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살았던 작가들과 런던 거리 헤매기

흥망성쇠를 품은 도시에서 만난 위대한 작가들의 시선들

런던에 살았던 작가들과 런던 거리 헤매기
Photo by Luke Stackpoole / Unsplash

오랜 기간 한 나라의 수도였던 도시는 무수한 시간의 층위를 품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필자가 여행으로 다녀온 영국의 수도인 런던이 그렇습니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대영제국’으로 불리던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 세기 동안 세계 역사를 만들어온 나라죠. 찬란했던 시절의 화려한 유산부터 반드시 숨기고 싶은 어두운 그늘까지, 오랜 시간에 걸친 세계적인 도시의 모습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어 무척 다채로운 여행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유명 관광지 너머로 런던의 과거 구석구석까지 만나보기 위해 여러 책을 챙겼습니다. 런던에 살면서, 가장 사소한 요소를 바탕으로 위대한 통찰을 보여준 작가들의 책이었습니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하늘을 보는 작가들이죠. 이들의 시선을 가이드 삼아 런던이라는 도시를 샅샅이 훑어보았는데요. 비단 런던 여행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오늘 하루를 보낸 나의 세상을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방식을 가르쳐주는 보석 같은 시선들이 담겨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탐정 셜록 홈즈가 살았던 런던

런던에 있는 셜록홈즈 박물관,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런던 베이커 스트릿을 찾아가 221B라고 적힌 건물 문을 두드리면 세계 최고의 명탐정 셜록 홈즈가 독자들을 맞이합니다. 작가 아서 코난 도일 경이 셜록 홈즈 시리즈를 집필했을 때만 해도 베이커 스트리트 221B는 실존하는 주소가 아니었지만, 셜록 홈즈 시리즈가 인기를 얻으면서 실제 베이커 스트리트의 주소가 확장되었죠. 221B는 아니지만 같은 블록의 다른 곳에 셜록 홈즈 박물관이 설립되어 전 세계 홈즈 팬들을 환영해 주고 있습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는 유명한 추리 소설 그 이상의 문학적 가치를 지닌 작품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셜록 홈즈라는 탐정의 매력을 간략히 소개할 수밖에 없는데요. 홈즈는 범죄 현장을 누비며 범인을 찾는 능력도 탁월한 탐정이지만, 사무실에 앉아 고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사람의 직업, 사는 곳, 의뢰한 사건 전체를 꿰뚫어 보는 추리력이 뛰어납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 흔적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읽어버리는 마법같은 추리에 소설 속 홈즈의 조수인 왓슨도, 고객도, 독자인 우리도 모두 매료되죠.

<빨간 머리 연맹>의 삽화.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셜록 홈즈. 이미지 출처: bakerstreet.fandom

바지에 묻은 담뱃재, 얼굴에 자리 잡은 특정한 자국, 양피지에 사용한 잉크 얼룩처럼 아무것도 아닌 단서를 토대로 홈즈가 펼쳐 보이는 마법 같은 추리에는 19세기 런던 일상이 녹아 있습니다. 담배를 종류별로 즐길 만큼 부유한 고급 주거 단지에서 찾아온 고객 에피소드와 타자기 타이핑으로 근근하게 살아가는 노동자에게 얽힌 에피소드가 동시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돌연 재산을 물려받게 된 여성을 노리는 사기꾼들이 득실거리는 모습이나 당시 영국이 식민 지배하던 나라에서 도피했다가 복수를 당하는 범죄자 이야기도 흥미진진하죠. 마차와 자동차가 공존하는 시내 풍경, 곳곳에서 벌어지는 대공사와 공장 때문에 먼지가 매캐한 도시의 모습이 홈즈의 사건 모음집을 통해 선연히 그려집니다. 기발한 발상들 너머로 19세기 런던을 만나보세요. 제국주의의 폐해, 빈부 격차의 비참함, 부강해진 국가의 부를 즐기는 계층의 생활, 마약 문제, 도시 계획과 재개발 모습까지 당시 런던을 한눈에 엿볼 수 있는 인문학적 가치가 가득한 작품입니다. 다양한 셜록 홈즈 에피소드 중 런던 풍경을 즐길 수 있으면서도 줄거리가 흥미진진한 작품을 아래와 같이 짧게 추천합니다.

추천 작품

  • 『빨간 머리 연맹』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소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빨간 머리’가 곧 사건의 발단이자 결말이 되는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런던 사업가들의 분위기를 살짝 엿볼 수 있어요.

  • 『입술 뒤틀린 사나이』

당시 런던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습니다. 독자들이 사건을 직접 추리해 볼 수 있도록 작품이 설계되어 있어요.

