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른 실패기

어른이 되고 싶어서 이런 것도 해봤다

나의 어른 실패기
사진 : 지정현

'어른이 되는 학원은 없을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진 뒤, 깨질 듯한 숙취에 겨우 일어나 초췌한 몰골로 양치를 하다가 든 바람이었습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지인들의 결혼 소식 때문인지, 괜히 저를 어른 취급하는 세상이 미워졌거든요.

어른 라이센스를 발급하는 학원이 생긴다면, '돈은 얼마 모았어요. 장가는 언제 가요?'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공교롭게도 저는 면허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어른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보다 좀더 어릴 때, 필자는 어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깔끔한 오피스 룩의 출근 복장, 단정한 외모, 많은 돈과 경험이 수반 되는 취미들. 좋던, 싫던 성숙한 조건을 갖추면 어른이 될 거라 믿었습니다. 지금은 절대 아니지만요. 어른이 되기 위해 필자가 샀던 물건들을 소개합니다.


어른의 조건 1

"하얀 셔츠를 입어야 한다."

작년 결혼식 주례를 맡으면서 급하게 다시 산 유니클로 옥스포드 셔츠. '평소에도 입겠지' 싶었지만, 결국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갓 대학생이 되고 한 달쯤 캠퍼스를 다니다가, 하얀 셔츠를 꼭 사야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그때 모나미룩이 유행이었던 것도 있지만, 깨끗하게 다린 셔츠를 입고 다니는 선배들을 보면서 “어른은 관리하기 번거로운 하얀 셔츠도 다려 입는 사람이구나.” 싶었거든요. 그래서 곧장 유니클로에 가서 옥스포드 셔츠를 한 장 샀죠.

다음 날 오후 수업에 나가려고 거울 앞에서 서툴게 다린 셔츠를 걸쳐봤습니다. 하지만 다시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고이 모셔뒀죠. 까무잡잡한 피부톤 탓인지, 패턴 하나 없는 새하얀 셔츠가 영 어울리지 않았거든요. 그 뒤로는 과제 발표 때문에 한 번 입었는데, 동기가 찍어준 사진 속 제 모습은 시골쥐가 멋 부린 것 같았습니다.

게버딘 원단으로 만든 빔즈 플러스 셔츠. 실루엣이 넉넉해서 가볍게 아우터처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이후로 하얀 플레인 셔츠는, 평소엔 입지도 않으면서 경조사 때만 찾게 되는 ‘어른의 아이템’이 됐습니다. 막상 입을 일이 생기면 궁여지책으로 새로 사곤 했지만, 금세 옷장 속으로 들어가거나, 보관을 잘못해 얼룩이 져 헌옷 수거함으로 가기 일쑤였죠. 게다가 복장이 자유로운 회사에 취직하고 나니, 하얀 셔츠는 저와 더 멀어졌습니다.

지금 제 옷장에는 체크 셔츠가 제일 많습니다. 이번 여름에도 개버딘 원단으로 된 체크 셔츠를 하나 샀죠. 까무잡잡한 피부톤에도 잘 어울리고, 셔츠만큼 많은 청바지나 카키 팬츠와도 궁합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경조사에는 무엇을 입고 가느냐고요? 하얀 셔츠 대신, 똑같이 ‘격식’을 차려주는 짙은 네이비 셔츠를 입습니다. 화이트 셔츠는 안 입는 어른이지만, 꽤 괜찮은 체크 셔츠와 격조 있는 네이비 컬러를 고를 줄은 아는 사람이 된 셈이죠.


어른의 조건 2

"폴로 셔츠의 갯수만큼 어른의 품격도 높아진다."

평범한 폴로 셔츠는 싫어서 콜라보 제품으로 샀습니다만, 결국 한 철만 입고 옷장에 모셔놨습니다.

필자에게 여름은 여러모로 '어른'이기 어려운 계절입니다. 어른의 품위를 보여줄 만한 옷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죠. 더위를 잘 타서 롱 슬리브나 롱 셔츠는 엄두도 못 내고, 바지는 늘 청바지뿐이라 땀을 뻘뻘 흘리며 회의나 행사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그나마 대안은 '린넨 셔츠'였지만, 대한민국과 지중해는 멀기 때문에 '겨우 버틴다' 수준일 뿐, 완벽한 데일리 아이템은 아니었습니다.

이럴 땐 '카라'가 마법 같은 디테일이 됩니다. 밋밋한 넥라인에 카라 하나만 있으면 신뢰와 품격을 동시에 챙길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한때는 폴로 셔츠만 사 모으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군 제대 후 복학 무렵, 필자는 점점 어른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고, 그때 카라는 중압감을 버티게 해주는 든든한 조력자였습니다. "지정현, 어서 날 입어라. 그래야 네가 어른 티 좀 낼 수 있단다!"

폴로 셔츠는 특유의 정숙함 때문에 이런 유치하거나 과감한 패턴을 소화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폴로 셔츠도 결국 애물단지가 됐습니다. 우선 문제는 필자의 노안 얼굴이었죠. 폴로 셔츠를 입고 캠퍼스를 걸으면, 최소 대학원생 아니면 젊은 교수쯤으로 보였습니다. 핑크빛 복학 라이프를 꿈꾸던 청춘에겐 치명적이었어요. 어른이 되고 싶었지, 나이 들어 보이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폴로 셔츠는 깔끔한 디자인 일색이었습니다. 실루엣을 달리하거나 로고를 바꾸는 정도가 전부였죠. 재밌는 그래픽이나 다채로운 스트라이프 패턴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쇼핑 목록에서 폴로 셔츠는 빠져버렸습니다. 게다가 골프에도 큰 흥미를 못 느끼는 탓에, 폴로 셔츠를 입을 이유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어른의 조건 3

“위스키는 한 번쯤 모아봐야 한다.”

