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푸른 봄 속 나를 마주하고 싶을 때

청춘의 안부를 묻는 미야케 쇼의 영화

짙푸른 봄 속 나를 마주하고 싶을 때

청춘(靑春).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그런 시절을 이릅니다. 아마 누군가는 경험했었고, 누군가는 지나가고 있으며, 누군가는 이제 막 들어설 차례일 텐데요. 한창 용감하게 부딪히고 성장하는 시기로 자주 그려지지만, 사실 모두의 ‘청춘’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자주 불안하고 쉽게 도망가고 싶은 때이기도 하죠. 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쉼 없이 나를 구축하고 증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청춘의 민낯을 계속해서 주시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바로 미야케 쇼의 작품들입니다. 감독은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새벽의 모든〉, 〈와일드 투어〉, 〈여행과 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건과 상황에 처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는데요. 그중에서 유독 담담하게 위로와 응원을 건네는 세 작품을 소개할까 합니다. 


오직 우리만의 속도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이미지 출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스틸컷
“1월 2일, 맑음. 로드워크 10km, 샌드백 2라운드, 미트 5라운드, 로프 2라운드. 
여전히 힘이 들어간다. 숨 쉬는 것도 잊지 말자. 심호흡하면 힘을 뺄 수 있다.”

오가와 케이코는 선천적 감음 난청으로 양쪽 귀가 모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매일 향하는 곳은 바로 도쿄 도심의 작은 복싱 체육관. 낮에는 호텔 청소 일을 도맡고 밤에는 프로 복서로서 훈련을 거듭하며 늘 다음 시합 준비에 매진합니다. 그러나 당장의 상황이 여의치는 않습니다. 그동안 몸담았던 체육관은 회장님의 건강 악화와 코로나 시절의 재정 악화 여파로 곧 문을 닫을 예정입니다. 아픈 것이 싫어서 본능적으로 자꾸 뒤로 물러나는 습관, 지겹도록 반복되었을 어머니의 걱정, 짐짓 쌓여가는 스트레스도 문제죠. 분명 자진해서 이 길로 들어섰건만, 내내 고민한 흔적들은 부담감과 염증이 되어 돌아옵니다. 말 그대로의 ‘녹다운’, 케이코는 방황하기 시작하죠. 

그런 그를 다시 ‘싸울 수 있게’ 일으켜 주는 건, 주변 사람들의 애정과 믿음, 그리고 본인의 몸에 새겨진 관성입니다. 여성이라서 또는 청인이 아니라서 받는 따가운 시선 대신 훈련을 이어갈 수 있도록 묵묵한 도움과 지지가 주어집니다. 작은 공책에 빠짐없이 기록하던 하루의 연습 결과와 지속적인 몸과 마음의 확인은 순간의 감정적 동요를 이겨내고 다시 출발선에 서게 하죠. 어쩌면 케이코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달려가는 수많은 우리들의 초상입니다. 감독은 인위적인 대사나 배경 음악을 덜어내고 디제시스 내의 현실적인 환경 속에서 천천히 이를 마주하길 바라죠. 

이기고 지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저하며 쉬고 싶은 심정도 이해해요. 그저 수많은 소음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본인만의 리듬을 지켜나갈 것.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와 규칙적인 줄넘기 소리로 이야기를 여닫는 사이, 그렇게 정직함과 솔직함의 미덕을 알아갑니다.

외롭지 않게 함께 비추어 가는, 새벽의 모든

이미지 출처: 〈새벽의 모든〉 스틸컷
“하나의 과학적 진실.
기쁨으로 가득찬 날도 슬픔에 잠긴 날도 지구가 움직이는 한 반드시 끝난다. 
그리고 새로운 새벽이 찾아오는 것이다.” 

후지사와는 극심한 PMS 증상을 겪고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남에게 맞춰주려 하는 다정한 성격이지만, 주기적으로 짜증과 화를 참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곤 합니다. 야마조에는 2년째 공황장애를 앓는 중입니다. 남들보다 최소화된 행동반경 속에 갑자기 일어나는 발작을 감내하며 지내야 하죠. 자연스레 ‘정상’ 사회로부터 물러난 두 사람은 아동용 과학 키트를 만드는 ‘쿠리타 과학’에서 처음 만납니다. 초반에는 무례하거나 부담스럽다는 오해로 삐그덕거리지만, 점점 상대를 이해하며 배려하는 관계로 나아가죠. 누구보다 솔직한 사이, 상대를 보살필 수 있는 사이. 딱 그 정도의 거리를 지키는 동료가 된 것입니다. 

