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 가구의 초심은 무엇이었을까?
폐허에서 일상을 되찾는 디자인 언어
알바 알토의 파이미오 암체어, 장 프루베의 스탠다드 체어, 임스와 사리넨의 오가닉 체어…. 20세기 모더니즘 시기에 만들어진 이 가구들은 오늘날까지도 호텔 라운지 같은 럭셔리한 공간에 놓이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그런데, 럭셔리의 상징으로 보이는 이 가구들이 처음에는 조금 다른 목적과 장소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역설적이게도 모더니즘 가구 디자인의 부흥기는 전쟁의 영향으로부터 출발했어요. 폐허가 된 일상을 빠르게 되찾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가구가 필요했던 것이죠. 작아진 주택에 맞게 사용할 수 있어야 했고, 전쟁 중 개발된 신소재와 신기술을 이용해 튼튼한 가구를 빠르게 생산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당시 가구 디자인이 여전히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한 장식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모더니즘의 심플함은 단순히 미학적 선택이 아닌 사회적 요구에 응하는 필연적인 변화였어요.
그렇게 모두의 일상을 위한 가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환자들이 편안하게 호흡하도록 만들어진 의자부터, 학교에 대량으로 보급하기 위한 의자, 집에서도 합리적인 가격에 누릴 수 있는 편안한 의자까지. 모든 사람의 일상을 편안하게 디자인하고자 했던 모더니즘 가구의 초심을 살펴보세요.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디자인,
파이미오 암체어(Paimio Armchair)

길게 뒤로 젖힌 등받이, 팔걸이에서 시작해 하나로 이어진 곡선형 다리. 우아한 생김새의 파이미오 암체어(Paimio Armchair)는 사실 결핵 환자들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환자들이 앉아서 쉽게 호흡할 수 있도록 등받이 각도를 완만하게 설계했고, 소재는 핀란드산 자작나무를 활용해 숲에서 숨 쉬는 듯한 편안함을 전달했어요. '파이미오'라는 이름 역시 결핵 요양원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죠.


핀란드의 건축가 알바 알토(Alvar Aalto)는 파이미오 요양원을 설계하며 공간의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디자인했습니다. 공간에서 환자들이 경험하는 모든 순간을 편안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예를 들어 물통에서 물이 튀는 소리를 최소화하고, 햇볕 아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베란다를 배치했고요. 가구와 벽, 문 손잡이 색 하나까지 환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방향으로 설계했습니다. 이러한 토탈 디자인의 일환으로 파이미오 암체어는 요양원 라운지 곳곳에 배치되어 최적의 휴식을 제공했어요.
파이미오 암체어에는 치유와 회복을 선사하려는 알바 알토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기능적으로 환자를 보조하는 디자인을 넘어, 정신적 치유를 제공하는 사례죠. ‘사람의 영혼을 돌보는 것이 육체를 돌보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그의 철학은 지금까지도 파이미오 요양원에 남아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로 표준을 세우는 디자인,
스탠다드 체어(Standard Chair)

파괴된 생활 인프라를 복구하려면 공공시설을 빠르게 다시 짓는 일도 무척 중요했는데요. 여기, 이번에는 학교, 도서관, 사무실 등 대량의 의자가 필요한 공간을 위해 만들어진 의자가 있습니다. 장 프루베(Jean Prouvé)가 디자인한 스탠다드 체어(Standard Chair)입니다. 스탠다드라는 이름에서 표준 디자인을 세우겠다는 단호한 선언을 느낄 수 있는데요. 1934년에 제작된 프루베 공방의 4번 의자(Chair No.4)를 모델로 발전해온 디자인입니다. 형태를 살펴보면 익숙한 학교 의자의 모습이 떠올라요. 스탠다드 체어가 지금까지 교육기관을 비롯해 여러 장소에서 사용되는 의자들의 원형을 제공한 셈입니다.
장 프루베는 건축가, 디자이너이면서 엔지니어이기도 했어요. 금속 장인이자 자신의 공장과 회사를 세운 경영인이기도 했죠. 건축과 디자인을 아우르는 산업 전반에 중요한 발자국을 남겼지만, 프루베는 스스로를 건축가도 엔지니어도 아닌 공장 사람(a factory man)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만큼 가장 큰 관심사는 산업 시설에서 만들어지는 가구의 구조와 생산 방식이었어요.

