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런더포닉스, 끝없는 소리의 세계

모방과 인용으로 연결된 음악의 신주소

플런더포닉스, 끝없는 소리의 세계
틴에이지 엔지니어링의 샘플러 'EP–133 K.O. II' | 이미지 출처 : Teenage Engineering 공식 홈페이지

‘샘플링(Sampling)’은 그 유구한 역사만큼 많은 논란을 마주합니다. 좁은 의미에서 ‘기존 발매된 음악을 가져와 변형•편집해 배치’하는 샘플링은 1970년대 이후 본격화했죠. 전자악기의 발전을 거쳐 1980년대 등장한 AKAI MPC는 오늘날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샘플링의 영향을 증폭했고요. 오랜 시간 발전과 계승을 이어온 작법인 만큼, 샘플링에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합니다. 가까운 예로, 블랙핑크의 ‘Shut Down’과 아일릿의 ‘빌려온 고양이’는 유명 클래식과 애니메이션 OST 선율을 메인 테마로 사용하며 청자가 쉽게 원본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그와 달리 뉴진스의 ‘ETA’는 효과음처럼 들리는 짧은 감탄사를, 에스파의 ‘Supernova’는 원곡의 신디사이저 멜로디를 인터폴레이션1해 원작을 쉽게 드러내지 않죠. 오늘날 대중음악에서 샘플링은 단순히 과거 작품을 인용할 뿐 아니라, 이를 새로운 모습과 맥락에서 드러나도록 합니다. 그리고 샘플링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며 만들어낸 작품이 있다면 어떨까요? 이번 아티클에서는 샘플링의 정수이자, 샘플링을 대하는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내는 플런더포닉스를 소개합니다.

아일릿의 '빌려온 고양이'가 샘플링한 애니메이션<파이브 스타 스토리>의 OST '優雅なる脱走' | 약 40초 부터


플런더포닉스와 샘플링 - 애벌랜치스의 3,500가지 샘플들

피에르 셰페르의 'Études de bruits'

샘플링은 말 그대로 ‘샘플’을 다루는 창작법입니다. 그 시작으로 여겨지는 사례는 1940년대 프랑스의 작곡가 겸 엔지니어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의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인데요. 그는 악기 연주와 같은 고전적인 작법에서 벗어나, 릴 테이프에 자연과 일상의 소리를 녹음하고 이를 가공•편집해 완성하는 획기적인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셰페르의 작법은 예술음악과 대중음악 모두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요. 이제 음악가들은 세상에 없는 멜로디와 리듬을 만드는 데에 매몰될 필요 없이, 이미 존재하는 소리와 음악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죠. 여기서부터 이어진 새 시대의 창작법은 1980년대 ‘플런더포닉스(Plunderphoincs)’로 이어집니다.

존 오스왈드의 플런더포닉스 에세이 | 이미지 출처 : Plunderphonics 홈페이지

해당 시기, 캐나다 출신의 작곡가 존 오스왈드(John Oswald)는 “플런더포닉스, 또는 작곡의 특권으로서 오디오 해적질”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발표합니다. 이는 이름 그대로 ‘소리(phonics)’를 ‘훔치는(plunder)’ 행위를 의미하죠. 여기까지는 앞서 언급한 샘플링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둘 사이의 차별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먼저, 샘플링이 음악을 만드는 새로운 창작 방식이자 기법이라면, 플런더포닉스는 그와 연결되는 하나의 음악적 태도에 가깝죠. 예를 들어, 플런더포닉스 아티스트는 기존의 음악과 소리를 그저 하나의 재료로 바라보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훔치는 행위로 창작을 지속합니다. 기성 작품을 잘게 조각내고 변형해 붙이는 그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소리를 훔치는 해적'에 가까워 보이죠.

