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에디터'라 부를 수 있을까?
에디터를 꿈꾸게 했던 콘텐츠를 돌아보며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전성 시대입니다. 이제는 매거진이 지녔던 거의 모든 기능이 인스타그램으로 옮겨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접근성, 시의성, 도달률. 그 어느 것도 종이 잡지가 따라가기 어렵죠. 여기에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으니, 더 나은 콘텐츠를 빠르게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다루는 주제도 놀랍도록 다양합니다. 해외 잡지에서나 볼 법한 서브컬처를 심도 있게 탐구하는 계정이 있는가 하면, 인쇄 매체였다면 하나의 특집으로 묶였을 주제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매거진도 있습니다. 트렌드가 식기 전에 한 발 앞서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라이트한 유저까지 사로잡을 수도 있고요.
필자는 종이 잡지의 시대를 이끌던 에디터들을 동경했습니다. 잡지를 좋아했고, 그들처럼 글을 써내리고 싶었습니다. 잡지사에 취직해 여러 간행물을 만들던 시절에는 ‘에디터는 기획자다’라는 선배들의 말을 자연스레 받아들였습니다. 인쇄 매체의 약화로 인해 에디터의 역할이 ‘종이 잡지’를 넘어 다양한 플랫폼으로 확장되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어느새 에디터라는 직업은 하나의 직함이 아니라, 콘텐츠를 기획하고 구성하는 능력으로 정의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회사 밖으로 나와 인스타그램을 기반으로 콘텐츠를 직접 만들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여전히 ‘에디터’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커졌습니다. 익숙한 종이 잡지의 호흡으로는 이 빠른 플랫폼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나에게 ‘에디터’란 무엇인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처음 에디터를 꿈꾸게 했던 콘텐츠들을 다시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잡지의 사생활>
박찬용

<잡지의 사생활>은 잡지사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처음 샀던 책입니다. 그때 필자는 절박했습니다. 잡지 말고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정작 잡지사에 들어가는 방법도, 에디터가 되는 법도 알려주는 이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잡지의 사생활>을 교본처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책은 잡지에 대한 기초적인 질문부터, 인쇄 매체가 쇠락과 변화의 기로에 선 현실까지 생생하게 담고 있습니다. 지면을 할당받고, 취재를 나가, 페이지에 필요한 사진과 물건을 수급해 한 권의 결과물로 엮는 과정이 세세히 나타나 있죠. 수익을 위한 광고주와의 조율부터, 마감에 쫓기는 긴박함 등 에디터로서의 고충도 담겨 있습니다.
잡지는 에디터만의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페이지를 만드는 데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죠. 이 책에는 교정사, 포토그래퍼, 동료 에디터와 나눈 대담도 수록되어 있어요. 문장을 가다듬고, 지면에 어울리는 사진을 찍는 복잡한 공정을 지나야, 잡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해준 대목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저는 '마스터 헤드'나 '캡션'에 있는 이들의 이름을 꼼꼼히 읽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회사에 들어가 잡지를 만들 때도, 항상 캡션 그 이상의 노고를 보내주신 분들을 기억하면서요.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
"흔히 인터넷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긴 글을 안 읽게 됐다는 말도 하는데 내가 체험하기로는 반대다. 사람들은 긴 글을 끝까지 읽고, 성의 있는 답글을 달고, 내가 간과했던 일에 대해 타당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의 이 글을 여기까지 읽는 당신이 그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 박찬용, <잡지의 사생활>, 세이지, 인터넷은 잡지업계를 망가뜨렸을까?, p.167
<뽀빠이>
매거진 하우스
<뽀빠이>은 명실상부 일본 매거진을 대표하는 잡지입니다. 그 이름 하나만으로 이미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죠. 필자도 신간이 나올 때마다 한 권씩 사 모으고 있습니다. 뽀빠이는 패션 매거진이지만, 실제로는 ‘라이프스타일’을 다루는 잡다한 잡지라고 정의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뽀빠이>가 기존 패션지와 다른 이유는 특정 시즌이나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만든 ‘시티보이’라는 페르소나에 맞춰 주제를 고른다는 점입니다. 거의 모든 분야의 주제를 다루는데요. ‘샌드위치 특집’처럼, 샌드위치만을 다룬 호가 있을 정도죠. 지금 필요하다고 느낀 주제라면, 끝까지 파고드는 집요함이 바로 뽀빠이의 매력입니다.
