이 둔해졌는지, 무엇이 닫혀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감각의 재회 작업이 필요합니다.
여러 감각 가운데 왜 경외감·일체감·몰입감에 주목해보려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인간이 세계와 연결되는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경외감은 자연과 우주 앞에서 나를 상대화하는 감각입니다. 일체감은 타인을 대상이 아니라 존재로 맞닿는 감각입니다. 몰입감은 자기 내부로 깊이 침잠해 스스로 성찰하는 감각입니다. 자연·타인·자기라는 세 통로가 열려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다’는 감각을 온전히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스스로 무뎌졌다고 느낄 때마다 시를 찾아 읽습니다. 시를 왜 읽어야 하는지부터 막막하게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시는 취향의 장르처럼 보이고, 어려운 비유와 낯선 리듬 때문에 멀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를 읽는 이유는 이해를 더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잠재성을 다시 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설명과 판단, 비교와 속도 속에서 살아갑니다. 시는 그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하고, 감각이 다시 작동할 수 있는 정지 화면을 제공합니다.
1. 경외감 : 세계 속에서 나를 잠시 작게 두기
「별들의 침묵, 데이비드 웨이고너」

한 백인 인류학자가
어느 날 밤 칼라하리 사막에서
부시맨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은 별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자 부시맨들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가 농담을 하고 있거나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고 여기면서.
(중략)
부시맨들은 그를 마치 아픈 사람처럼
천천히 모닥불가로 데려간 뒤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참으로 안된 일이라고, 참으로 유감이라고.
인류학자는 오히려 자신이 더 유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이
드는 능력을 잃어리니 것에 대해.
「별들의 침묵」에서 한 인류학자는 칼라하리 사막의 밤, 부시맨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자신은 별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말이죠. 부시맨들은 그 말을 믿지 못해 웃다가, 이내 그를 ‘아픈 사람’처럼 모닥불가로 데려가 고개를 젓습니다. 이 장면이 낯설게 다가오는 이유는 별이 실제로 노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가 노래할 수 있다고 믿는 감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죠. 누군가에게 세계는 노래하고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침묵일 뿐입니다.
우리는 경외라는 단어가 거대한 대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장엄한 풍경이나 압도적인 규모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러나 이 시는 경외가 대상의 크기가 아니라 나를 작게 두는 태도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별은 그대로인데 듣는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듣는 능력은 귀의 기능이 아니라 감각의 자세입니다. 세계를 이미 다 안다고 여기는 순간, 세계는 침묵합니다. 경외는 미지의 여지를 남겨두는 능력입니다.
제가 이 시를 첫 번째에 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경외가 사라진 자리에는 냉소가 쉽게 자리 잡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기보다 화면을 내려다보고, 밤을 견디기보다 기대어 누워 직사각형의 빛을 켭니다. 세계는 여전히 장엄하지만 우리는 듣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잃어버린 감각은 다시 배울 수 있습니다. 경외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태도를 바꾸는 순간 다시 열리는 감각입니다.
2. 일체감 : 타인을 존재 그 자체로 만나기
「침묵의 소리, 클라크 무스타카스」

존재의 언어로 만나자.
부딪힘과 느낌과 직감으로
나는 그대를 정의하거나 분류할 필요가 없다.
그대를 겉으로만 알고 싶지 않기에.
침묵 속에서 나의 마음은
그대의 아름다움을 비춘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소유의 욕망을 넘어
그대를 만나고 싶은 그 마음
그 마음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허용해 준다.
함께 흘러가거나 홀로 머물거나 자유다.
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대를 느낄 수 있으므로.
「침묵의 소리」는 관계를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익숙한 관습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상대를 이해한다고 말하며 이름표를 붙입니다. MBTI, 취향, 혈액형, 학교, 지역 등으로 분류를 해야 안심합니다. 나와 동류라고 느껴지면 팔짱을 풀지만 나와 다름을 확인한 뒤에는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예의를 지키고 싶어 합니다.
현대인 갖고 있는 고립과 외로움은 연결의 부족이 아니라 존재 접촉의 부족입니다. SNS 알림은 넘치지만 서로를 존재로 만나는 순간은 드뭅니다. 모순적이게도 상대를 정의하는 순간 멀어집니다. 상대와 나 사이에 설명 대신 여백을 남기고, 판단 대신 침묵을 허용하는 순간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일체감은 대화의 양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서 회복되는 감각입니다.
3.몰입감 : 나를 태워서 순간 속으로 뛰어들기
「타오르는 책, 남진우」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한 불노리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르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 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타오르는 책」은 읽는 일이 불이던 시절을 소환합니다. 펼치는 순간 불이 붙고, 읽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입니다.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글자를 삼키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에 재만 남습니다. 이 과장된 이미지가 오히려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몰입이 본래 그런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몰입은 무엇을 얻는 일이 아니라 나를 태우는 일입니다. 읽고 난 뒤에는 이전의 내가 그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몰입의 마지막 경험은 언제인가요? 알림에 끊기고 스크롤에 쪼개지고, 요약과 발췌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삶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몰입은 방해해되기도 합니다.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몰입 없는 삶은 미지근합니다. 타오르지 않는 상태는 안정적이지만 동시에 생동을 잃습니다. 이 시는 우리를 다시 불가에 세웁니다. 시간과 열정을 태웠던 재의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몰입은 과열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증거입니다.
왜 시인지 다시 묻습니다. 시는 가장 압축된 언어로 가장 깊은 감각을 흔드는 장르입니다. 시는 우리에게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반응을 남깁니다. 그래서 시를 읽는 일은 감각을 다시 켜는 작업입니다.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순간, 세계는 다시 커지고 타인은 다시 가까워지며 나는 다시 깊어집니다. 시는 삶을 해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느끼게 하는 장치입니다.
이 글이 선택한 세 감각은 결국 하나로 이어집니다. 경외감은 세계 앞에서 겸손해질 때 되살아나고, 일체감은 타인을 분류하기 전에 허용할 때 스며들며, 몰입감은 시간을 태울 용기를 낼 때 진정 타오릅니다.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효율이라는 명분으로, 안전이라는 습관으로 이 통로를 닫아두었습니다. 시는 그 문을 다시 여는 가장 작은 열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