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처럼': 아수라가 되어야만 했던 시대

행복한 얼굴 아래 숨겨진 1970년대 여성들의 이야기

'아수라처럼': 아수라가 되어야만 했던 시대
© Netflix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수라처럼』은 1979년 원작 드라마의 리메이크로, 불륜이라는 소재 때문에 많은 국내 시청자들로부터 피상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한국의 일부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이 작품을 단순히 '불륜 드라마'로 규정하고 외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작품의 시대적 맥락을 완전히 놓치는 오류다. 『아수라처럼』은 단순한 불륜 이야기가 아니라, 1970년대 일본 사회에서 여성들이 경험했던 억압과 갈등,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내면화해야 했던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원작의 극본을 쓴 무코다 구니코의 열렬한 팬임을 밝힌 만큼 팬심으로 『아수라처럼』을 제작했을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비록 사회가 변했어도 여전히 여성들이 직면하는 구조적 불평등과 내면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현대의 관객들이 단순히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키워드에 매몰되어 작품을 판단하는 것은, 누구보다 가족의 관계를 잘 다루는 고레에다 감독과 유명 배우들이 보여주는 앙상블을 놓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수라' 억압된 감정의 상징

© Netflix

『아수라처럼』은 1979년 도쿄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삶을 사는 네 자매가 노년인 아버지의 불륜을 알게 되면서 행복한 얼굴 아래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서서히 분출되는 과정을 그린다. 아버지 외에 차녀 마키코의 남편 타카오(모토키 마사히로 분)도 외도로 의심받는 상황이 다소 연출되는데, 결국 이 작품의 핵심은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억눌러야 했던 현실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렇게 네 자매는 아버지라는 공통된 매개체를 통해서 부딪히는 상황들이 잦아지며 미워하고 시기하고, 때론 사이좋게 지내며 또다시 나빠지기도 한다. 결국 이 각각의 관계성 속에서 내면의 성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복잡성을 띤 관계는 불교에서 다양한 감정을 내포하는 '아수라'를 빗대어 상징한다. 드라마 속 네 자매는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모두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타협하고 저항하며 살아가는 아수라같은 존재들이다.

침묵을 강요받은 시대

© Netflix

1970년대 일본 여성들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일본 사회는 대체적으로 가부장제 성향이 강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한국보다 남녀 사이의 신체적, 문화적 차이에 대한 결정론적 사고방식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남존여비'가 극복해야 할 적폐 중 하나로 인식되었고, 당시 여성운동도 있긴 있었으나, 지위향상의 목적이라기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운동 정도로 봐야 했으며 여성운동이라 하기에는 그 성격 또한 약하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일본 사회는 '남자는 직장에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돌본다'는 고정 관념이 매우 강했고, 여성은 직장이 있어도 결혼 후 출산, 육아 등 가사일을 전담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직장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기 어려웠다. 드라마 내에서도 일하고 있는 여성은 극소수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여성들은 분노하고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거나 이혼을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이혼 여성에게 경제적 자립은 불가능할 뿐더러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대신 그들은 그 감정을 억누르고,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운 가정을 유지하는 '아수라'가 되어야만 했다. 오늘날 현대의 페미니즘 관점에서 드라마 속 인물들이 '웃고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고 답답해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시대적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각자만의 생존 방식

© Netflix

네 자매는 이런 억압적 현실 속에서도 각자 나름의 삶을 이어간다. 장녀 츠나코는 남편과 사별하고 꽃꽂이 강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유부남과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가고, 차녀 마키코는 샐러리맨 남편과 중학생 자녀를 둔 평범한 가정주부이지만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며 불안에 떤다. 삼녀 타키코는 면치레하며 남성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 척하는 결벽증 환자로 아버지의 외도를 발견하는 탐정과 사랑에 빠진다. 막내 사키코는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며 부잡스러운 무명 복서와 동거를 한다.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억누르며 살아가는 각자만의 생존방식을 보이며 살아간다. 단, 한 캐릭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삼녀 타키코: 독립적 여성상의 희망 © Netflix

삼녀 타키코는 네 자매 중 가장 독립적이면서 전통적인 여성상을 벗어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도서관 사서로서 지적 독립성을 가진 직업을 가졌으며, 결혼이라는 제도적 압박에 저항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가 아버지의 외도 사실을 알고도 자존심을 지켜줘야 한다고 외면했을 때,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파헤치는 행동력을 가진 흔히 현대적 여성상을 가리킨다. 물론 후에 카츠마타(마츠다 류헤이 분)와 결혼을 하긴 하나 다른 자매들과 달리 가부장적 질서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의 선택으로 사랑에 빠지고, 오히려 카츠마타가 타키코의 집으로 들어와 사는 등 상대적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결국 『아수라처럼』은 단순히 피해자로서의 여성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타키코처럼 현대적이고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려는 독립적인 캐릭터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전쟁터

© 20th Century Studio Korea

무엇보다 『아수라처럼』은 자매들 사이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면서도, 괴로워하는 모습을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는 마음, "내 동생은 나만 괴롭힐 수 있다"는 식의 모순된 애정까지. 이처럼 갈등과 애착이 뒤엉킨 인간 군상을 통해 아수라의 여러 얼굴처럼 다면적인 여성상을 그려낸다. 가족과 결핍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은 「미스 리틀 선샤인」이었다. 미워하고 질투해도 결국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밀고 끌며 나아가는 모습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족'이라는 키워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다루는 고레에다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의 팬이라면 불륜이라는 키워드에 매몰되어 이 작품을 지나칠 이유는 없다.

연기력으로는 단연 아오이 유우를 꼽을 수 있겠는데, 공부만 해온 따분한 사람을 그대로 복사해냈다고 할 정도로 디테일한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유명 배우들이 펼치는 앙상블과 마츠다 류헤이의 어딘가 어벙한 연기도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특히 칼같이 똑부러지는 타키코와 우유부단한 카츠마타의 대비가 이 커플을 보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마치며

© Netflix

결론적으로 이 작품을 현대적 가치관으로만 판단하려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불륜을 당하고도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여성, 유부남과 관계를 맺는 여성의 모습이 현재 기준으로는 비판받을 수 있지만, 이는 시대적 맥락을 간과한 해석이다. 당시 여성들에게 이혼은 사회적, 경제적 죽음과 다름없었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 또한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생존하며 저항했던 것이다. 『아수라처럼』은 이러한 여성들의 가혹한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단순히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유부남과 관계를 맺는 장녀의 복잡한 욕망이나 독립적 자아를 실현하려는 타키코 같은 인물들을 통해 오히려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이야기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