또한 복잡하고 아기자기한 내지 디자인으로도 유명해요. 낙서하듯 촘촘히 흩뿌린 활자, 스티커처럼 얹힌 작은 사진과 캡션, 그리고 빽빽한 정보의 압력은 <뽀빠이>만의 시그니처 레이아웃입니다. 가독성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쏟아내듯 이어지는 사진과 글의 밀도는 인쇄 매체만이 구현할 수 있는 디자인입니다. ‘이런 주제를 누가 다뤄?’ 싶은 키워드를 망설임 없이 펼쳐내고, 그 아래 취재로 채운 디테일을 집요하게 기록하는 것. 매거진과 에디터의 진짜 매력은 이런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요?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
현대미술 잘 모르겠어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변기 이야기부터, 저 그림이 비싼 이유까지. 우리들의 17가지 의문에 대해 미술가 유키무라 야스마사 선생님이 대답해 주셨다. 모른 척 지내는 것도 괜찮지만, 이젠 슬슬 알아둘 때가 된 것 같습니다.
– 케이스케 가기와다, <뽀빠이> 2016년 12월호, 내가 좋아하는 아트, p99
<맥심>
와이미디어

잡지를 가장 많이 읽었던 시기는 군복무 시절입니다(고루한 군대 이야기라니, 하지만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군대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잡지가 바로 <맥심>이죠. 아시다시피 <맥심>은 남성지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동차, 게임, 만화, 스포츠, 섹스 등 남성을 타깃으로 한 종합 오락지죠. 혈기왕성한 청춘들이 모인 공간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했습니다. 필자는 그때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맥심을 자주 읽었습니다.
맥심은 재밌습니다. 굳이 노출이 있는 페이지를 덜어내더라도요. 오락지답게 다루는 분야도 넓고, 무엇보다 매체 특성상 직설적인 워딩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 에디터들의 솔직한 목소리가 그대로 담겨 있어요. 예를 들어 네크로필리아(시체성애자)들의 에피소드를 모은 기사에는 리드 문장이 단 한 글자뿐이었습니다. “미친놈들.”
요즘은 더 이상 오락지를 찾아 읽지 않습니다만, 그 시절의 맥심은 즐거운 일탈이었습니다. 잡지를 ‘삶을 이롭게 하는 매체’로만 생각했던 필자에게, ‘모든 잡지가 꼭 진지할 필요는 없구나’라는 깨달음을 준 순간이기도 했고요. 에디터의 관점은 결국 솔직함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배웠던 것 같습니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
한 편생 이런 골때리는 그림만 그리셨으나 일상은 매우 조신하셔서 치바현의 산속에서 아내와 함께 독서와 꽃꽃이로 말년을 보내시고 74세의 나이로 타계.
– 칼럼니스트 삼도, <맥심 코리아> 2023년 8월호, 에로와 공포 사이, 에로구로의 세계, p80
<미스터 포터>
미스터 포터 편집부

<미스터 포터>는 영국의 남성 럭셔리 쇼핑 플랫폼입니다. 디자이너 브랜드는 물론, 리빙 아이템까지 폭넓게 다룹니다. 그러나 이 플랫폼의 진짜 강점은 제품을 소개하는 방식에 있어요. 미스터 포터는 단순한 커머스가 아니라 하나의 미디어처럼 움직입니다. 별도의 저널 페이지를 운영하며, 자신들만의 에디토리얼 콘텐츠를 통해 소비자에게 ‘무엇을 살까’보다 ‘어떻게 살까’를 제안합니다.