이 밖에도 느슨한 연대를 유지하는 장면들이 잔잔히 조명됩니다. 딸에게 항시 도움과 사랑을 보내는 엄마, 직원의 안녕을 위해 책임을 다하는 상사, 식구처럼 살가운 정을 베푸는 사원들, 갑작스러운 상실의 헛헛함을 애도하는 공동체, 진심으로 채워졌던 각 삶의 모든 자리까지. 별빛 같은 가로등 불빛과 순간의 정적을 포착해 내는 연출의 섬세함 속에 한데 엮여 등장하죠. 타인의 사정을 조심스레 살피고 그로 인한 작은 변화를 지켜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이 따뜻해집니다. 낯선 이들과 함께하는 세상. 가끔 그들과 온기를 주고받는 세상. 만연한 개인주의 대신, 그런 세상을 회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영화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이동식 플라네타륨에서 별을 보던 사람들과 우리는 비슷한 희망을 발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광활한 어둠 속에 반짝이는 빛을 따라 길을 찾는 것처럼, 결국 험난할지 모르는 시간에도 서로의 기운에 기대어 또 다른 새벽을 기다리면 되니까요.

버거움을 털어내며 가벼움을 되찾는, 여행과 나날

이미지 출처: 〈여행과 나날〉 스틸컷
“여행이란, ‘말’에서 도망치려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각본가 ‘이’는 작품이 평가받거나 조언을 구하는 관객이 있을 정도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슬럼프에 빠진 상태죠. 허공을 더듬대며 다음 문장을 찾아가고, 애써 완성한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홀연히 여행을 떠납니다. 세상의 소리로부터 잠시 떨어져 내면의 혼란스러움을 잠재우려는 듯, 적막하기까지 한 설국의 작은 마을로요. 그렇게 외진 곳의 한 여관에서 무심한 주인 ‘벤조’와 긴 꿈과 같은 며칠을 보냅니다. 비록 한 줄도 채 쓰지 못하고, 한밤중에 피운 작은 소동은 허무하게 마무리됐으며, ‘벤조’를 제대로 알아가기도 전에 떠나야 했지만, 모처럼 즐거운 시간이었죠. 한껏 소진된 ‘이’에게 꼭 필요한 쉼표가 찍힌 것입니다. 

감독은 츠게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海辺の叙景)』과 『혼야라동의 벤상(ほんやら洞のべんさん)』을 액자식 구조로 각색해 대자연 속 이 여정을 온전하게 경험시킵니다. 1부의 여름 이야기와 2부의 겨울 이야기는 마치 거울상처럼 반영되며, 작품 세계와 현실 세계 속 ‘이’가 가진 삶의 태도를 보여주죠. 관찰하고 탐험하기, 소소한 대화와 즉흥적인 재미 취하기, 상시 서두르지 않기 등. 나른함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무의식의 바다에서, 생동과 온기가 남아있는 지금의 산속으로 넘어와, 그간 잃어버렸던 자신을 써내려갑니다. 그 가운데 ‘이’를 맡은 심은경은 순간순간의 솔직한 심정을 한국어 내레이션으로 털어놓습니다. 고요하고 담백하게 주어진 나날을 소화하면서요.

이방인으로서 이미 여행가였던 ‘이’가 매일의 삶을 여행 중인 관객을 대변해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일상도 여행처럼 살라는 것. 가까스로 잡으려는 것들은 금방 무용지물이 되곤 하니 과정에서 재밌었다면 그만이라는 것. 불필요한 잡음 대신 여백으로 가득 채운 이 영화는 그 가치와 필요성을 실감케 합니다.


지난해 가을비가 꽤 많이 오던 어느 날, 〈새벽의 모든〉으로 진행한 에무시네마의 무대 인사에서 미야케 쇼 감독은 관객으로부터 딱 하나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항상 방황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으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동안 그의 작품을 꾸준히 봐왔다면 누구라도 궁금했을 내용이었죠. 이에 대해 감독은 “그러게요… 왜 그럴까요?”라고 재치 있게 되묻다가, 이내 “그 인물들에게 그것은 방황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답했습니다. 

살아가는 것. 미야케 쇼 감독에게 그것은 지켜 나가고, 의지하고, 쉬엄쉬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나긴 인생길에서 한창 헤매고 있을 청춘들에게 툭 건네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유독 고단함이 느껴질 때,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질 않으며, 가지고 있는 취약함에 계속 걸려 넘어질 때, 이 영화들을 꺼내보시길 바랍니다. 다시 돌아온 ‘봄’이 유독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면 누구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