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기
애도를 다룬 영화 세 편
상실. 잃을 상(喪)과 잃을 실(失), 무려 두 번의 '잃음'으로 이뤄졌습니다.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고 헤어지게 되거나,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고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죠. 실제로 우리는 살면서 잦은 만남과 이별을 경험하기 때문에, 이를 제법 익숙하게 받아들이거나 그 충격에 점점 무뎌지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상실은 몹시도 사무쳐서 그 여운이 아주 짙고, 결국 깊은 상심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때 그 사람이 떠나기 전, 어떻게 하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을까.
상대뿐 아니라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이 숙제 같은 마음. 우리는 그 고통에 그저 중독되거나 애써 도망치며 모르는 척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 기억을 제대로 대면하지 않아서, 그 감정의 끝까지 가보지 않아서, 이런 딜레마를 겪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이유도 모를 분노와 후회, 우울과 회피에 그저 사로잡히는 거죠. 무엇이 진심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요.
지금부터 소개할 작품들은 이 문제를 끝까지 밀어붙이고 그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애도'의 영화들입니다. 힘들었던 순간들을 곱씹고 생각을 정리하며, 우울과 절망을 넘어 마침내 현실로 나아가는 담백한 이야기들. 많은 망설임의 끝에 오롯하게 슬퍼하는, 건강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애도'의 순간들을, 한번 만나볼까요?
찬란한 기억 속 그림자를 찾아서, 애프터썬

모처럼 만난 아빠와 함께하는 특별한 여름 방학. 스코틀랜드를 떠나 터키에 도착한 11살 소피는 나른하고도 반짝이는 날들을 보냅니다. 둘만의 여행답게 같이 자고, 먹고, 놀고, 얘기하는 동안 잊지 못할 추억들도 쌓여가죠. 호텔과 수영장, 바다와 관광지에서 나눈 두 사람의 장난 어린 시간 중 일부는 캠코더에 그대로 기록됩니다. 하지만 31살 소피가 그날을 계속해서 돌아보는 건, 그 밖의 여남은 기억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아빠는 ‘왜’로 귀결되는 행동들을 참 많이 했습니다. 딸을 아직 어린아이로 여기는 듯하다가도, 제 몸 하나 지킬 수 있게끔 자꾸만 단도리 시켰죠. 아직도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것 같은데 어떤 부분에서는 단호하게 거리를 두기도 하고요. 한없이 유쾌하다가도 뻣뻣하게 굳어버릴 때, 이해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 민망함과 어색함에 이어, 짜증까지 밀려오곤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제 막 사춘기라 자기중심적이 되다가도, 한 번씩 마음에 걸리던 이상 기류가 있었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고 우울해 보이던, 그래서 애를 쓰는 것 같던 아빠의 태도. 관객들은 그 시절 소피는 미처 몰랐을, 그의 속사정을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불현듯 아슬아슬한 상황에 부닥치길 자처하는 순간들. 이는 끝내 사라져 버린 아빠에 대한 상상이자, 비슷한 나이의 부모가 되기까지 수없이 시도했을 딸의 헤아림이기도 합니다.

점멸하는 시야 속 무아지경으로 춤추는 캘럼에게 내던지는 말들과 헐떡이는 그를 한사코 붙잡아 보는 행위들.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긴 아빠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은 여전히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혼란스러움으로 찾아오곤 합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서로를 돌보는 방식마저 닮아가던 때가 있었기에. 그을린 살갗을 진정시키는 애프터썬처럼, 당신의 위로이자 든든함이 되려던 순간은 진심이었기에. 결국 소피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이야기의 닫힌 문을 종종 열어볼 것입니다.
샬롯 웰스 감독은 그러한 딸의 모순적이고도 사실적인 애도를 파편적인 기억의 결을 따라 천천히 따라갑니다. 마치 아빠가 제게 물려준 카펫의 문양 속 사연을 읽어 내려가듯, 흐릿하고도 선명하게 직조된 20년 전의 장면들을 더듬으며, 다시 한번 캘럼을 되새기고 또 보내주려는 순간들을 주시하면서요.
침잠한 말들을 꺼내보며, 드라이브 마이 카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와 시나리오 작가인 오토는 사뭇 긴밀해 보입니다. 가후쿠는 몽유병처럼 읊는 오토의 각본을 기억해 두었다가 복기시켜 주죠. 오토는 가후쿠의 리듬에 따라 대사 연습을 도울 녹음본을 항상 준비해 둡니다. 서로의 언어이자 일상이 되어 주는 사이. 우연히 아내가 젊은 배우와 외도하는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남편과 형식적으로 몸을 섞는 듯한 무표정을 보지 않았다면. 그 미묘한 틀어짐은 눈치채지 못했겠죠. 그러나 미처 이유를 듣기도 전에, 오토는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 그리고 풀리지 않는 의문.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배신할 수 있었을까. 어린 딸을 잃은 후 얻게 된 공허함 때문이었을까. 단순히 작품을 이어가기 위한 은밀한 방법이었을까. 아니면 온전히 오토가 숨기고 있던 가장 본능적이고 내면적인 욕망이었을까. 그 마음속엔 무엇이 휘몰아치고 있었을까. 이제는 영영 물을 수 없어 허망하게 지냈을 가후쿠에게 2년 후, 하나의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히로시마 연극제의 연출을 맡으면서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준비하게 됐기 때문이죠.
운전기사로 만나 매일 통근을 함께하는 미사키는 천천히 쌓아 올린 신뢰 속에 툭 털어놓는 대화를 가능케 합니다. 애정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아내, 떠나야 했지만 완전히 잊을 수 없는 엄마. 그들의 죽음을 빚진 각자의 복잡한 사연을 담담히 서술할 때, 해갈되는 체증이 있습니다. 이는 오토의 숨겨둔 파트너, 다카츠키와의 대면에서도 마찬가지죠. 연기와 일상에서 자유분방한 그에게 느꼈던 은근한 질투와 원망은, 그를 통해 새로 알게 된 오토의 모습과 다소 회피적이었던 자신을 돌아보며, 일련의 정화로 이어집니다.

