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주를 보는 이유
배제된 존재를 호출하는 영적 세계에의 의존
최근 <운명전쟁49> 라는 샤머니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접했습니다. 신점, 타로, 사주 등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운명을 점치는 49명의 점술가들이 경쟁한다는 설정이었죠. 점술가들의 연애 프로그램 <신들린 연애> 역시 화제성을 모았습니다. 점술가들의 연애가 일반 연애와 무엇이 다른지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현실 세계 너머의 것들이 대중의 이목을 끄는 데는 분명한 힘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저 역시 특별히 어떤 초월적 존재를 믿는 편은 아니지만, 새해가 되면 무료 신년 운세에 생년월일을 입력합니다. 재미로 보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결과에 따라 하루의 기분이 달라지는 순간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를 이성적인 존재로 규정하면서도, 여전히 실체 없는 무언가에 기대어 불안을 분산시키고 미래를 가늠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존할까요?
이성적 규칙과 규율로 구성된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흔히 영적 세계의 대척점에 서 있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영적인 것은 비이성적이고, 추상적이며, 현실 너머의 영역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현실 사회를 살다보면, 도저히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반복해서 벌어집니다. 이유 없는 학살과 혐오, 구조적인 배제와 차별은 과연 이성이 정말로 합리적인가라는 질문을 남깁니다. 그렇다면 이성의 반대편에 기댐으로써, 오히려 이성 중심 세계의 문제를 더 정확하게 진단할 수는 없을까요?
이번 아티클은 개별 작품을 소개하거나 작가론을 전개하는 글은 아닙니다. 대신 에디터인 제가 2025년 서울 미디어시티 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 에 전시된 작품들을 통해 떠올린 하나의 시나리오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성 세계를 초월하는 사유를 통해 이성이 설명하지 못한 영역에 접속하고, 불합리를 감지해 새로운 합의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지, 또 영적 의존이 새로운 인식의 기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설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외계의 눈으로 세계를 진단하기
앞서 언급했듯, 이성 중심 사회에는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불합리가 곳곳에 존재합니다. 사회의 구조를 이해하고, 소외되거나 차별받는 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실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이미 이 세계의 규율과 질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계 생명체의 눈으로 이 세계를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수천 년 전 가라앉았다고 전해지는 가상의 대륙 레무리아. 그 비극 속에서도 살아남은 레무리아인들은 지구에 침투해 북캘리포니아의 활화산 아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합니다. 대만의 예술가 인주 첸(Yin-Ju Chen)이 창조한 이 외계 존재들은, 격동의 시기를 지나던 지구를 응시하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먼 고향 행성에서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형식의 예술품을 제작해 지구의 소식을 전달합니다.

외계의 지성은 특히 1960년대라는 격변의 시기를 목격하며, 이를 하나의 ‘우주적 불협화음’으로 진단합니다. 일상 속의 사소한 불합리부터 구조적, 제도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인간 사회의 균열은 외부자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더욱 선명하고, 더욱 파괴적입니다. 이 외계적 시선은 구조 내부에 속한 당사자가 감지하기 어려운 위기를 가시화하며, 인간 중심적 이성과 합리성의 언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현실을 사유하게 만드는 또 다른 좌표계가 됩니다.
몸을 매개로 비이성과 접속하기
문제를 진단했다면, 이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이성과 접속을 시도해봅니다. 인류는 초월적 존재와 닿기 위해 수많은 방식을 고안해 왔습니다. 성당과 교회의 첨탑을 하늘로 치켜세우고, 신의 대리자라 여겨지는 존재들과 영매를 찾으며, 특정한 날에는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음식을 차려 의례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접속에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러한 의례들은 영적인 것에 의존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증명합니다.