찰스 디킨스의 런던 밤 산책

작가 찰스 디킨스.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찰스 디킨스는 영국의 유명 소설가, 학자이자 저널리스트였습니다. 소설과 에세이, 각종 비평으로 우리가 ‘영국’ 하면 쉽게 떠올리는 풍경을 만들어낸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생전에도 전례 없는 인기를 누렸고 사후에도 문학 천재로 인정받을 만큼 디킨스의 작품은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 』, 『올리버 트위스트』, 『두 도시 이야기』, 『위대한 유산』… 어릴 적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본 책들 아닌가요?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크리스마스 캐럴>의 삽화. 이미지 출처: 존 리지

주로 어린아이들이 등장하는 책을 썼던 디킨스는 아동의 권리와 교육, 사회 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저널리스트였습니다. 불면증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런던 밤 산책에서 그가 주목하는 풍경 또한 가난하고 외로운 어린아이들의 모습이었고, 적막한 거리를 떠돌다 회고하는 장면도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여행을 즐기고,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기 좋아하는 성향이었는데요. 부와 안락함을 얻은 말년에도 쉬지 않고 여행하며 한가롭게 도시를 거니는 산책자로 살았습니다. 밤새 노숙자처럼 떠돌며 빅토리아 시대 화려한 런던 뒷골목을 관찰하며 시대에 대한 통찰을 얻었죠. 그는 자신이 겪은 런던의 밤을 상세히 기록해 당시 사회에 대해 깊고 폭넓은 시사적 이슈를 제시합니다.

당시 굴뚝 청소부로 일했던 아이들의 모습. 이미지 출처: etinkerbell.wordpress.com)

우리는 디킨스가 쓴 에세이들로 19세기 런던 사회의 갖가지 병폐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이 받은 동냥을 빼앗으려 달려드는 부랑아들, 하루 종일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들, 집에서 삯일하는 사람들, 사망 선고를 받고도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 그의 산문들을 통해, 범죄와 경찰 제도에 관심이 많아 실제 순경들과 야경을 돌고 사건을 기록하며 보고서를 쓰기도 했던 저널리스트로서의 디킨스를 만날 수 있죠.

찰스 디킨스가 살았던 곳. 고급 주거 거리에 위치했던 그의 집을 개조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미지출처: 위키피디

실제로 디킨스는 주간지 <일상적인 말들(Household Words)>을 창간해 빈곤한 노동자 계층부터 사회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중산층까지 독자로 상정했습니다.

그는 주간지를 발간하며 “우리는 독자들의 일상적인 애정 속에 살아가고, 일상적인 생각 속에 들어가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남녀, 연령, 생활 형편을 불문하고 얼굴은 몰라도 수천 명의 독자들과 친구, 동료가 되기를 원하며, 여름철 새벽과도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혼란스러운 세상에 대해 알려주고 선이든 악이든 사회적으로 놀라운 기삿거리를 전달하되… (중략) 한낱 공리주의 정신은 거부하고, 정신이 암울한 현실에 단단히 갇히지 않게 감시”하겠다고 말합니다. 그 포부대로 디킨스는 런던의 빛과 그늘을 아주 선명하게 살펴 독자들에게 전달했고요. 그가 직접 걷고 주목하며 얻은 통찰을 토대로 런던 골목을 헤매 보았습니다. 화려한 쇼핑 거리와 외지인이 북적이는 유명 관광지 뒤에 깃든 대도시의 그늘이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희미하게 존재하는 계급과 차별, 저마다의 방식으로 역동하고 있는 투쟁, 치열한 노력과 무력한 체념, 팽팽한 자부심까지 모두 어우러진 런던의 공기가 한데 섞여 스며들어왔습니다.

추천 작품

  • 『밤 산책』

위에서 소개한 작품. 국민 작가 디킨스가 직접 다니며 찾은 런던의 양면을 보여주는 산문집입니다.

  • 『위대한 유산』

갑자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소년이 겪는 대도시 이야기. 소년의 성장 서사에서 혼동과 무질서, 허영과 범죄가 가득한 당대 영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런던 거리 헤매기

버지니아 울프. 이미지 출처: The Ethics Centre
“다행스럽게도 런던은 위인들의 저택으로 채워지고 있다. 국가를 위해 위인들의 집을 사들여 그들이 앉았던 의자나 사용한 컵, 그들의 우산과 서랍장을 온전히 보존해 온 덕분이다. 우리가 디킨스나 존슨, 칼라일과 키츠의 집을 찾아가는 것은 경박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다. 그들의 집에서 그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누구보다도 작가들은 자기 소유물에 더욱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는 듯하다. 예술적 취향은 없을지 모르나 그들은 훨씬 희귀하고 흥미로운 재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자신에게 적합한 집에 거처하는 능력, 탁자와 의자, 커튼과 카펫을 자신의 이미지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 버지니아 울프, <위인들의 집>

