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관계를 재료로 삼을 때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미학으로 만나는 작품 3선

예술이 관계를 재료로 삼을 때
Rirkrit Tiravanija <untitled 1990 (pad thai)>, Paula Allen Gallery, New York, 1990. 사진: Mary Manning

종종 아름다운 풍경을 보거나 친구와 깊이 있는 이야기를 했을 때, 이 순간이야말로 예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거울 같은 못 위로 햇빛을 받은 벚나무들이 비치는 장면을 봤을 때가 그랬죠. 자연과 자연을 보고 감각하는 나, 이 둘의 만남으로 발생하는 순간을 동시에 알아차렸을 때 어떤 장이 형성됩니다. 아주 잠시 열렸다 곧 사라지는 관계의 장이죠.

이러한 관계의 장은 작품 속에서 정밀하게 배치되어 새로운 관계 맺기를 제공하고, 새로운 순간을 발생시킵니다. 어떤 예술가들은 고향의 전통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고, 폐쇄된 박물관에서 기묘한 즉흥 연극을 만들고, 실제로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작품을 선보이기도 하죠.

예술은 이제 우리가 밥을 먹고, 사회적 맥락 안에서 생활하고, 또 감각하는 삶 자체에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미학을 대표하는 3 명의 예술가와 작품을 소개합니다.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미학

Nicolas Bourriaud Bourriaud at Bernhard Leitner’s Le Cylindre Sonore (1987), Paris, 2024. 사진: Nicole Maria Winkler

1990년대 프랑스 비평가이자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접촉과 대화, 머무름과 우연한 만남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흐름을 '관계미학(Esthétique relationnelle)'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의 관계를 포함하는 개념이죠.

관계미학에서 예술 작품은 벽에 걸리거나 좌대 위에 놓이는 완결된 사물이 아닙니다. 작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무언가를 함께 경험하고, 예기치 못한 대화가 오가는 그 순간에 비로소 형태를 갖춥니다. 지금부터 소개할 세 작가는 각각 음식, 의식(ceremony), 대화라는 서로 다른 재료로 관계의 장을 만들어냅니다. 그 장 안에서 관객은 더 이상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을 완성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리크릿 티라바니자, ⟨untitled 1990 (Pad Thai)⟩

Rirkrit Tiravanija, <untitled 1990 (pad thai)>, Paula Allen Gallery, New York, 1990. Courtesy the Rirkrit Tiravanija Archive.

1990년, 뉴욕 폴라 앨런 갤러리(Paula Allen Gallery)의 프로젝트 스페이스. 태국 출신 작가 리크릿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는 전시장 안에 이동식 주방을 들여놓고 관객에게 직접 팟타이를 만들어 나눠줬습니다. 팔리는 작품도, 걸린 그림도 없었습니다. 그저 타국의 전통 음식을 만들고, 먹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을 뿐이죠.

Rirkrit Tiravanija <untitled 1990 (pad thai)>, Paula Allen Gallery, New York, 1990. 사진: Mary Manning

작품이 걸린 화이트 큐브는 일시적이지만 공동체의 시공간을 경유합니다. 관객들은 감상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직접 참여하죠. 전시장이라는 격식을 상징하던 문화 공간에서 누군가와 밥을 나눠 먹는 경험은 예술이 사물이 아니라 상황이자 관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작품의 의미보다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함께 하고 있나'의 의미, 즉 나는 지금 무엇에 관계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죠.

Rirkrit Tiravanija <untitled 1990 (pad thai)>, Paula Allen Gallery, New York, 1990. 사진: Mary Manning

티라바니자는 예술 오브제의 신성함을 둘러싼 사회적 규범과 태도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자신이 '상황(situation)'이라 부르는 작업들을 통해, 태국의 요리 문화와 재료를 예술의 영역으로 계속 끌어들이죠. 그에 따르면 이 일련의 작업들은 부엌과 요리를 기반으로 삼아, 삶과 살아감에 대한 서구적 태도와 문화적 미학에 균열을 가하는 일입니다. 함께 요리하고 함께 먹는 공동의 행위 속에서 물리적이거나 때로는 상상으로 존재하던 경계가 허물어지기를 기대하며 베니스 비엔날레, MoMA PS1에서 재연되기도 했습니다.