과거 유럽, 특히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타란티즘(tarantism)’이라 불리는 질병이 존재했습니다. 타란툴라에 물린 뒤 발병한다고 여겨진 이 병은, 음악에 맞춰 신들린 듯 격렬한 춤을 춰야만 치유될 수 있다고 믿어졌습니다. 이 믿음에서 탄생한 ‘타란텔라(tarantella)’는 남부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춤 의례로 자리 잡았고, 매년 6월 29일 성 바오로와 성 베드로의 축일에는 타란티즘에 걸린 이들이 성 바오로 소성당에서 광기 어린 춤을 추며 회복을 기원했습니다. 요아킴 쾨스터(Joachim Koester)는 이 미신적 의례를 영화적 퍼포먼스로 재현하며, 설명되지 않는 믿음이 오랫동안 공동체 안에서 치유이자 사회적 실천으로 기능해 왔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쾨스터가 보여주는 황홀하고 신비로운, 동시에 섬뜩한 의례는 병리로 간주되던 신체의 움직임이 역설적으로 세계를 확장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타란티즘은 병에서 출발했지만, 의례가 되고, 의식이 되며, 나아가 황홀한 인식의 상태가 되죠. 이성이 배제해 온 수많은 ‘비정상적’ 신체는 더 이상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세계와 접속하는 통로가 됩니다. 여기서 영적 의존은 비이성적 상태가 아니라, 언어 이전의 인식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접속이 실제가 되는 순간
만약 몸을 통해 접속에 성공했다면, 영적 존재는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을 걸까요? 아니 그 전에, 우리가 정말로 접속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를 확인할 수 없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시도는 공허한 몸짓으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중, 19세기 영성주의 화가 조지아나 하우튼(Georgiana Houghton)의 작업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하우튼은 세상을 떠난 언니 질라와 강령술을 통해 교감한 이후, 이를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경험은 당대에 이미 명성을 얻은 예술가였던 그녀를 영매라는 존재에 매료되게 만들었고, 이후 ‘레니’로 알려진 영매의 도움을 받아 영혼들과 교신하며 밑그림이나 수정 없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하우튼은 스스로 영매가 되었고, 영혼과의 접속 자체가 그녀의 고유한 작업 방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훗날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와 함께 신비주의 추상 회화의 중요한 계보를 형성합니다.

하우튼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영혼이나 신의 목소리를 들었는지의 여부가 아닙니다. 그 진위를 판단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도 아니며,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습니다. 주목해야할 건 하우튼이 영적 세계와 협업했다는 사실입니다. 하우튼에게 영적 존재란 상상의 대상이 아니라, 작업 과정에 개입하고 작가의 손을 움직이게 합니다. 즉 자신의 의지와 통제력을 내려놓고도 작업을 가능하게 하죠. 영혼에 맡긴 손이 그린 그림은 정교한 구도와 색채의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영적 세계에 대한 믿음이 삶과 작업을 지속하게 했고 작업의 방식과 규칙, 결과를 구성합니다. 현실 너머의 세계가 어떻게든 삶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공존을 요청하는 사이버 마녀 선언
접속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성립한다면, 다음 단계는 이성이 배제해 온 존재들과의 공존을 요청하는 일입니다. 지구의 예술 형식을 빌려 고향 행성에 소식을 전하는 레무리아인들, 광기의 춤을 춘다는 이유로 억압받았던 신체들, 현실 너머를 사유하려다 이해받지 못한 신비주의자들까지. 이들은 모두 초월적 세계에 기대어 기존 질서 밖에서 살아남고자 했던 존재들입니다.

뤼실 올랭프 오뜨(Lucile Olympe Haute)는 모든 윤리 체계가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 나아가 세포처럼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비인간 존재들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스스로를 마녀라 주장하는 네 명의 친구들과 함께 영혼의 의식을 거행한 뒤 완성된 <사이버 마녀 선언문> 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이 선언문은 인간을 넘어 기술과 시스템까지 포괄하는 윤리의 확장을 요구합니다.

선언문은 의식을 통해 이성과 비이성, 현실과 비현실, 영성과 정치, 기술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영역들을 연결합니다. 영성과 기술에 대한 의존을 개인적 신념이 아니라 윤리적, 정치적 실천으로 확장하는 이 작업은, 영적 세계에의 기대가 더 많은 존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의존은 고립된 주체를 공동의 책임 속으로 다시 위치시키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의존’은 여전히 부정적인 단어로 작동합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자립,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이성, 끝까지 스스로를 책임지는 개인만이 정상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집니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순간, 기대는 행위는 나약함으로 환원되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개인의 실패가 되죠.
그러나 현실은 이 기준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혹합니다. 불안정한 노동과 무너진 안전망, 예측 불가능한 미래 앞에서 개인이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몫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그럼에도 사회는 여전히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립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사람들이 점집을 찾고, 사주를 보고, 운세에 기대는 일은 비이성의 잔재라기보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견디기 위한 하나의 선택처럼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는 제도와 사회가 끝내 응답하지 않는 질문에 말을 걸어주는 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다룬 영적 세계에의 의존은 현실을 외면하는 도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성 중심 질서가 배제해 온 감각과 존재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그 질서 자체를 의심하기 위한 시도에 가깝습니다. 외계의 시선, 신체를 통한 접속, 영적 존재와의 협업, 그리고 윤리의 확장은 모두 이성의 언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의존은 독립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의존은 우리가 결코 혼자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더 많은 존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세계에 다시 접속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영적 세계에 기대는 행위는 비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이성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세계에서 다른 감각과 질서를 호출하는 하나의 기술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