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존의 이면을 조명하는 넷플릭스 3선
무능이라는 낙인을 넘어 생존의 권리로
최근 종영한 티빙 오리지널 <환승연애4> 속 출연진을 향한 대중의 날 선 비판은,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완벽한 성인상을 투영합니다. 사랑과 이별 앞에서 보여준 서툰 모습을 “성인답지 못하다”거나 “염치없다”고 몰아세우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최근 캥거루족이나 은둔형 외톨이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이들을 막다른 길로 내몬 구조적 결함보다는 개인의 나약함으로 규정하는 데 급급합니다. 완벽한 독립에 대한 강박은 우리 곁의 이방인들을 가장 먼저 벼랑 끝으로 내몰게 되는데요. 각자도생이 당연해진 지금, 생존의 기술로서 ‘의존’을 다시 읽어낼 세 편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배타적인 공동체의 시선, 이주 여성의 살아낼 결심
<아침바다 갈매기는>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역주행하며 깊은 울림을 준 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쇠락해 가는 어촌 마을을 배경으로 소외된 자들의 처절한 생존법을 다룹니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젊은 어부 용수가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는 보험 사기극을 벌이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썩은 생선처럼 죽은 눈으로 살아가던 용수는 늙은 선장 영국에게 무모한 제안을 건네고, 영국은 처음으로 빛나던 그 눈빛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 위험한 공모에 가담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정으로 비추고자 하는 것은 사라진 용수의 행방이 아닙니다.

용수의 부재 이후, 남겨진 베트남 이주 여성인 영란을 대하는 공동체의 서늘한 민낯이 드러납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삼키며 선착장에서 묵묵히 생선을 손질하는 그녀에게, 이웃들은 위로 대신 날 선 혐오를 쏟아냅니다. “한국말도 못 하면서 꾀를 부려 보험금을 타내려 한다"거나 “돈 받으면 바로 도망갈 게 뻔하다”는 식의 험담은 예사입니다.
급기야 한 주민은 영란에게 용수 수색으로 인해 발생한 조업 손실 보상금을 내놓으라며 노골적인 약탈의 본색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영란은 슬픔을 나누는 이웃이 아닌, 마을의 자원을 축내는 철저한 외부인이자 잠재적 도망자일 뿐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러한 차별이 잘못된 것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폐쇄적 공동체의 현실이 스크린을 뚫고 적나라하게 전해진다는 점입니다.

남편의 실종으로 한국 체류 자격 연장이 불투명해지자 영란은 영국과 함께 서울의 출입국사무소를 찾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면박뿐이었습니다.
담당 공무원은 사정을 듣는 대신 규정을 들이밀며 “남편이 직접 와야 한다.”, “불출석 사유서 서명은 위조 아니냐”며 그녀를 몰아세우고, 아니꼬운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던집니다. 이는 이주 여성을 제도적 틀 안에서만 그 존재를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우리 사회의 단편적인 시선을 씁쓸하게 비춥니다.

그 배타적 시선들의 틈에서 영란의 곁을 지키는 것은 또 다른 소외자인 영국과 용수의 어머니 판례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과 단절된 채 술로 버티던 영국이 자신처럼 어촌에 머물지 않고 훨훨 날아가길 바라던 용수의 공범이 된 것, 그리고 판례와 영란이 서로를 의지하며 버티는 것은 단순한 범죄 가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자, 배제된 자들끼리 나누는 무언의 연대였죠.
말미에서 영란은 남편에 대한 감정으로 계속해서 고뇌하지만, 결국 자신을 도구로만 대했던 배타적인 공동체를 거부하고 보험금을 챙겨 떠나는 선택을 합니다. 이는 배신이 아닌, 자기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거대한 벽 앞에서 비로소 쟁취한 생존이었습니다. 각자의 지옥에서 서로를 건져 올리려 했던 포효인 셈이죠.
영화는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이들의 공모를 단죄하기에 앞서, 우리가 만든 차가운 시선이 그들을 거친 파도 속으로 내몰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의존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서로의 손을 잡을 때 완성되는 삶의 자연스러운 풍경입니다. 이 풍경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배려가 아닐까요?
양희경의 [행복의 나라로], 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 OST
국가 시스템의 외면, 정상성이라는 함정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정신 질환자를 무능하고 위험한 인물이라는 프레임에 가두는 사회적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특히 환자를 보살피던 간호사 다은이 자신은 아닐 거라 확신하던 우울증 환자가 되는 과정을 통해, 병 자체보다 무서운 것은 '예전처럼 기능을 다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즉 낙인과 무능에 대한 공포임을 역설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고착화된 시선이 개인의 아픔조차 자기관리의 실패로 바라보고, 치료를 위해 주변인이나 사회 시스템에 의존할 때 이를 그저 사회적 비용으로만 환산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드라마는 치료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격리와, 사회가 흔히 말하는 정상성이라는 장벽이 의존할 권리를 어떻게 박탈하는지를 조명합니다. 특히 공시생 김서완의 비극은 안전한 시스템의 부재를 뼈아프게 지적합니다. 노량진 고시촌의 현실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게임 속 '마법사'로, 담당 간호사 다은을 자신을 도와줄 '중재자'로 명명하며 망상 속으로 도피합니다. 병동에서는 모범적으로 치료를 받으며 한 인간으로 존중받지만, 병원 밖 세상은 그를 다시 패배자라는 명칭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세상에 나가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차라리 정신병원이 안락하고 낫다
퇴원 하루 만에 재입원을 택한 서완에게, 망상 속 전쟁터는 다름 아닌 사회였습니다. 반대로 격리된 병동은 역설적인 안전지대가 되었죠. 그에게 필요했던 의존은 명확했습니다. 치료 이후의 삶이 고립으로 번지지 않도록 사회와 자신을 연결해 줄 현실의 ‘중재자’가 필요했던 거죠. 드라마는 서완을 통해 말합니다. 아침을 맞이하려면 밤을 홀로 버티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을 함께 견뎌줄 따뜻한 시선과 실질적인 안전망이 먼저여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취약함을 껴안다, 오지랖이라는 이름의 상호 의존
<갯마을 차차차>