애벌랜치스의 멤버 로비 채터와 토니 디 블레이시 | 이미지 출처 : The Avalanches X(Twitter)

나아가, 오늘날 플런더포닉스는 작품의 모든 부분을 샘플로만 채워내는 특성을 지닙니다. 그 대표적인 예시로 호주의 밴드 애벌랜치스(The Avalanches)의 데뷔 음반을 꼽을 수 있는데요. 원래 밴드 음악에 가까웠던 그들의 스타일은 DJ 영입과 2년간의 연구를 거쳐 2000년에 발매한 <Since I Left You>로 완성되었습니다. 18개 트랙, 1시간 분량의 음반은 다른 무엇보다 3,500개 가량의 샘플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큰 파장을 일으켰죠. 여러 곡에 중복 사용된 샘플이 있다곤 하지만, 각각의 곡에 수십 개의 샘플이 사용된 셈인데요. 그들은 음악뿐 아니라 TV 광고, 드라마와 영화 대사 등 온갖 소리를 가져와 이를 해체•조립합니다. 하지만 음반을 듣다 보면 모든 소리가 서로 다른 출처를 가졌다는 사실이 의심될 만큼 매끄럽게 연결되죠. 특히 인트로 트랙 ‘Since I Left You’는 많은 창작자와 비평가에 의해 ‘역사상 최고의 인트로 중 하나’라는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애벌랜치스의 'Since I Left You'

'Since I Left You'의 샘플 분석 | 동영상 출처 : Tracklib


힙합의 뿌리로서 샘플링 - DJ 섀도우와 제이 딜라

제이 딜라가 사용한 AKAI MPC 3000 | 이미지 출처 : Retro Gear Shop 홈페이지

앞서 언급한 AKAI 사의 샘플러2 'MPC'는 힙합을 상징하는 악기인데요. 고등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가난한 형편의 흑인 음악가들이, 정석적인 창작법과 비싼 전문 인력 대신 샘플러로 비트를 만든 게 힙합의 뿌리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죠. 많은 매체에 노출된 것처럼, 손가락으로 패드를 눌러가며 소리를 조합하는 방식이 샘플러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힙합 프로듀서들은 각각의 패드에 다양한 악기를 입력해 새로운 리듬을 만들거나, 기성 작품의 일부 구간을 자르고 돌려가며 원본과 다른 구조를 창조했죠. 그리고 힙합과 샘플러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나아가 플런더포닉스의 태도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두 인물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DJ Shadow X(Twitter)

1990년대의 전설적인 프로듀서 DJ 섀도우(DJ Shadow)는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인물입니다. 그가 1996년 발매한 <Endtroducing…..>은 '세계 최초로 샘플링으로만 만들어진 음반’으로 기록되었죠. 앨범 아트워크에서 볼 수 있듯, DJ 섀도우는 자신이 발견한 LP를 바탕으로 작품을 채워나갔는데요. ‘디깅’이란 행위가 '과거 DJ들이 샘플링과 플레이를 위해 상자에 든 LP를 파내듯 찾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디깅 역량과 애정을 알 수 있죠. 가령, 50초를 넘지 않는 인트로 트랙 ‘Best Foot Forward’에만 10개 이상의 샘플이 등장하는데요. 악기 소리뿐 아니라 중간중간 들리는 내레이션, 랩 구절 등 모든 요소가 그의 LP 소장고에서 소환된 셈이죠. <Endtroducing…..>은 방대한 양의 샘플을 적절하게 배치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스크래치, 백스핀 등 그의 DJ로서 정체성이 강조되는 연결부로 수많은 소리를 매끄럽게 이어내며 샘플링의 수준과 영향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호평을 받았죠.

DJ 섀도우의 'Best Foot Forward'

