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편의 영화로 배우는 어른의 첫 마음

반복되는 삶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우리

세 편의 영화로 배우는 어른의 첫 마음
이미지 출처: Unsplash

사람으로 가득찬 출퇴근 길, 가끔 지하철 창에 비친 스스로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주 오래 전 일이 떠오릅니다.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떠들며 지하철을 타던 때, 미래를 상상하며 즐겁기도 슬프기도 했던 때 등. 떠오르는 장면은 여럿이지만 떠오르는 마음은 같습니다. 그때는 누구보다 빨리 어른이 되길 기다렸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어른이 되기를 꿈꿨을 것입니다. 어른이 되는 건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삶의 다음 관문을 통과해, 성숙하고 완성된 사람이 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사소한 오해에 상처 받지 않고, 무엇이든 해내는 그런 사람.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된 지금 스스로를 돌아보면 부끄러울 정도로 미성숙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학 가기 싫어 울던 것처럼 여전히 낯선 사람을 어려워하고, 걱정거리도 통 줄지 않습니다. 익숙한 것보다 낯선 것이 더 많습니다.

어쩌면 삶은 끊임없는 처음을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 흔들림 속에서도 우리를 지탱하는 첫 마음, 어른이 되어도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 첫 마음을 3편의 영화를 통해 만나보고자 합니다.

무대 위가 아니라도 계속될 춤,

프란시스 하

이미지 출처: 영화 <프란시스 하> 스틸컷

27살의 프란시스는 최고의 무용수가 되겠다는 꿈을 꾸지만 '진짜 무용수'는 아닙니다. 뉴욕에 살고 있지만 프란시스를 위한 '나의 집'은 없습니다. 친구와 쉐어하고 있는 작은 집, 몇 년째 이어가고 있는 연습생의 삶이 27살 프란시스를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안정적인 삶과 미래를 준비하는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면 프란시스의 삶은 궤도에서 한참을 뒤처져 있습니다.

오디션만 보면 척척 붙는 어느 영화의 주인공들이 겪는 행운은 프란시스에겐 찾아오지 않습니다. 사소한 다툼으로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같이 꿈을 위해 노력하자고 의기투합했던 룸메이트 소피는 약혼을 위해 프란시스를 떠납니다. 프란시스는 소피와의 아파트에서 차이나타운, 기숙사를 전전하고 공연에도 오르지 못하게 됩니다. 짧은 여행은 프란시스에게 위로가 아닌 상처와 빚만 남깁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프란시스는 28살이 됩니다. 그리고 프란시스는 '취직'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어릴 때 장래희망을 기억하느냐는 글을 언젠가 본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잊어버리고 누군가는 잃어버린 오래된 소망들을 저버리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을 꾸려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와 다른 삶을 산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실패하거나 잘못된 것일까요? 프란시스는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않지만 사무직으로 일하면서도, 안무가로 자신의 춤을 계속합니다. 꼭 무대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초심은 변하지 않는 내가 아니라, 변하는 삶 속에서 나를 지키는 힘일지도 모릅니다.

잊고 지냈던 나,

블루 아워

이미지 출처: 영화 <블루 아워> 스틸컷

성공한 CF 감독이자 다정다감한 남편까지, 커리어부터 삶까지 스나다의 삶은 부족할 것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스나다는 지금의 삶에 깊은 권태와 불만을 느낍니다. 다정한 남편과의 대화는 간단한 용건 외엔 전무하고, 스나다는 동료인 촬영감독과 불륜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스나다를 이루는 모든 것이 사실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애인에게 둘째가 생겼다는 사실을 들은 날, 스나다는 고향에 오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친구 기요우라와 함께 엉겁결에 고향으로 떠나게 됩니다.

스나다는 사실 고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어린시절 스나다는 매번 괴물로부터 도망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괴팍한 성격, 삐걱거리는 가족들을 마주한 묻어두었던 기억이 스나다를 덮칩니다. 미성숙한 자신, 불편함, 죄책감 등... 하지만 기요우라는 스나다와 달리 태연하게 고향에 녹아듭니다.

기요우라 역을 맡은 배우 심은경은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다들 일을 열심히 한다. 성과를 위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간다. 그러다 ‘내가 뭘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와장창 무너져내린다. 그런 상태가 쭉 유지가 되기도하는데, 슬럼프가 바로 그런 상태인 것 같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스나다고, 스나다 같은 모습이 있다고 생각한다1)"고 말했습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억누른 것에 익숙했던 스나다, 성공해도 행복하지 않던 스나다는 고향을 다녀온 후 처음으로 “지금 나는 괜찮지 않다”고 인정합니다. 완벽한 자신이 아닌, 엉망진창인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한 스나다의 얼굴은 되려 편안해보입니다. 잃었던 첫 마음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만드는 특별한 평범함,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이미지 출처: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캡처

어릴 때부터 눈에 띄는 법이 없던 '평범한' 주부 스즈메. 스즈메의 오랜 고민은 바로 '평범함'에 있습니다. 무엇든 잘하고 눈에 띄는 단짝 때문에 발명도 하고, 남자친구의 청혼까지 받아들이지미나 스즈메의 삶은 생각보다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습니다. 장을 보고, 집을 치우고 남편이 아끼는 거북이의 밥을 챙기는 평범한 일상. 스즈메는 우연히 스파이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기묘한 부부에게 "평범해서 좋다"는 이야기와 함께 합격 통보를 받고 스파이가 됩니다. 스파이가 된 스즈메의 첫 번째 임무는 바로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트에서 어떤 물건을 사야 평범하게 보일지, 이불을 어떻게 널어야 할지, 친구를 만날 때는 어디서 만나야 하는지. 스즈메는 그동안 벗고 싶던 '평범함'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동네의 '평범한' 이웃들이 같은 스파이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늘 어중간한 맛의 라멘을 만들던 라멘집 사장이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맛있는 라멘을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가끔은 매일 반복되는 삶이 권태롭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가 벗고 싶어하는 '평범함'에 대해 묻습니다. 매일 같은 하루, 의미없는 시간은 없다고요.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처음의 마음을 배우며 살아갈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삶은 언제나 생각한 것처럼 흘러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거울 속 나는 평범하기만 한 것 같고, 때로는 작은 실패가 모든 것을 앗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 어떤 것도 새롭지 않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매일은 계속됩니다. 서툴고, 흔들리고, 때로는 멈추더라도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힘이 자라납니다. 언젠가 심어두었던 나도 모르는 첫 마음 때문일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잊고 있던 첫 마음은 어떤 모습인가요?

출처

1) 씨네21, '블루 아워' 심은경 - 즐거움이라는 가치(2020.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