지인이 선물해 준 위스키와 값이 꽤 나가는 맥주들. 손님이 왔을 때 꺼내는 정도일 뿐, 즐긴다곤 하기 어렵습니다.

위스키가 한창 인기를 끌던 때, 친구들과 모이면 자연스레 위스키가 대화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위스키는 배우고 경험할수록 깊어지는 세계였기에. 어깨너머로 듣는 이야기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고백하자면 ‘위스키 맛을 모르면 어른도 아니야’라는 얄팍한 편견도 조금은 가지고 있었고요.

다행히 주변에 위스키를 좋아하는 지인들이 많아, 지식에 비해 비루한 미각으로도 좋은 위스키를 몇 번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테이스팅 노트를 하나하나 분석하며 설명해줄 때, 저는 미간을 잔뜩 좁히고 그 맛을 느끼려 했지만 영 잘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돈을 안 써서 그런가’ 싶어 큼지막한 버번 위스키를 사서 한 달 동안 혼자 마셔보기도 했습니다만, 얻은 결론은 딱 하나였습니다. ‘잠이 잘 온다.’

알코올의 효능은 맥주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혼자 즐기는 술이라면? 역시 맥주만 있으면 됩니다.

위스키의 매력은 충분히 느꼈습니다. 스카치, 버번, 피트… 종류도 익혀서 누군가 설명만 해준다면, 그 맛을 느끼기 위해 집중할 수도 있었죠. 다만 필자에게 위스키가 주는 가장 큰 기쁨은 모으거나 음미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위스키를 매개로 만들어지는 공간의 분위기, 그리고 함께 마시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더 즐거웠거든요. 오롯이 위스키를 즐기기 위해 마련된 조건들, 그런 것들은 대개 날카로운 취향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일본에 여행을 갈 때마다, 동네 바에 들러 위스키 한 잔을 시킵니다. 일종의 자릿세라고 생각하면서요. 마스터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엔 편의점 맥주를 삽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스키를 모으고 즐기는 어른이라기보단, 위스키를 핑계로 떠드는 어른이 돼버렸습니다. 필자에게 필요한 위스키의 깊이는 딱 그정도면 충분합니다.


어른의 조건 4

“자기계발서는 어른이 되는 지름길.”

아직 뜯지도 않았지만, 기능적인 책들은 아닙니다.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필자에게 주식이나 비트코인은 거의 하나도 모른다고 해도 될 만큼 무지한 분야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어디서부터 귀 기울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살다가는 결혼은커녕 재산도 못 모아 전전긍긍하는 어른이 되겠다는 조바심이 들었습니다. 무작정 서점에 가서 경제·테크 코너에 있는 책들을 펼쳤죠. 부자가 되는 법, 주식 투자의 기초, 코인 경제학… 호기롭게 책장을 넘기며 다짐했습니다. “부자가 되리라. 나도 주식으로 돈을 벌어 부를 축적하리라.” 되뇌이면서요.

책을 내려놓기 딱 5분 걸렸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문학·잡지·취미·여행 코너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결국 계산대에 올린 건 재즈 에세이, 데님 아카이브북, 단편 만화집이었죠. 가방에 책을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유튜브에서 ‘주식의 기본’을 검색했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마음이 따라주질 않아, 재즈 에세이에 나온 추천 곡 리스트로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자기계발서를 완독하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분야에서 제 취향을 더 깊게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큰 것 같네요.


어른의 조건 5

“모자는 급할 때만 써야 한다.”

모자를 계속 삽니다. 각자 다른 이유로 산 모자들입니다.

어른의 모자는 실용적인 목적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동기가 "머리 안 감았어?"라고 물어본 이후였죠. 멋을 부리거나 패션 아이템으로만 생각하던 제겐 꽤 신선한 접근이었습니다. 지각을 해서 머리를 감을 여유는 없는데 시간을 지켜야 할 때, 모자는 어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도구가 된 셈이었죠.

그래서 한동안은 모자를 아예 쓰지 않기도 했습니다. 괜히 어려 보이거나 가볍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됐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틈만 나면 모자를 사 모읍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나, 오늘 옷차림이 심심해 보일 때 모자를 쓰면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위스키 대신 모자를 모은다고 생각하니, 이것도 충분히 취미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울리는 모자를 고를 줄 아는 눈까지 생겼으니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복장이 자유로운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2호선 출근길에 올라타면, 시청까지는 깔끔한 정장이나 세미 캐주얼 차림의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모자에 샌들, 백팩까지 멘 제 모습은 확실히 달라 보였습니다. 처음엔 ‘표준에서 벗어났다’는 기시감도 들었지만, 마포구에 가까워질수록 저처럼 캐주얼한 복장의 직장인들을 마주하면 은근 안심되곤 했습니다.

어른이 할 법한 물건을 사고, 새로운 취미에 도전해 보면서 깨달은 건, 결국 각자의 분야에서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을 뿐 ‘표준’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경험해 보고,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 시간을 들이며 쌓아가는 것이 성숙이지, ‘어른 면허’를 따는 지름길 같은 건 없으니까요. 표준만 좇다 보면 즐기지도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불행해지기도 하고요.

요즘의 필자는 관심 분야를 나보다 훨씬 깊이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른’이라 느낍니다. 그 정도의 가이드라인만 있다면, 누구든 각자가 원하는 모습의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부자는 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