DJ 섀도우의 <Endtroducing.....> 샘플 분석 | 동영상 출처 : Nic

이미지 출처 : HHGA 홈페이지

위에서 말한 DJ 섀도우로부터 영향받은 인물이 바로 제이 딜라(J Dilla)입니다. '힙합 씬의 천재’로 불리던 그는 희귀병과 싸우던 생의 마지막까지 샘플러를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요. 31세라는 젊은 나이로 타계하기 3일 전 발매한 <Donuts>는 지금까지도 힙합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반으로 불리죠. 장르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선별한 샘플, 이를 정교하게 이어 붙이는 그의 실력은 경악이 나올 만큼 훌륭한데요. 기존의 샘플링이 '작품의 한 구간을 떼어낸 뒤, 여러 샘플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형태'로 선보였다면, 제이 딜라는 '하나의 곡을 초 단위로 자르고 재배치'해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음악을 만들어내는 신기를 선보입니다. 또한 그의 경력에서 핵심을 차지한 매력적인 드럼 그루브는 오늘날 로파이(Lo-fi) 음악에 영향을 끼치는 등 작품 안팎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죠. 병세가 악화되면서까지 샘플러를 놓지 않고 만들어낸 <Donuts>는 제이 딜라의 뛰어난 결과물만큼 음악과 창작을 향한 사랑을 몸소 보여줍니다.

제이 딜라의 'Don't Cry'

제이 딜라의 'Don't Cry' 샘플 분석 | 동영상 출처 : Tracklib


시대를 불러오는 샘플링 - OPN의 복각과 케어테이커의 재현

캐나다의 작곡가이자 환경운동가 R. 머레이 셰이퍼의 저서 <The Soundscape>

힙합만큼이나 샘플링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장르가 전자 음악이죠. 전자 악기와 디지털 환경에서 창작하는 전자 음악의 역사에는 구체 음악의 영향이 지대한데요. 구체 음악은 이후 자연과 환경의 소리를 조합해 풍경처럼 펼쳐 보이는 사운드 스케이프(SoundScape), 다양한 소리를 층층이 쌓아내는 사운드 콜라주(Sound Collage)등으로 이어졌죠. 이 흐름은 전자음악가들이 샘플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식을 만들어냅니다. 예컨대, 음악가가 선별한 샘플, 바로 그 원작이 존재했던 ‘시간’을 불러오는 경우가 등장한 것이죠. 과거에 만들어진 작품을 활용하는 샘플링은 그 자체로 원본이 발매된 시기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또는 그 시절의 특징적인 소리로 시공간 자체를 불러오기도 하니까요.

이미지 출처 : 워프 레코즈 홈페이지

현재 전자음악계의 거목이 된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Oneohtrix Point Never, 이하 OPN)는 2011년 5집 <Replica>를 발표했죠. ‘복제품’을 뜻하는 제목처럼 작품 전체를 샘플링으로 구성한 음반은 특이하게도 'TV 광고'를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우연히 80년대 광고를 모아 놓은 DVD를 발견한 OPN은 곧장 “광고 문구 사이사이의 멈춤과 잡음”에 매료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는 “그 소리들이 내 드럼이고, 내레이션은 내 보컬이었다”고 말했죠. 또 <Replica>를 만드는 자신을 “의미 있는 오래된 것을 찾아 모험하는” 인디아나 존스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Replica>는 과거 TV 광고 샘플을 편집하고, 그 위에 잡음과 효과를 덧입히며 소리로 느끼는 향수를 훌륭하게 구현합니다. 때로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과거의 아련한 장면을 그려내기도 하는 <Replica>는 OPN이 스스로 설명하듯 “(소리들을) 재구성하고 재배열해 원래의 서사를 흩뜨리고 새로운 시를 써 내려가는” 과정을 닮았죠.

OPN의 'Sleep Dealer'

이미지 출처 : Resident Advisor 홈페이지

영국의 전자음악가 케어테이커(The Caretaker)는 음악을 통해 ‘시간’과 ‘기억’에 직설적으로 응답합니다. <Everywhere at the end of time>은 그가 작가 노트에서 밝혔듯 ‘알츠하이머병(치매)의 증상’을 음악에 반영한 작품인데요. 총 6번에 걸쳐 공개된 이 연작 앨범은 <Stage 1>부터 <Stage 6>까지 차례로 진행됩니다. ‘기억상실의 시작’을 테마로 출발한 작품은, ‘병증에 대한 인지와 부정’, ‘탈인식의 혼란과 공포’, ‘혼수상태’로 이어지죠. 소리 역시 1930년대 무도회 음악에 지직거리는 노이즈를 더하는 걸로 시작해, 피치를 조정하고 공간감을 왜곡하며, 음악의 첫 소절만을 끝없이 반복하거나 샘플을 무질서하게 조합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고요. 마지막에 이르러 작품은 샘플 원본을 전혀 알아볼 수 없도록 웅웅거리는 소리로 가득한 모습으로 갈무리되죠. 샘플을 선택하고 변형하는 케어테이커의 음반은 시간과 기억이 흩어지는 과정을 오직 소리만으로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케어테이커의 <Stage 1> 수록곡 'A1 - It's Just a Bruning Memory'

