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세상의 리더즈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다른 것에 의지해 존재하다.
의존(依存)의 사전적 의미 안에는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린 누군가에게 기대려면 그 대상이 충분히 위대해야 한다고 막연히 상정합니다. 뛰어난 지식과 흔들리지 않는 재력, 상대를 보호해 줄 만한 힘... 적어도 나보다는 나은 위치에 있어야만 안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이러한 공식은 곧잘 빗나갑니다. 위기 상황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우리는 대개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죠. 때문에 아주 평범한, 어쩌면 나만큼이나 위태로울지 모르는, 그런 의외의 존재들에게 기대어 가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소개할 세 편의 작품엔 뛰어난 능력으로 군중을 이끄는 화려한 리더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주변 어딘가에 머무는, 익숙한 인물들이 출연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건네는 서툴고 투박한 온기가 냉랭했던 일상의 온도를 따스하게 지켜낼 때, 우린 비로소 ’진정한 의존의 조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편견이 멈춘 곳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세계
레이몬드 카버 『대성당』
두 눈으로 보는 세상이 과연 전부일까요? 레이몬드 카버(Raymond Carver)의 단편, 『대성당』은 이 흥미로운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화자인 '나'는 아내의 오랜 친구인 로버트를 만나자마자 미묘한 거리감을 느낍니다. 아내와 각별한 사이인 것도 맘에 들지 않는데, 앞도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뇨. 내게 장애란 그저 결핍의 상태이자, 동정의 대상일 뿐입니다. 보는 쪽과 보지 못하는 쪽 사이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믿기 때문입니다.

허나 이 편견은 로버트의 기발한 제안으로 가볍게 무너집니다. 그가 나에게 텔레비전 속 대성당을 ‘설명해 달라’가 아닌 ‘함께 그려보자’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 말이죠. 낯선 부탁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펜을 쥐지만 마음 속엔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합니다. 로버트는 그런 나의 손 위에 곧 자신의 손을 얹습니다. “그려봐. 무슨 소리인지 알겠지. 내가 자네 손을 따라 움직일 거야. 괜찮아.” 두꺼운 종이 위엔 어느새 집처럼 생긴 네모가, 그 다음엔 큰 지붕이, 그 지붕의 양 끝엔 높은 첨탑이 세워집니다.
“이제 눈을 감아보게나.” 로버트의 요구에 홀린 듯 눈을 감는 나. 그렇게 둘은 포개진 두 손으로 함께 대성당의 풍경을 그려갑니다. 이런 나의 행위는 배려나 동정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저 보이는 자로서의 시선과 언어를 잠시 멈추고, 보이지 않는 상대의 감각에 전적으로 의지했을 뿐이죠. 그 덕분에 나는 생애 단 한 번도 없었던 황홀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의 의존은 그저 '돕는' 행위와는 다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타인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환대'에 가깝죠. 그렇게 별 것 아닌 존재라 치부했던 로버트는 나의 지독한 편견을 부수는 가장 강력한 리더로 거듭납니다. 능력의 우열로 평가되던 의존의 조건이 포개진 두 손 끝에서 새롭게 정의된 것입니다.