동명의 단행본 <미스터 포터>는 남성의 스타일, 그루밍,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책입니다. 데이비드 호크니처럼 남성 패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사의 인터뷰부터, 클래식 아이템을 제대로 소화하는 방법에 대한 칼럼까지 폭넓게 담겨 있죠. 중간중간 배치된 추천곡 플레이리스트나 건강한 운동법 같은 짧은 코너는, 미스터 포터가 말하는 ‘스타일’이 단순히 옷차림을 넘어 ‘멋진 삶을 사는 법’임을 상기시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에디터의 기획력이란 분야를 초월해 ‘하나의 제안’으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걸 다시금 느꼈습니다. ‘재즈를 제대로 듣는 법’처럼 패션과 직접적 관련이 없어 보이는 주제도, 그들은 ‘멋진 남성이라면 알아야 할 덕목’처럼 설득력 있게 엮어내죠. 자신들이 무엇을, 어떤 시선으로 다루고 있는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
숙적들 초대하기 파티의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손님 목록을 짜는 것에는 일종의 외교술(?)과 융통성이 필요하다. 어느 누구도 파티에서 예상치 못한 언쟁이나 싸움이 생기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 로빗 스콘 로슨, <미스터 포터 VOL.1>, 미스터 포터 편집부, 근사한 파티를 여는 법, 쉽게 범하는 실수, p193
원고를 쓰기로 마음먹은 뒤로, 잡지와 관련된 일이 연달아 있었습니다.
며칠 전, 잡지를 구경할 겸 들른 수입 잡지 서점에서 라이트닝 매거진을 뒤적이고 있던 제게 사장님이 말을 걸었습니다. “살 수 있으면 지금 사두는 게 좋아요. 환율이 계속 오르거든요.” 덧붙여 “요즘은 예전만큼 잡지가 들어오지 않아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시로 잡지를 팔아서는 수익을 내기 어렵다 보니, 발행 주기를 늘리거나 구독제로 전환해 회원에게만 판매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는 <잡지의 사생활>의 저자 박찬용 에디터님이 슐틔르미디어(sulturemedia)에 기고한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미래’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인쇄 매체의 가치보다는 ‘왜 인스타그램 매거진을 만드는가’에 대한 개인적인 고찰에 가까운 글이었는데, 그 안에서도 매체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에디터님께선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한계를 ‘자신만의 플랫폼이 없다는 점’으로 짚으셨죠.
그다음은 에디터 선배와의 대화였습니다. “인스타그램 매거진이 잘 되는 게 서글프다(술을 마셨었습니다).”라고 하자, 선배는 또 다른 선배와 술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를 꺼내며 “매거진이면서도, 매거진으로서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 신묘한 것이죠.”라고 답했습니다. 선배가 꼽은 매거진의 기능은 ‘아카이브’였습니다. 그 말에 이마를 탁 쳤죠. ‘나는 오래 기억될 만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요.
원래 이 글의 결문은 '안나 윈투어의 은퇴'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의 시나리오 소식을 접한 참담한 심정으로 마무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원고를 준비하면서 만난 이들과의 대화, 소개할 책들을 하나하나 들춰보면서 '그렇게 참담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에디터가 하는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전성 시대는 ‘에디터’라는 직업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에디터로 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합니다. 환경은 변했지만, 자신만의 목소리로 좋은 것을 알리고 싶은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무수히 등장하는 인스타그램 매거진이 그 증거이죠. ‘에디터’와 ‘기획자’가 뒤섞여 쓰이던 시기를 지나, 이제야 비로소 ‘에디터’라는 정체성이 다시 분리되어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실물 잡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필자처럼 이따금 책장을 열어 ‘이 기사 정말 멋졌어’ 하고 되새기는 사람이 분명 있을 테니까요. 잡지를 만든 분들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기리는 마음으로, 모든 인용문에는 에디터 혹은 저자의 이름을 함께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