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잡하고 문란한 돌봄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할 끊임 없이 확장하는 돌봄의 윤리

난잡하고 문란한 돌봄을 위하여
이미지 출처: IMDb

돌봄의 정의는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일’이다. 타인의 삶에 들어가 그의 일상을 목격하고, 쓸고 닦고 가꾸는 일이다. 돌봄은 흔히 사랑과 희생의 언어로 말해진다. 그것은 가족 안에서 당연하게 이루어져야 할 의무이자, 자립적인 개인이 더 약한 타인을 도와주는 일방적인 관계로 상상된다. 그러나 가족의 울타리 안의 실제 풍경은 어떠한가. 육아를 위해 직장을 떠난 엄마의 시간, 양육비를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는 맞벌이 부부의 저녁, 집에서 감당할 수 없게 된 부모를 요양시설에 맡기며 느끼는 죄책감. 이 장면은 모두 개인의 선택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돌봄이 가족에게 전담되는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떠밀리게 되는 결정들이다. 가족 안의 돌봄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의무가 되지만, 사회적인 관계망이 결여된 상황에서 그 부담과 소진은 개인의 삶을 잠식한다. 

만약 그 돌봄의 책임을 모두와 나눠가진다면 어떻게 될까. 돌봄을 특정한 관계와 자격에 묶어두는 대신, 그 경계를 무한히 확장해보는 것이다. 2017년에 시작된 영국의 연구단체 ‘더 케어 콜렉티브’는 저서 『돌봄선언 』에서 ‘난잡한 돌봄’을 제안하며, 사회구조적인 무관심을 딛고 우리 사회 전체가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며 차별 없이 돌봄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글은 ‘난잡한 돌봄’의 윤리를 바탕으로, ‘정숙한’ 돌봄의 규범을 해체하고, 우리가 이미 서로에게 깊이 얽혀 있는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돌봄의 정치적 가능성을 사유하고자 한다. 

난잡하고도 문란한 돌봄: 경계 없는 돌봄의 윤리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더 케어 콜렉티브는 ‘난잡한 돌봄(promiscuous care)’을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가장 먼 관계에 이르기까지 돌봄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증식해가는 윤리 원칙”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난잡하다’는 단어는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사회가 승인하는 ‘정숙한’ 관계와 그렇지 못한 ‘문란한’ 관계를 나누는 이 구도는, 이성애 핵가족과 같은 규범적인 친밀성 밖의 관계를 위험하고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어왔다.

게일 루빈(Gayle Rubin)의 ‘성 위계’ 이론이 보여주듯, 사회는 특정한 성적 관계는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승인하는 한편, 그 바깥에 놓인 관계들은 일탈로 분류해왔다. 결혼한 이성애 커플의 성은 보호받는 반면, 폴리아모리(다자 간 연애), 동성 간의 섹스, 비규범적인 친밀성은 불안정하고 위험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위계는 돌봄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사회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상정하는 돌봄의 형태는 가족 내부에서 완결되는 돌봄이다. 부모, 특히 어머니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아이를 길러야 하고, 성인이 된 자식은 효심으로 노쇠한 부모를 돌보아야 한다는 도덕적 요구가 자연스러운 질서처럼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돌봄은 사랑의 언어로 미화되며, 개인의 도덕성과 가족의 책임으로 환원된다. 

이미지 출처: 게일 루빈, 『일탈』, 305쪽

이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돌봄이 공적 책임에서 밀려나 사적 영역으로 축소된 결과이기도 하다. 가족 안에서 돌봄이 감당되지 않을 경우, 그 공백은 시장을 통해 메워진다. 돌봄은 요양 서비스, 가사 노동, 보육 상품 등 구매 가능한 서비스로 분절되고, 돌봄의 실패는 구조적 문제라기보다 개인과 가족의 문제로 취급된다. 더 케어 콜렉티브가 지적하듯, “오로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족만을 돌보도록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자기 것 돌보기’의 편집증적 형태”를 낳으며, 이러한 태도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정서로 이어진다. ‘내’ 일, ‘나의’ 가족, ‘나의’ 나라가 우선시될 때, 그 경계 바깥에 위치한 세계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영역으로 쉽게 탈락된다. 

‘난잡한 돌봄’은 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의 돌봄 규범을 전복한다. 그것은 돌봄을 가족으로 한정된 도덕적 의무로 묶어두는 대신, 관계의 범주 자체를 확장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다. 혈연과 혼인, 동거 여부를 기준으로 돌봄의 자격을 가르는 대신, 다양한 형태의 삶과 친밀성을 돌봄의 장으로 끌어들인다. 동시에 난잡한 돌봄은 단순히 돌봄의 대상을 넓히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는 돌봄의 관계를 구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많이 증식시키려는 윤리적 태도다.

난잡(亂 어지러울 난, 雜 섞일 잡)’의 한자를 풀어보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결국 난잡하다는 것은 특정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던 배제와 위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어질러진 방에서는 무엇이 더 중요하고 소중한지 구별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게 서로의 삶이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난잡한 돌봄은 어지러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누가 돌볼 가치가 있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가르는 기준 자체를 폐기한다. 그것은 돌봄을 깨끗하게 정돈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돌봄이 지닌 불편함과 복잡함을 포함한 채 다시 사유하려는 움직임이다.

감염, 오염, 그리고 퀴어한 돌봄

이미지 출처: Tracey Litt, 왼쪽부터 Douglas Crimp, Allan Robinson, Rand Snyder.