한편, 가후쿠는 '바냐'로서 그동안 절제했던 생각과 감정의 일부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튀어나오고 만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습관처럼 끊임없이 읊었을 대사를 온전히 체화한 것이죠. 삶이라는 모순과 고뇌, 타인과 나에 대해 흔들리는 신념을요. 한국인 유나 역시, 소냐 역을 맡으며 유산으로 가라앉아 있던 몸을 다시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수어 연기는 또 다른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으로 이어지죠. 그렇게 서로 다른 입장과 언어로 소화한 이 연극은 소통의 한계를 뛰어넘은 위안을 선사합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장장 40분이 지나서야 올라갔던 크레딧. 이는 이번 이야기가 죽음을 겪은 후, 남은 자들의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빨간 사브 900이 밤낮으로 달리는 동안, 지나갔던 어두운 터널과 들렸던 경유지는 기나긴 애도 속 계속해서 이어질 인생길을 표현하죠. 그렇게 무수한 기억과 오해를 안고도, 이해하며 용기 내 다시 살아보자고, 천천히 고요히 설득해 내면서요.
그날의 감정이 드리운 자리, 센티멘탈 밸류

그 집에는 예전부터 쉽게 메울 수 없는 균열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은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방을 두고도, 그곳에서 가정을 꾸리다가 결국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두 자매는 언제부턴가 부모의 싸우는 소리로 가득 찼던 이 공간이, 이상할 정도의 침묵에 휩싸이는 것을 지켜보다 독립했죠.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이별들. 그렇게 한참을 메말라 있던 가족들의 감정에 불현듯 변화가 찾아옵니다. 아내의 장례식이 되어서야 얼굴을 비추더니, 대뜸 큰 딸에게 너를 위해 쓴 거라며 대본을 내밀던 아빠. 바로 여기서부터요.

노라는 연극을 통해 밀려드는 의문과 분노를 회피 중이었습니다. 고전 작품 〈메데이아〉의 빛나는 주연이지만, 매번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무대에 서곤 하죠. 학생 시절에 자신의 에세이 대신 〈갈매기〉의 독백 씬으로 본인을 표현했던 것처럼, 여전히 극 상의 인물이 되어 감정을 토로하고 대사를 외치는 게 더 편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등장한 아빠 때문에 애써 유지하던 평정심이 무너지기 시작하죠.
성공한 영화감독이 된 구스타프는 드디어 오랫동안 잊을 수 없던 그 순간을 각본으로 재현해 냅니다. 촬영하는 내내 부정하지만, 이 작품은 자기를 홀로 두고 떠난 엄마의 선택과 심정을 헤아려보는 작업이죠. 동시에 자신과 너무나도 다르지만, 또 너무나도 닮은 노라의 불안과 우울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걱정하는 마음에 써 내려간 글이기도 합니다. 배역을 거절한 딸 대신 주인공을 맡게 된 유명 배우 레이첼을 자꾸만 '노라'처럼 보이게 요청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고요.

둘 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건, 두 사람을 이해하려 하는 또 한 명의 딸, 아그네스입니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나치 운동을 하다 2년간 수용소에 살았던 할머니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찾아보며, 아빠의 가족에게 닥쳤던 비극을 짐작해 봅니다. 비관적인 선택을 할 뻔한 언니를 늘 살피며, 조금이나마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다독이죠. 사랑에도 불안정한 노라와 달리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 아그네스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모두 언니의 그늘 덕분이라는 걸요.
구스타프로부터 출발해 아그네스를 거쳐 노라에게 도착한, 어쩌면 이들에게 마지막이 될 이번 영화. 독단적이고 무례한 아빠에게 화를 내기도,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놓기도, 누군가의 이야기에 깊이 몰입하기도 하면서, 지난날에 못다 한 애도가 진행됩니다. 현실과 픽션이 겹쳐지고, 현재와 과거가 중첩되는 바로 이 집에서요.

데리다는 자신의 저서인 『죽음의 선물』을 통해 애도란 “끝이 없는 것이고, 위로할 수 없는 것이고, 화해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하면서도, 그 사람과의 결별이 시작되는 지점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책임이, “아무도 나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을 나와 연결시키는 책임이 탄생하는” 지점이라 밝힌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 '책임감' 때문이었을까요? 세 작품 속 주인공들은 모두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되돌아보며, 자신만의 해석을 낳습니다. 그 대상은 개인의 슬픔이거나 공동체의 비극으로, 영화 안팎의 자전적인 이야기나 역사적인 사건에서 출발해, 일종의 '승화'를 일궈내죠.
그들처럼 우리도 기억을 더듬고, 끝내 삼킨 물음을 곱씹으며, 남아 있던 감정을 인정하면서 애도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상처가 깊이 난 만큼 완전히 극복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품고도 다시 살아갈 방법을 이제 알고 있으니까요.
기꺼이 책망하고 온전히 아파할 것. 지금의 심경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부정하지 않을 것. 그리고 먼 훗날 갑자기 상실이 만든 울퉁불퉁한 흔적이 떠오를 때, 조용히 이를 매만져 볼 것. 그 정도의 태도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