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 밖의 음악
연주자 사이에 흐르는 것

무대 위. 연주자들이 서로를 바라봅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짧은 미소를 주고받습니다. 아직 첫 음이 울리기 전이지만 음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서로의 호흡을 읽고,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특별한 흐름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같은 집에서 자란 두 음악가
이혁 × 이효

형 이혁과 동생 이효. 일곱 살 차이의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함께 곁에 두고 자랐습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연습과 소리를 가까이에서 접해왔죠.
두 사람의 연주는 닮은 듯 닮지 않았습니다. 이혁은 2021년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결선 무대에 올랐고, 이듬해 롱티보 콩쿠르에서 일본 피아니스트 마사야 카메이(Masaya Kamei)와 공동 우승하며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는 콩쿠르를 “경연의 장이 아닌 하나의 페스티벌”로 생각한다며 “과정 자체를 즐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연주는 긴장과 서정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룬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한편 이효의 연주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섬세하면서도 탄력이 있고, 절제가 느껴지면서도 어딘가 자유롭습니다.
2025년 쇼팽 콩쿠르에 함께 도전한 형제는 준결승까지 진출했고, 연주가 끝나면 포옹하며 서로를 뜨겁게 응원했습니다. 그 모습은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충분해 보입니다. 이 무대가 경쟁이기 이전에 무엇이었는지, 굳이 말로 덧붙일 필요 없이 말이죠.
다가오는 5월, 형제는 한 달 안에 두 번 함께 무대에 오릅니다. 듀오 리사이틀과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으로요. 각자의 방식으로 경험을 쌓아온 두 사람이 이제 하나의 음악으로 만나는 순간입니다.
이혁·이효의 연주,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2020)
공연 정보
5월 24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5월 28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가르침이 끝난 뒤
김대진 × 문지영

스승 김대진과 제자 문지영이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유니버설뮤직이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 음반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작품집]을 녹음하기 위해서였죠. 네 손이 건반 위에 함께 놓이자, 이들은 자연스럽게 선율을 시작하고 이어받습니다. 이들이 주고받는 음악적 대화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두 사람이 오랜 시간 같은 음악을 이야기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대진·문지영 연주, 슈베르트 ‘그랜드 론도’ A장조 D.951, 환상곡 f단조 D.940’(2017)
김대진은 기본기와 근거를 바탕으로 작품의 구조와 배경을 이해해야만 창의적인 해석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평론가들이 문지영의 연주에 대해 가장 자주 언급하는 특징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채로운 감정 표현, 입체적인 해석, 설득력 있는 음악 구조.’ 같은 말이 스승의 연주에도 있고 제자의 연주에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무대에서, 서로 다른 작품을 연주하면서도요.
봄과 가을, 두 사람은 각자의 무대를 펼칩니다.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두 음악이 얼마나 닮았고, 또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들어볼 기회입니다.
공연 정보
4월 19일 오후 4시 거암아트홀
11월 12일 오후 7시 30분 금호아트홀 연세
음반 정보
김대진·문지영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작품집]
음악이 만든 자매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 × 솔 가베타

바이올리니스트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Patricia Kopatchinskaja)와 첼리스트 솔 가베타(Sol Gabetta)는 20년 넘게 이어진 우정을 바탕으로 여러 무대에서 함께 연주해 왔습니다. 두 연주자는 인터뷰에서 서로를 “무대 위에서도, 삶에서도 자매 같다”고 말합니다. 혈연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함께 연주하며 쌓인 신뢰가 그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죠.
코파친스카야는 때때로 프레이즈를 예상보다 길게 확장하거나 순간적으로 압축시키고, 솔 가베타는 파트너의 흐름에 유연하게 응합니다. 이들은 서로의 움직임을 밀어 올리며 긴장감을 쌓아나가죠. 두 악기 사이에서 튀어 오르는 에너지는 어느 쪽이 먼저 만들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뒤섞입니다.
코파친스카야·가베타 연주, 라벨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소나타 M.74, 4악장(2014)
두 사람의 듀오 음반 [Sol & Pat]에는 바흐(J. S. Bach), 라벨(M. Ravel), 코다이(Z. Kodály), 즈빈덴(J. Zbinden) 등의 작품이 담겨 있습니다. 영국의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이 음반을 두고 “두 음악가의 음악적 만남은 완벽에 가까우며, 절제와 자유로움이 놀랍도록 조화를 이루고 있다”라고 평했습니다. 올가을 두 사람이 함께 한국을 찾을 예정이니, 이들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연주를 직접 확인해보는 건 어떨까요.
공연 정보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솔 가베타 듀오 리사이틀
10월 2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음반 정보
끝난 관계, 계속되는 협연
샤를 뒤투아 × 마르타 아르헤리치

지휘자와 피아니스트가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기로 하죠. 그러나 이들의 무대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지휘자 샤를 뒤투아(Charles Dutoit)와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의 이야기입니다. 1969년 결혼해 1973년 이혼했으니 이들의 부부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지만, 무대 위의 협업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르헤리치의 연주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긴 선율을 유려하게 노래하다가도 소리의 무게를 순간적으로 달리하며 분위기를 전환합니다. 그 변화는 즉흥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전체 음악의 흐름 안에서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습니다.
뒤투아는 그런 순간에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추는 지휘자입니다. 아르헤리치가 음악을 밀어붙이면 오케스트라의 방향을 그에 맞추고, 연주가 잠시 숨을 고르면 그 여백을 유지합니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호흡은 오랜 협연을 통해 쌓아온 감각으로 읽힙니다.
샤를 뒤투아·마르타 아르헤리치 연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2014)
어느덧 두 사람은 모두 여든을 넘겼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아르헤리치의 공연 일정은 취소되거나 변경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그만큼 두 사람이 같은 무대에 서는 장면 자체가 점점 보기 드문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올가을 두 사람은 KBS교향악단과 함께 한국 무대에 오릅니다. 프로그램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두 연주자가 오랫동안 함께 협연해 온 만큼 어떤 작품이 무대에 오를지도 관심이 모입니다.
공연 정보
샤를 뒤투아/KBS 교향악단(협연 마르타 아르헤리치)
2026년 11월 21·22일 롯데콘서트홀
음반 정보
샤를 뒤투아/몬트리올 심포니(협연 마르타 아르헤리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2번]
연주를 마친 연주자들은 관객을 향해 인사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눈짓하고, 가볍게 포옹하고, 천천히 무대 뒤로 걸어 나갑니다.
관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객은 그 관계를 듣습니다. 같은 집에서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자란 형제가 만든 연주, 어느덧 연주자로 성장한 제자가 스승과 나란히 앉아 만든 연주, 서로의 어떤 움직임도 받아낼 수 있다는 신뢰가 만든 연주, 삶이 달라진 뒤에도 무대 위에서 이어지는 대화가 만든 연주를요.
이러한 것들은 악보에 표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이 있는 연주와 없는 연주는 다르게 들립니다.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들은 악보에 없는 것도 나눌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그것은 들은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