더 케어 콜렉티브의 ‘난잡한 돌봄’ 윤리는 1980~90년대 에이즈 위기 당시 게이 인권 활동가였던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의 에세이 『 전염병 중에 난잡할 수 있는 방법 How to Have Promiscuity in an Epidemic 』에서 영감을 받았다. 크림프가 활동하던 에이즈 위기와 『돌봄선언 』이 집필된 코로나 팬데믹 시기는 모두 감염병이 인간 사회의 취약한 연결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순간이었다. 감염병은 우리가 철저히 분리된 개인이 아니라, 서로의 숨과 체액,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얽혀 있는 존재임을 폭로한다. 

감염은 언제나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물리적이고 위생적인 더러움인 동시에, 도덕적 오염의 은유로 작동해왔다. 에이즈 위기 당시 ‘퀴어함’, ‘문란함’, ‘질병’은 하나의 이미지로 겹쳐졌고, 감염의 책임은 구조가 아니라 특정 집단의 삶의 방식에 전가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퀴어 커뮤니티는 다른 형태의 돌봄을 실천했다. 혈연도, 제도적 가족도 아닌 관계들이 서로를 간호하고, 애도하고, 살아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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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위기 당시 미국 할렘가의 흑인과 라틴계 퀴어 커뮤니티와 볼룸 문화를 그린 드라마 〈포즈 Pose〉는, 질병의 그림자와 죽음의 공포, 사회의 배척과 혐오 한가운데서 형성된 돌봄의 공동체를 보여준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원가족에서 쫓겨나 서로를 선택한 이들은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가족 공동체를 이룬다. 이 ‘하우스’들은 화목과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치졸한 싸움과 치열한 갈등을 거듭하면서도, 서로의 병든 몸과 쇠약해진 신체, 끈질긴 가난, 사회의 극심한 혐오로 인한 상처, 반복되는 상실을 끌어안는 돌봄을 실천한다. 바로 그 난잡함과 취약함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 속에서, 퀴어 커뮤니티는 기존의 가족 규범이 제공하지 못했던 생존의 토대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난잡함은 무책임함이 아니라 저항의 형식이 된다. 배타성을 통해서만 친밀함을 증명하려는 전통적인 사랑과 돌봄의 규범을 거부하고, 그 규범이 만들어낸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한 비판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난잡함이 가진 저항의 힘은 돌봄의 윤리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난잡한 돌봄은 감염과 오염을 표백하려 하지 않고, 이미 얽혀 있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난잡한 돌봄은 무분별하거나 방임적인 돌봄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정직한 돌봄이며, 그 정직함을 통해 돌봄의 범위를 끝없이 확장하려는 시도다.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난잡한 돌봄

이미지 출처: IDMb

『돌봄선언 』은 “돌보는 친족의 개념을 최대한 확장하는 것은 전장에서 군의관이 돌봄의 의무를 부상당한 적군에게까지 확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 비유는 돌봄이 더 이상 도덕적 호의나 개인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며, 이미 얽혀 있는 세계 안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책임임을 드러낸다. 난잡한 돌봄은 누가 ‘우리 편’인가를 가르는 기준을 흐트러뜨리며, 돌봄의 경계를 가정 바깥으로, 지역 공동체와 국가, 환경과 지구 전체로 확장한다. 불과 몇년 전, 팬데믹은 이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누군가의 건강은 곧 타인의 안전과 직결되었고, 한 사람의 취약함은 공동체 전체의 조건이 되었다.

사실 우리는 무수한 난잡한 돌봄의 손길 속에서 살아 왔다. 부모가 바쁜 집의 아이를 챙기던 동네 어른들, 자가격리된 이웃의 현관 앞에 익명으로 놓인 식료품 봉지, 방역 현장과 쉼터를 지키던 자원봉사자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반짝이는 응원봉, 먼 지역의 재난과 학살 앞에서 몸과 시간을 내어 연대에 나선 사람들. ‘내 가족’, ‘내 나라’, ‘내 삶’ 바깥의 세계마저 쓸고 닦는 모든 실천들 속에서.  

그러나 이는 개인의 선의만으로 지속될 수 없다. 돌봄이 사회의 최전방 문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돌봄선언 』이 말하듯 “돌봄을 삶의 모든 수준에서 우선시하며 중심에 놓고, 공동체와 지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돌봄을 공동의 책임으로 이해하는 사회적 이상”은 개인의 발전만을 외치는 신자유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돌봄을 시장의 효율이나 가족의 의무에 맡기지 않고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와야 하는 이유다. 진정으로 돌보는 정치를 구상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존과 번영이 언제나 타인에게, 그리고 낯선 존재들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난잡한 돌봄은 이러한 상호의존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불안, 부담, 불편함을 제거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개인의 몫으로 떠넘기지 않으려는 윤리다. 그리고 그 윤리를 사회적 책임으로 받아들일 때, 돌봄은 비로소 생존의 토대이자 정치의 핵심이 된다. 


더글러스 크림프는 ‘우리의 난잡함이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우려에 반박하며, “사실은 우리의 난잡함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선언은 오히려 예언에 더 가깝다. 국경의 성벽이 높아지고, 전쟁과 폭력이 끊이지 않으며, 사회적 안전망이 점점 사라지는, 이 불타고 병들어가는 행성에서, 우리가 서로를 ‘난잡하고 문란하게’ 돌보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의 미래가 연장될 수 있을까? 우리가 이미 서로에게 깊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경계를 넘어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난잡함만이 우리가 서로를, 그리고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참고 문헌

더 케어 콜렉티브, 돌봄선언, 니케북스, 2011. 
게일 루빈, 일탈: 게일 루빈 선집, 현실문화, 2015. 
Douglas Crimp, How to Have Promiscuity in an Epidemic, October,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