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반대편에서 적힌 문학
글이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하는가

폭력이 편재한 시대에 사랑은 환상 같습니다. 돌아보면 인류의 역사는 크고 작은 폭력을 중심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소수의 적극적인 폭력과 다수의 소극적인 폭력을 따라 이어지는 인류의 역사는 잔혹합니다. 세계가 폭력으로 신음할 때마다 문학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 나름의 목소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처럼 가장 잔혹한 시대에 가장 고귀한 몸짓과 목소리가 함께 하기도 합니다. 사랑을 의심하는 시대에 고통을 마주하고, 슬픔과 맞서고, 사라지지 않기로 결심한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자연에 명과 암이 존재하듯 폭력의 시대의 반대편에서 조용히 빛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폭력의 반대편에서 적힌 문학을 조명하며 글이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하는지 고찰합니다.
고통과 수치를 마주하기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문단은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극단적인 폭력을 세계가 목격한 직후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모순이었습니다. 사랑을 의심하는 시대에서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가 되었고 독일의 사회학자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는 불가능하다.”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파울 챌란의 「죽음의 푸가」가 발표되고 시는 다시 한번 시대의 역할을 얻습니다. 챌란은 언어를 통해 강제 노동 수용소의 고통을 현실에 소환합니다. 푸가는 하나의 선율을 한 성부가 연주하고 이를 따라 다른 성부가 다른 음역에서 이를 모방하여 연주하는 음악 기법입니다. 시 속에서 죽음은 연주됩니다. 그 위로 변주된 죽음이 자꾸만 겹쳐집니다.

1942년 6월 어느 토요일 밤, 챌란의 부모님은 나치에게 체포되고, 그는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2년을 보냅니다. 현실의 고통을 기어이 버텨냈을 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수치심이었습니다. 폭력의 시대에 느끼는 수치심,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수치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살아남은 자가 느끼는 수치심. 수치는 종결되어야 할 고통을 계속해서 현실로 불러냅니다. 고통에 억압된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언어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상처 입힌 이들의 언어이자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고통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챌란은 나치의 선전과 폭력의 수단으로 격하된 언어가 현실의 의미를 담아낼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공허한 언어를 변형하고 다시 쌓아 올려 현실의 고통을 표현합니다. 「죽음의 푸가」에서 푸가의 형식을 빌려 현실을 표현한 것은 공포를 외면하거나 초월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창조한 새로운 언어 체계를 사용해 그의 기억과 고통을 현실화합니다. 그가 담아낸 현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침묵 속에서 계속해서 연주되고 있는 극단의 고통을 마주하게 합니다.
슬픔의 중력에 맞서기

이곳은 이스라엘의 도시 네타니아에 위치한 작은 클럽입니다. 작은 몸집에 안경을 쓴 도발레라는 남자가 휘청거리며 무대에 오릅니다. 현실에 대한 풍자를 담은 지독한 농담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쏟아내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연신 웃음을 터트립니다. 그런데 사회에 대한 풍자는 서서히 도발레라는 개인의 비극으로 변모합니다. 관객들은 무대에 올라 있는 슬픔을 봅니다. 웃음을 찾아온 사람들은 불편함에 자리를 떠나려 하고 도발레는 그들을 붙잡기 위해 다시 농담을 내뱉으면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던 어머니에게 슬픔을 물려받은 도발레의 이야기가 무대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트라우마는 어떤 유산보다 더 내밀하게 대물림됩니다. 어머니로 인해 명랑한 어린 시절을 잃은 도발레의 삶을 단순히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이야기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 버성김 사이에는 개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아득한 슬픔이 있습니다.

그로스만은 슬픔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의식적인 결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삶에 집착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글이었습니다. 그는 레바논 전쟁에 참가했을 때 매일 저녁,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을 읽었습니다. 일곱 명의 전우가 저격수에서 전사한 날에도 방탄조끼도 없이 공포에 질려 10분간 책을 읽었습니다. 그것이 지옥 같은 곳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기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가족과 친구가 있고, 삶에는 다양한 기쁨이 흩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붙잡기 위해선 우선 슬픔의 중력에 맞서야 합니다. 우리를 끌어내리는 무서운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로스만은 슬픔이 도처에 널려 있을 때조차 이야기가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라지지 않기

이것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치를 피해 집과 가족, 목숨처럼 사랑했던 소녀를 잃고 미국으로 망명해 홀로 수십 년을 살아온 레오 거스키, 죽은 아버지가 오래전 어머니에게 선물한 책의 여자 주인공에게서 이름을 받은 소녀 앨마 싱어.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들은 글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랑이 서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줍니다. 『사랑의 역사』의 인물은 모두 무엇인가를 잃고 상실을 얻습니다. 나치에게 가족과 친구를, 망명 중에 사랑을 잃은 레오는 일부러 작은 사고를 일으켜 사람들에게 질타의 눈빛을 받는 것 외에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앨마는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일에 몰두하는 어머니와 자신이 메시아라고 믿는 동생과 함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들은 글쓰기를 통해 상실을 메워 나갑니다. 편지, 소설, 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글을 통해 잃어버린 마음의 한 부분을, 삶을 향한 믿음으로 채워 나갑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서로가 서로의 원인과 결과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책의 처음에서 니콜 크라우스는 자신에게 ‘사라짐의 반대를 가르쳐 주신’ 조부모님에게 헌사를 전합니다. 유대인 가정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상실은 중요한 키워드였습니다. 그녀는 상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의 역사』를 통해 생존에 대한 찬가와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쁨을 말합니다. 크라우스는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가 책으로만 가능한 대화를 나눕니다. 이것은 조용히 그리고 깊게 내면을 파고드는 정신적 대화입니다. 잃어버린 것들은 그저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영혼에 메워지지 않을 것 같은 구멍을 남깁니다. 이 상실의 구멍에 빠져 사라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떤 믿음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착각처럼 보였던 믿음조차 사라짐을 유예하고 삶을 지속시킵니다. 그리고 삶의 어느 순간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질문과 답이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글은 정적이면서 적극적인 매체입니다. 구태여 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어째서인지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 쓰면, 조용히 책장 속에서 납작하게 보관되던 글을 구태여 꺼내 읽고야 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조용하고 내밀한 대화입니다. 시간이 흘러 더는 내 것은 아닌 고통, 어쩌면 우리라는 개념을 아주 넓혀야만 겨우 짐작할 수 있는 고통을 더듬어봅니다. 고통은 시간을 통과하며 뭉툭해집니다. 시간이 우리를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지나갔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고통을 인식하고, 마주 보고, 함께 살아가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 사랑과 믿음을 발명하는 애달픈 노력의 시간이 있었을 겁니다. 글이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문학으로 폭력의 역사가 저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도 누군가 폭력의 반대편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그리고 누군가 폭력의 반대편을 믿고자 글을 읽습니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 기도하듯 폭력의 반대편에 섭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을 떠올리며 글을 닫습니다.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있다.”
참고 자료
Alden Mudge / The strength to survive / BookPage / 2005.05
Doug Valentine / Paul Celan and the Meaning of Language An Interview with Pierre Joris / Flashpoint
Michael Eskin and Durs Grünbein / A CONVERSATION ON PAUL CELAN: WE ARE ALL MIGRANTS OF LANGUAGE / DE GRUYTER / 2020.11
Ruth Franklin / How Paul Celan Reconceived Language for a Post-Holocaust World / The New Yorker / 2020.11
Jonathan Freedland / David Grossman: ‘You have to act against the gravity of grief – to decide you won’t fall’/ The Guardian / 201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