케어테이커의 <Stage 6> 수록곡 'Q1 - Long decline is over'


샘플링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플런더포닉스는 창작법의 변화와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샘플링은 그 행위 자체로 ‘돈’과 연결되는데요. 무단으로 원작을 도용하는 ‘불법 샘플링’이 아닌 이상, 모든 샘플 사용에는 비용이 발생하죠. 경우에 따라, 또 사용하는 샘플 길이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적게는 수십, 수백만 원부터 많게는 수억 원에 이르는 금액을 필요로 하는데요. 21세기 들어 저작권법이 강화되며 앨범 전체를 샘플링으로 수놓는 플런더포닉스는 모습을 감췄습니다. 또한, 아직 샘플링에 익숙지 않은 청자들에 의해 ‘표절’이라는 딱지가 붙거나, ‘이미 있는 음악을 사용하는 게 진정한 창작이냐’는 물음에 부딪히기도 하죠. 플런더포닉스와 샘플링은 사람에 따라 기성 작품을 활용하는 방식에 불만을 표할 수도, 혹은 예술 창작과 감상의 관점을 뒤흔드는 혁신으로 여길 수도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아티클 하나만으로 자신의 태도를 고정하기보다 고민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분기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플런더포닉스와 닮은 듯 다른 운동성을 지닌 사례를 소개하고 싶은데요.

독일 음악저작권협회 앞 요하네스 크라이들러 | 이미지 출처 : 요하네스 크라이들러 공식 홈페이지

구체음악을 소개하며 말했듯, 음악의 ‘재료’에 대한 관점은 ‘순수음악’으로 일컫는 예술음악에서도 중요한 화두로 자리합니다. 독일의 현대음악가인 요하네스 크라이들러(Johannes Kreidler)는 여러 논쟁을 몰고 다니는 인물이죠. 개념음악(Konzept Music)을 주창한 그는 21세기에 이르러 음악의 핵심이 ‘새로운 아이디어(개념)’에 있음을 선언합니다. “음악은 질문을 야기할 때 비로소 현대음악이 된다. 이것이 정말로 음악인가? 처럼”이라는 물음을 남기기도 했고요. 크라이들러가 2008년 선보인 작품 <광고 음악(Product Placements)>은 총 70,000 가지 샘플을 활용한 음악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음악사에 등장한 작품을 모아 33초라는 분량으로 압축했죠. 더 중요한 사건은, 그가 독일 음악저작권협회 앞으로 큰 트럭을 몰고 와 7만 개의 저작권 신청서를 제출한 일이었는데요. 그는 모든 행위를 아울러, ‘기존의 저작권법과 제도가 오늘날에도 유효한가?’라는 질문과 함께 개념적인 작품을 완성했죠. 플런더포닉스가 그 결과물에서는 ‘듣기 좋은’ 작품으로 다가왔다면, 크라이들러의 개념음악은 보다 크고 직설적인 물음으로 존재하는데요. 이 작품까지 확인한 뒤에는 ‘이미 있는 것을 가공•편집해 창작하는 예술’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관점과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혹은 여전히 같을지에 대한 호기심이 밀려옵니다.

요하네스 크라이들러의 'product placements'


[1] 기존 작품의 요소를 그대로 가져오는게 아닌 자체적으로 연주하거나 재녹음하는 방식

[2] 녹음, 편집 등 '샘플화'된 소리를 입력해 재생•출력할 수 있는 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