결핍의 연대가 개척한 생존의 길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의존의 대상이 반드시 고결하고 무결한 존재여야만 할까요.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의 주인공, 론(매튜 매커니히)에게 존경할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거칠고 괴팍한 성격에 매일 유흥에 빠져 지내는, 그야말로 내일이 없는 불나방 같은 남자였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에이즈 감염 사실과 앞으로 살 날이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영화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후의 론의 행보를 치열하게 뒤쫓습니다. 그는 절망하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닌, 살기 위한 온갖 정보들을 맹렬히 수집하기 시작하죠. 그러던 중 에이즈 치료에 유의미한 성과가 있지만 국가의 승인을 받지 못해 금지된 약물들을 접하게 되고, 이를 직접 밀수해 자신과 같은 처지의 환우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엄연한 불법 행위였지만, 론도 환자들도 이젠 거리낄 게 없었습니다. 정부와 의료 기관은 제도에 얽매어 적극적인 조치를 해주지 못했으니까요.
특히 론이 과거에 극도로 혐오하던 트랜스젠더, 레이언(자레드 레토)의 도움을 받아 에이즈 환우들의 커뮤니티인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개척해 가는 모습은 앞서 언급한 의존의 본질을 관통합니다. 나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아니 나만큼이나 병들고 소외된 존재들이 오히려 생존의 원동력이 되어준 셈이니까요. 물론 서로에게 완벽한 구원자는 못되지만, 오히려 그런 각자의 불완전함이 의존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합니다. 나를 지켜줄 수 있는가 이전에 나와 함께 이 시간을 견딜 수 있는가. 이제 그들은 새하얀 침상에서 홀로 죽어가는 대신, 서로의 삶을 공유함으로써 생의 시간을 조금씩 연장해 갑니다.

죽음의 바다에 뛰어든 평범한 이웃들
다큐멘터리, <화이트 헬멧>
시리아 내전의 참혹한 현장. 폭격이 일상이 된 도시엔 ’화이트 헬멧‘이라 불리는 민간 방위대가 있습니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건물 잔해에 매몰된 시민들을 구출하는 것. 시야를 뒤덮은 뿌연 먼지와 귀를 찢을듯한 폭발음, 공중에서 떨어지는 폭탄들. 한시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한 명이라도 더 구해내기 위해 서슴없이 몸을 던집니다.

놀라운 점은 바로 화이트 헬멧 구성원들의 정체입니다. 그들은 전문적인 구조 훈련을 받은 이들도, 전시 상황에 익숙한 이들도 아닙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장에서 빵을 굽던 제빵사,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던 재단사 등 각자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보통의 시민들이었죠. 하지만 이제 그들은 하얀 헬멧 하나에 의지해 위험한 현장 속으로 뛰어듭니다.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진영과는 무관하게, 한 생명을 구하는 건 곧 인류 전체를 살리는 일이라는 신념으로,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가죠. 국가 시스템은 마비되고, 신마저도 외면하는 것만 같은 공포의 순간, 매몰된 이들의 마지막 희망은 결국 평범한 이웃의 손이었습니다.

우린 여기서, 의존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를 목격합니다. 신의 이름으로 사살된 이들을 신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대체 누구에게 평화를 기원해야 할까요. 저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린 것이 어쩌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 또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는 현실은 화이트 헬멧을 움직이는 유일한 이유가 됩니다.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는 지독한 공감, 또한 우리 모두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자각이 의존의 조건이 된 것이죠.
2013년 설립된 화이트 헬멧은 지금까지 5만 8000명 이상의 시민을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엔 화이트 헬멧 130명의 희생 역시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수치엔 단순한 수의 셈을 넘어서는 숭고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비극 속에서,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저항’을 보여준 것입니다.

나무야 네게 기댄다
오늘도 너무 많은 곳을 헤맸고
많은 이들 사이를 지나왔으나
기댈 사람 없었다
네 그림자에 몸을 숨기게 해 다오
네 뒤에 잠시만 등을 기대게 해 다오
_도종환, 『나무에 기대어』중
이 시를 읽고 있는 당신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는 누구인가요? 힘들고 지친 당신 곁을 묵묵히 지키던, 딱히 대단한 능력도 그럴듯한 해결책도 없었지만, 마치 저 나무처럼, 잠시 등을 기대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던, 덕분에 무사히 하루를 마칠 수 있었던, 그 사람.
우리는 이제껏 의존을 ‘약자’의 증거로, 혹은 ‘강자’에게만 허락된 특권으로 오해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젠 알 것 같습니다. 결국 삶이란 각자의 머리를 오롯이 맞대고 선, 기울어진 지붕과 같다는 것을. 그래서 어느 한 쪽이 쓰러지면 나머지 한 쪽도 반드시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서로의 기울어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지만 비로소 우린 단단한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