앞선 두 작품이 의존의 고통과 한계를 짚었다면,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는 의존이 서로를 어떻게 구원하는지 보여주는 가장 다정한 해답이 됩니다. 서울에서 온 치과 의사 혜진에게 공진 마을 사람들의 관심은 그저 불편한 오지랖이자 사생활 침범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촌스러운 간섭이 실은 서로의 생존을 지탱하는 가장 촘촘한 안전망임을 증명합니다.
공진의 이웃들은 저마다의 아픈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딸을 잃은 외로움을 감추려 남의 이야기를 떠벌리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조남숙, 실패한 가수라는 틀에 갇혀 지난날의 영광만 되풀이하는 오춘재 등이 그 예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취약함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침범합니다. 어떤 일이든 해내던 마을의 영웅처럼 보였던 홍반장이 깊은 트라우마에 갇혀 있었음이 밝혀졌을 때,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거창한 치료가 아니었습니다. "밥은 먹었냐"며 문을 두드리는 이웃들의 투박한 관심, 즉 사회적 가족으로서 기꺼이 비빌 언덕이 되어준 결과였죠.

특히 마을의 큰 어른 감리 할머니와 두식의 관계는 상호 의존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항상 도움을 받는 약자처럼 보였던 감리 씨는 실상 두식의 마음을 지탱하는 가장 큰 버팀목이었습니다. 그녀는 두식에게 말합니다.
사람은 사람한테 기대어 사는 거야. 그게 삶이야
감리 씨가 남긴 "너는 나의 아들이자 손주였다"는 고백을 마주한 순간, 두식은 비로소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가면을 벗고 처음으로 오열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친아들은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제야 그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이는 혈연을 넘어 매일 마주하는 이웃과의 관계가 한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회복시키는지 증명하는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최유리의 [바람],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OST
무엇보다 이 드라마가 빛나는 지점은 혜진과 두식이 그려내는 새로운 의존의 방식에 있습니다.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 일찍이 방어기제를 세워야 했던 혜진과, 부모와 할아버지를 모두 떠나보내고 세상에 홀로 남겨졌던 두식은 전통적인 가족의 울타리 바깥에서 각자의 상처를 안고 분투하다 공진에서 비로소 서로에게 기댈 어깨를 내어줍니다.
이것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닙니다. 기존 가족에서 독립한 두 개인이 서로의 상처를 깊이 응시하고 치유하며, 다시금 기꺼이 서로에게 의존하기를 선택하는 희망찬 도약입니다. 상실의 아픔을 딛고 다시 연결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모습은, 진정한 자립이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인정하며 건강하게 연결되는 것에 있음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모두 삶의 어느 지점에서 한 번쯤은 사람 혹은 시스템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겪는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이슬아 작가는 한 독자에게 "자신의 이상하고 뾰족한 면을 밀어붙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완벽한 자립이라는 사회의 문법을 거스르는 일은 때로 두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의존하고 싶다'는 선언은 그 자체로 가장 뾰족한 저항이 됩니다.
의존이란, 내 삶의 무게를 혼자 감당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용감한 태도입니다. 나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용기와 타인의 아픔을 품어주는 넉넉함이 만날 때,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따뜻한 페이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편의 작품을 배웅하며, 효율과 자립을 숭상하는 차가운 직선의 시스템 위로 인간적인 곡선을 조금씩 덧칠해 봅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버거운 날, 기대고 싶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