스탠다드 체어에도 생산 기술과 구조에 대한 프루베의 관심이 잘 드러납니다. 처음부터 대량생산이라는 목적에 가장 적합한 의자를 만드는 실험 과정에서 탄생했으니까요. 스탠다드 체어의 유독 두꺼운 뒷다리는 하중을 고려해 설계된 것이고, 반대로 앞다리는 얇아서 가볍고 경제적이에요. 미학적인 특징으로 보이는 다리 디자인은 사실 생산 과정의 경제성과 합리성을 고려한 결과입니다. 프루베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소재의 공급량도 고려했어요. 2차 세계대전 중에 다리를 만들 금속 공급이 어려워지자 단단한 나무 소재로 교체한 버전을 제작하기도 했거든요.
장 프루베의 디자인은 더 희소하고 특별한 것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고 합리적인 가구를 누릴 수 있게 연구하는 과정에 가까웠습니다. 스탠다드 체어는 의자가 필요한 곳에 빠르게 공급되어 사람들을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게 했어요.
작아진 집에도 합리적이고 편안한 디자인,
오가닉 체어(Organic Chair)

가정에도 새로운 의자가 필요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한 의자를 조악하게 따라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거 건축과 라이프스타일에 적합한 의자 디자인이요. 뉴욕 현대미술관 MoMA는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의자 디자인을 찾기 위해 공모전을 열었어요. 1940년의 ‘가정용 가구의 오가닉 디자인(Organic Design in Home Furnishing)’ 공모전이었습니다. 공모전의 수상 기준은 구조, 재료, 목적 등 모든 부분이 조화롭게 조직되는 것이었어요. 수상 작품은 MoMA에 전시될 뿐만 아니라 생산 계약을 맺고 백화점에 납품될 기회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Eames Office
당시 찰스 임스(Charles Eames)와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은 이 공모전에 의자와 소파 유닛을 출품해 1등상을 수상했습니다. 심사위원들에게 ‘소규모 공간에 적합한 부피와 무게를 갖고 있고, 신기술과 신소재가 사용되었으며 편안하고 강도가 높아 모던 디자인에 가깝다’는 평을 받았어요. 디자인에 더해 생산성과 합리적인 가격이 얼마나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이 공모전을 계기로 임스와 사리넨, 두 사람은 디자이너로서 큰 주목을 받습니다. MoMA의 적극적인 지원과 전시를 기반으로 모던 디자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게 되었고요. 임스와 사리넨의 수상작은 공모전의 이름을 따 ‘오가닉 체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생산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컬러와 소재의 업홀스터링으로 상공간에서 활용되고 있고, 오리지널 빈티지 제품을 수집하는 애호가도 있죠. 이처럼 많은 사랑을 받는 오가닉 체어의 초심은 아름답고 실용적인 가구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디자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디자인은 조형언어이기 이전에 사회언어여야 한다.” - 디자인 평론가, 최범
세계대전 이후, 파괴된 일상을 빠르게 복구하고자 했던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디자인 가구를 탄생시켰습니다. 가구 디자인의 역사를 들여다볼수록 단순히 미학적 완성도만이 아닌, 사회적·기술적·경제적 맥락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죠.
흥미롭게도 오늘날 럭셔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많은 가구들이 처음부터 고급품을 지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민주적 이상에서 출발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본래의 의도는 희미해지고, 높은 가격과 상징적인 형태만이 부각되어 아쉽기도 합니다.
모더니즘 가구가 처음 디자인된 맥락을 되새겨보면, 진정 중요한 것은 디자이너의 명성이나 세련된 형태가 아니라, 그 이면에 담긴 사회적 가치와 메시지가 아닐까요? 초심으로 돌아가 바라볼 때, 가구 디자인에서 놓치고 있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