런던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흔적을 찾는 마음을 버지니아 울프가 쓴 책에서 가장 정확히 짚어내고 있어 놀랐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런던 블룸즈버리에 거주하면서 런던이라는 공간과 20세기라는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모더니즘 문학에서 빛을 발한 작가입니다. 필자가 런던 거리를 돌아다니며 자주 꺼내 읽은 책이 바로 버지니아 울프의 산문집이었는데요. 버지니아 울프가 실제 거주했고 당대 런던 지성인들이 모여들었던 블룸즈버리 일대에서 책을 읽는 동안, 조금 차갑고 뻣뻣하게 느껴지기만 했던 버지니아 울프와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블룸즈버리 바로 옆, 대영박물관. 이미지 출처: Imperial London
런던 컬리지도 자리하고 있는 블룸즈버리. 여전히 지식인 집합지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블룸즈버리는 런던 하면 떠올리는 대영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지역입니다. 오늘날의 이미지로 치면 대학, 출판, 예술가가 모여드는 지적 허브에 가까운 곳인데요. 여러 출판사와 학술 기관이 모여있어 지식인의 집합지였던 이곳은 단순 주거지가 아니라 정신적, 예술적 공동체의 실험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울프는 블룸즈버리 그룹을 구성해 20세기 전반 영국의 작가, 철학자, 예술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거주하거나 공부하면서 나눈 지적 토론을 통해 버지니아 울프는 지적, 사회적 자유를 맛보았죠. 버지니아 울프 하면 곧장 떠올리는 대표작『자기만의 방』에서 이야기한 “여성에게는 돈과 자기 방이 필요하다”라는 주장도 사실상 블룸즈버리에서의 생활 경험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블룸즈버리에 위치한 서점. 이미지 출처: Imperial London
블룸즈버리 주거단지 모습.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실제 방문해 본 블룸즈버리는 무척 차분한 동네였습니다. 조지 왕조 시대 양식부터 브루탈리즘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거 단지들이 혼합되어 있으면서도 동네 분위기가 혼란스럽지 않았죠. 그 동네 주변에 대체로 학교, 박물관, 의료 기관, 예술 센터가 자리하고 있어 오가는 사람들 또한 비교적 차분하기 때문일 겁니다.

런던 타비스톡 스퀘어에 있는 버지니아울프의 동상. 이미지 출처: LONDON REMEMBERS
타비스톡 스퀘어에는 간디의 동상도 위치해 있다. 녹음이 우거진 작은 공원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Imperial London

녹음이 우거진 거리를 따라 버지니아 울프의 흉상이 있는 타비스톡 스퀘어를 찾아갔습니다. 그녀가 추구하는 진취적인 사유가 빚어낸 런던 풍경을 감상하러 책을 꼭 쥐고서요. 울프의 주특기인 시공간의 한계를 지우는 문학 사조처럼, 그녀가 그려내는 한밤중의 런던, 문학 여행자, 시민들이 키우는 강아지, 거리 악사의 모습이 21세기 런던 여행자 앞으로 불쑥 다가왔습니다.

추천 작품

  • 『런던 거리 헤매기』

버지니아 울프의 알짜배기 에세이를 모은 책. 이름 그대로 런던 거리에 대한 묘사와 울프의 감정이 유쾌하고도 섬세하게 어우러져 있어요.

  • 『댈러웨이 부인』

런던에 거주하는 50대 상류층 여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20세기 런던 풍경을 세밀하게 읽어볼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책에서 수없이 묘사되고 거론되는 장소를 실제로 다녀오니 무척 즐거웠습니다. 문득 깨달은 것은, 런던에 살았던 작가들에게 런던은 곧 일상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레는 여행지의 공기와 풍경을 샅샅이 살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지겨울 정도로 똑같은 일상의 권태를 깨뜨리고 의미 있는 발견을 해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죠. 위대한 작가들이 위대하다는 칭찬을 받는 것은 반복이라는 족쇄를 깨뜨린 데서 오는 것 아닐지 생각하게 됩니다. 도파민 가득한 여행에서만 힌트를 얻으려 했던 스스로가 조금 부끄러워지면서도 매일의 일상을 여행하듯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채우게 되었네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도 그들의 시선에서 실마리를 얻어보려 합니다. 삶을 샅샅이 조망하고, 애호하는 분야를 끈질기게 붙들어 일상으로 가져오는 능력 같은 것들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