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치워크 윔-왐 Patchworks Whim-wham

태현영, 황유윤

패치워크 윔-왐 Patchworks Whim-wham
<패치워크 윔-왐 Patchworks Whim-wham>, 태현영, 황유윤, 중간지점 하나, 2025.05.10 - 06.01 | 이미지_양승규

길거리가 자못 춥다는 듯 웃옷을 걸쳐 입었다. 따뜻한 강물은 비효율적으로 흐르는 중이었다. 사실 그것에 그런 게 어디 있겠냐마는. 목적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자, 하고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으나, 어째 행색이 그렇게 되었다. 이 차림에 변주를 더한다면 나는 때와 장소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름 따윈 갖추지 않은 대상이 이젠 뚜렷할 때라는 식으로 선명해졌다. 시야의 확장으로 감내할 시선의 수, 그 너머에 있는 응답이 비어도 이를 용납할 수 있으리라. 말로는 도저히 갚지 못할 처우에 천 마디 만남을 빚진다. 무릎 부근이 시큰거리는 것으로 내게 어떤 의미를 전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추위와 더위의 공존보다 더 얄궂은 성질의 것일 터다.

나는 방에서 수영장을 찾으려 할 때마다 달갑지 않은 웃음에 처한다. 그 속에서 카펫은 대여섯 마리의 새로 변모하고. 그들은 공통으로 튼튼한 부리를 가졌다(날카로움과 무딤의 차이는 있지만).

태현영, 남은 해의 잔여물-폐형광등, 2025, 캔버스에 유채, 130.3 x 30.0cm |이미지_양승규

폐형광등 아래 쓰고 남은 해의 잔여물이 존재한다. 그 둘은 짙은 방식으로 –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체념으로 – 서로를 호응하며 운의 소모에 관한 생각을 빚어내는데, 손잡이뿐인 하루가 자신을 부시며 몹시 달그락거렸다. 어디서 불응을 겸한 울음이 들려오고. 유영의 양상은 지금까지와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짐작보다는 예언에 가까운 울림. 그것은 연신 머릿속을 걷어 차며 진척 없는 일의 진행을 행갈이 했다.

시시각각 순서가 바뀌는 줄에 서 있었다. 앞쪽에 있다고 우쭐거릴 수 없었으며 설령 맨 뒤라고 해도 충분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줄을 선 사람들은 모두 불행하거나 전보다 형편이 나아지곤 했다. 나는 어디에 주로 치우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눈을 감고 지낸 평소가 그곳까지 나를 따라왔기에 여지없이 감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줄에선 심심치 않게 이동이 있었으나, 그게 앞으로 가는 건지 뒤로 가는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눈을 감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쁘지 않은 구실에 가만히 뺨을 대었다.

태현영, 방에서 수영장을 찾으려 할 때, 2025, 캔버스에 유채, 130.3 x 193.9cm | 이미지_양승규

검은 물체를 모아둔 서랍 안에 불꽃이 튀었다. 그것은 여지없이 계단을 오르고 벌판을 달리며 하루를 종잡았는데, 이 일상(때론 비극적이기까지도 한)이 선사한 가늠에 무심코 불이 붙은 것이다. 검붉은 시선에 닿은 구름으로 옮겨붙은 색채가 바라는 구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반 평 남짓한 구덩이에 머물다 보면 예의 구명에 대한 생각을 저버리게 되었다. 비좁은 장소에 놓였다는 것이 특수한 망각을 주는 걸까, 하고 짐작하였다. 이는 동시에 지레 겁을 먹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단지 누구나 그곳에 있으면 자연스레 당면하게 되는 상황인지도. 일반적인 일에는 통상적인 물음이 필요하다.서랍을 여닫는 사이 등 뒤에 도래한 정적은 천장을 창공으로 바꾸었으며 단조로운 바닥에 기묘한 도형을 칠했다. 혼탁한 인물이 다각으로 접힌 날개를 편 후 풀어진 신발 끈을 묶는 일련의 과정을 떠올렸다. 주위의 침묵과 썩 잘 어울리는 일이었다. 검은빛을 품은 등이 그림자를 토한다.

황유윤, 비-대칭 천사, 2025, 조형토에 유약, 14.8 x 8.5 x 9.5cm, 16.2 x 8.2 x 10.0cm / Wandering Stuffs Esquisse, 2025, 수집 액자, 종이에 과슈, 16.5 x 23.0cm | 이미지_양승규

괸 적 있던 고개에 맺힌 노끈은 순수한 관념으로서 존재한다. 그것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복잡한 성질의 매듭을 한 수 뒤로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늘어난 심적 부지에 이름 없는 작물을 심고 적당히 시도를 기울이다 보면 그 과정 자체가 마지못해 의의를 몸 밖으로 내밀 터다.  왼손과 오른손의 거친 정도가 다른 것은 단지 사용 빈도의 문제일까. 이런 생각으로 몸집을 불린 무용은 어느새 웬만한 기둥과 높이를 나란히 한다. 그것을 올려다보는 게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 요즘은 무감각한 요행으로 뒤덮여 있다.“장식보다는 저장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죠. 그의 창고엔 온갖 것들이 들어있었답니다. 악수의 종류에 관한 책이나 언덕을 뛰어넘는 연습용 기구 같은 것들이 녹슨 빛을 띤 천장 아래 존재했어요. 그가 사라진 건 어떤 판단에 의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살을 에는 추위가 나사못을 구부리듯 알 수 없는 연관으로.”

황유윤, andering Stuffs, 2025, 캔버스에 유채, 162.2 x 260.6cm | 이미지_양승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