피에르 위그, ⟨The Host and the Cloud⟩

Pierre Huyghe, <The Host and the Cloud,> 2010 Courtesy of Marian Goodman Gallery, NY & Paris

파리 외곽, 150년 된 유원지 부지 끝자락에 문을 닫은 국립민속예술전통박물관(Musée national des Arts et Traditions populaires)이 있습니다. 1937년에 개관해 19세기부터 1960년대까지 프랑스 전통 사회와 공예 문화를 담은 방대한 소장품을 자랑하던 이 박물관은 2005년에 문을 닫았죠. 2010년,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는 이 텅 빈 공간을 기묘한 연극의 무대로 선택했습니다.

Pierre Huyghe, <The Host and the Cloud,> 2010 Courtesy of Marian Goodman Gallery, NY & Paris

위그는 약 오십 명의 참여자를 모아, 핼러윈·발렌타인데이·노동절이라는 매년 반복되는 세 번의 상징적인 날에 여러 상황들을 실행합니다. 참여자들은 대본에 따라 설계된 여러 방면과 수많은 가능성들이 열린 조건 속에 노출되었습니다. 즉흥적인 사건들이 돌발적으로 발생하기도 하면서 상황은 계속해서 변형되어 갔죠.

박물관의 빈 전시실, 계단, 지하 공간 곳곳에서는 대관식, 재판, 밀교 의식, 최면, 런웨이 쇼 등 사회 속의 다양한 공동체적인 의식들이 진행되었습니다. 참여자들은 얼굴을 LED 마스크로 가린 채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을 하기도, 순간순간 달라지는 변화의 국면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Pierre Huyghe, <The Host and the Cloud,> 2010 Courtesy of Marian Goodman Gallery, NY & Paris

<The Host and the Cloud>는 일종의 분리의 의식입니다. 주체와 환경을 구조화하던관계와 위계가 절단되고, 참여자들은 연기와 경험, 관람과 참여 사이를 부유합니다. 위그에게 이 작품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온전한 실체가 없는 주체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현실적이고 관념적인 관계들을 혼란스럽고 과잉된 실험의 형태로 보여준 것이죠.


티노 세갈, ⟨This Progress⟩

Tino Sehgal, <This Prgress>, 2010 Courtesy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201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이 완전히 비워졌습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설계한 상징적인 나선형 통로만이 남아있었죠. 통로 입구에서 한 아이가 다가와 묻습니다. "진보란 무엇인가요?(What is progress?)"

관객은 아이의 질문에 대답하며 나선형 통로를 오릅니다. 대화 상대는 십 대, 청년, 노인으로 차례로 바뀝니다. 각 연령대마다 약 60명의 훈련된 '해석자(interpreter)'가 고용되었죠. 관객이 한 퍼포머에서 다음 퍼포머로 넘어가는 동안 공간적이고 시간적이고 철학적이기도 한 진보에 대한 대화가 진행됩니다. 걸어 올라가는 행위 자체, 아이에서 노인으로 이어지는 대화 상대의 변화도 진보를 상징하죠.

Tino Sehgal, <This Prgress>, 2010 Courtesy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미술관과 갤러리 환경의 전통적인 맥락에 저항하는 티노 세갈은 이 작업에 어떤 물질적 기록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사진도, 카탈로그도, 심지어 판매 계약서도 구두로만 이루어집니다. 거래는 변호사와 공증인의 입회 하에 작품과 가격을 말로 설명되었고, 향후 일체의 기록 금지 조항까지 포함되었죠. 그럼에도 작품은 미술관 운영 시간 동안 연속적으로 시연되고, 판매될 수 있다는 예술 작품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습니다.

관객은 끊임없이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연출인지 분별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작품의 구조 바깥으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관객의 모든 행동이 이미 작품의 논리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죠. 단순히 관객이 작가와 함께 예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맥락 안에서 티노 세갈의 작품에 참여하러 온 사람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수행하고,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관계미학은 예술이 미술관이나 갤러리 안에서 사물로만 존재하지 않는 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예술은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낯선 상황 속에 던져진 하루 일 수도 있고, 낯선 사람과 주고 받은 짧은 대화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수많은 관계들로 점철되어 있지만, 사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이처럼 지금 이 순간을 설명하는 관계들 아닐까요. 그 순간들은 잘 포착되지도, 기록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설명하는 보다 풍부한 관계들을 기념하는 하루를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예술은 전시가 열리는 특정 공간이 아니라, 이미 삶 속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