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 연극이 필요한 순간
공연장에서 만나는 인생의 인터미션

혹시 연극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연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순간은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정말 연극 같은 게 필요한 순간이 있을까 싶지만, 연극은 우리 삶에 인터미션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장르입니다. 사는 것에 걸려 넘어졌을 때, 생이 턱 끝까지 쫓아와 숨이 차오를 때, 온 우주에 나 혼자 남을 것만 같을 때. 인생에 인터미션이 필요한 모든 순간에 공연장은 기꺼이 중간 휴식점이 되어줍니다.
조용한 극장 그리고 캄캄한 무대. 그 아래서 우리가 일상과의 연결을 끊고 숨을 고르는 동안, 무대 위 인물들의 삶은 지속되죠. 그들의 생은 때론 고통스럽고 자주 처절하지만 살아볼 가치 있음을 분명히 증명합니다. 이번 아티클에서 소개하고 싶은 작품들도 그렇습니다. 고단한 얼굴로 위로를 건네는 무대, 지금부터 그 조명을 하나씩 켜보려 합니다.
진실이라고 불리는 결핍, 엘리펀트 송
귀여운 코끼리 ‘안소니’가 등장한다고 해서 희망찬 작품이겠거니 생각하면 조금 곤란합니다. 올해로 국내 초연 10주년을 맞이한 연극 ‘엘리펀트 송’의 장르는 엄연히 심리 스릴러이니까요. 캐나다의 연극 작가 니콜라스 빌런이 쓴 이 작품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2014년에는 찰스 비나메 감독, 자비에 돌란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죠. 영화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무대 위에서 가장 빛이 나는 텍스트를 가진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동료 의사인 로렌스 박사를 찾는 그린버그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는 로렌스 박사의 환자인 마이클이 단서를 쥐고 있다고 여기며 추궁하는데요. 마이클은 내내 딴소리만 늘어놓을 뿐입니다. 덕분에 그린버그와 관객은 모두 혼란에 빠지죠.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슬픔과 고독이 범람합니다. 쓸데없을 것이라 여겼던 말들이 커다란 맥락을 만들어내고,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마이클의 상처는 선명해지죠. 추운 겨울, 객석에 앉아서 맞이하기에는 지나치게 외로운 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극 속에서 마이클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세상에 정말 사랑이 존재하냐고,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거냐고 말이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랑이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할까요?
예술을 위한 예술 그리고 삶을 위한 삶, 마우스피스
연극이나 드라마 혹은 영화 같은 이야기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결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과는 다르죠. 우리 삶은 결말 없이 계속 이어지기만 합니다. 이런 사실이 때로는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농담처럼 ‘인생은 시즌제 드라마’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도 누군가의 결말이라 보기엔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 ‘결말’이 없는 연극이 한 편 있습니다. 2020년 국내 초연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연극 ‘마우스피스’입니다. 한때 유망주로 불렸지만 지금은 슬럼프에 빠진 작가 리비. 작품은 그녀의 삶 한가운데에서 시작됩니다. 솔즈베리 언덕에서 우연히 데클란을 만난 리비는 그에게 예술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매료됩니다. 동시에 늪에 빠져 쓸 수 없었던 작품도 쓰게 되죠. 데클란의 불행을 소재로요. 데클란은 가정폭력에 노출된 가난한 청소년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리비에게 털어놓으며 함께 작품을 만들어 가지만, 생각과는 다른 진행에 분노하고 상황은 극단적으로 변해만 갑니다.
한 무대 위에서 서로 다른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는 ‘진짜 예술’ 그리고 ‘진짜 결말’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결말 같은 건 없다고,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는다고 외치는 데클란을 보며 삶의 이면과 무대의 반대쪽을 한 번에 바라볼 수 있죠. 2026년 삼연을 앞두고 있으니 관심이 있으시다면 눈여겨볼 만합니다.
기록을 가로지르는 기억, 빵야
희곡에는 시대와 문화 그리고 국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시대와 문화 그리고 국가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는 작품들도 있죠. 김은성 작가가 쓴 ‘빵야’는 바로 그런 작품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역사라고 배웠던 기록들이죠.

1945년 인천의 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99식 소총 빵야는 바뀌는 주인을 따라 수많은 삶을 경험합니다. 빵야가 기술하고 있는 기억은 역사와는 비슷한 듯 다릅니다. 정확하게 표현을 하자면, 다소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모양을 하고 있죠. 극 안에서 빵야는 누군가의 편을 들거나 선과 악을 규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죠. 때문에 더욱 깊이 삶과 맞닿아 있고 인간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원래 인간이란 복잡하게 선하고 또 다양하게 악한 존재이니까요.
이 작품은 시대를 거슬러 빵야가 겪어왔던 비극의 시대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빵야가 건네는 질문은 지금을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무엇을 향해 걸어 나가고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 말입니다. 묵직하지만 담담하게 생을 지속할 의지가 필요한 순간, 빵야의 꿈을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마우스피스에서 극이 무엇인지, 공연을 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묻는 데클란에게 리비는 말합니다. 공연을 본다는 건 다른 관객과 심장 박동을 맞추는 일이라고요. 산다는 것이 막막하고 녹록지 않을 때, 옆에 앉아 있는 낯선 이와 심장 박동을 맞춰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객석에서 한 인물의 생을 엿보며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다정한 존재입니다. 연극은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는 소중한 매개체고요. 무대 조명이 꺼지고 객석등이 켜지는 순간, 누군가에겐 새로운 무대가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