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의 거장을 발견하는 축제들

미래의 스타 감독과 글로벌 아티스트를 미리 찾아내는 방법

먼 훗날의 거장을 발견하는 축제들
이미지 출처 : SXSW 공식 홈페이지

예술계에는 매번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들이 나오고, 그들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새깁니다. ‘대단한 예술가는 반짝하고 나타난다’는 생각이 만연하지만, 사실 오늘날의 거장과 훌륭한 예술가 중 대부분은 차근차근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 간 경우가 많죠. 그들은 대체로 ‘원석’을 가리기 위해 업계가 준비한 시상식과 축제에서 이름을 알립니다. 물론 우리에게 익숙한 그래미, 아카데미 등 시상식과 코첼라, 칸느 등의 축제는 ‘이미 만들어진 최고’를 가리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중요한 ‘이제 우리 앞에 만들어질 미래’를 내보이는 행사들을 돌아보며 거장이 만들어지는 이야기의 시작점을 살펴보려 합니다.


거장 감독의 등용문, 선댄스 영화제

1993년 선댄스의 감독 워크숍 중 폴 토마스 앤더슨(중앙)과 배우 존 C.라일리(좌측), 필립 베이커 홀(우측) | 이미지 출처 : Sundance Institute

내년 아카데미상이 벌써 기대될 만큼, 2025년에도 다양한 수작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PTA)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그중 최고로 꼽는데요. 특히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의 사례로 기록될만한 ‘윌라’ 역의 체이스 인피니티(Chase Infiniti)는 아주 인상적이었죠. 동시에 감독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 영화를 쓰고 연출한 PTA는 21세기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죠.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동료들로부터 ‘천재 감독’이라 불리는 PTA가 뉴욕대 영화학과를 자퇴한 후, 한 영화제에 단편 영화를 제출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선댄스 영화제 비주얼 아이덴티티 | 이미지 출처 : 포르투 로샤 공식 홈페이지

영화계에서 '신인 감독의 등용문'으로 알려진 선댄스 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는 1980년대 소규모 영화제로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별세한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가 <내일을 향해 쏴라>(1969)에서 자신이 연기한 ‘선댄스 키드’에서 이름을 딴 영화제를 만들었죠. 매년 1월 미국 유타 주에서 개최되는 선댄스 영화제는 독립•예술•다큐멘터리 영화를 적극 지원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또한 다방면에서 영화를 논하는 컨퍼런스와 토크 프로그램을 개최하며 ‘영화 축제’로서의 의미를 다하고 있죠. 그럼에도 오늘날 선댄스 영화제의 위상을 만든 건 축제를 통해 발굴된 거장과 명작에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비짓유타VISIT UTAH

앞서 언급한 PTA를 비롯해 대런 애러노프스키(Darren Aronofsky - <블랙스완>, <더 웨일>), 제임스 완(James Wan - <컨저링>)은 선댄스 영화제를 통해 발굴된 대표적인 감독입니다.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의 <저수지의 개들>, 데미언 샤젤(Damien Chazelle)의 <위플래시>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관객을 만났고요. 그뿐 아니라 <아메리칸 사이코>, <500일의 썸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보이후드>, <미나리> 등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사랑받은 작품들이 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개하는 것만으로 벅찰 만큼 선댄스 영화제는 ‘새로운 원석을 발굴하는 축제’로서 본분을 다하는 축제인데요. 앞에서 언급된 인물과 작품 모두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훌륭한 사례가 되었죠. 그러나 그 시작에는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 차 선댄스 영화제의 출발선에 뛰어들던 과거가 있을 텐데요. 이를 떠올릴 때면 거대한 나무가 자그마한 묘목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큼 믿기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죠.

선댄스 영화제 공식 유튜브 채널


선댄스 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축제를 넘어선 음악인들의 천국, SXSW

이미지 출처 : SXSW 공식 홈페이지

약자 ‘SXSW’로 더욱 잘 알려진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는 매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열리는 거대한 축제입니다. SXSW는 어떠한 분야에 한정한 행사로 칭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와 방대한 다양성을 지니는데요. 영화, 인터랙티브 예술, 게임 등 예술과 연관된 수많은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품은 축제죠.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행사는 단연 음악 페스티벌인데요. 원래 오스틴은 ‘라이브 음악과 예술의 도시’로 알려져 있죠. 이와 발맞춰, SXSW 음악 페스티벌이 개최되는 시기에는 도시 내 수많은 공연장, 라이브 바, 특설 무대에서 아티스트들의 쇼케이스가 펼쳐집니다.

앤더슨 팩 2016 SXSW 무대 | npr 뮤직 공식 유튜브 채널

SXSW 음악 페스티벌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신진•인디펜던트 아티스트가 자신의 역량을 펼쳐냅니다. 그리고 그들이 축제에서 뿜어낸 열정은 훗날 글로벌 히트를 기록하는 순간으로 바뀌곤 하는데요.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Tyler, the Creator)가 창립한 힙합 크루 오드 퓨쳐(Odd Future)를 비롯해, 브루노 마스(Bruno Mars)와 실크 소닉(Silk Sonic)을 결성하며 더욱 유명세를 떨친 앤더슨 팩(Anderson .Paak)도 SXSW에 참여한 경험이 있죠. 또한 빌보드 차트와 장르 팬덤을 모두 매료시킨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 자넬 모네(Janelle Monae), 키드 커디(Kid Cudi)도 SXSW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폭발시킨 사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의 연도 빼놓을 수 없죠. 2010년대 중반부터는 ‘코리아 스포트라이트’라는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f(x), 에픽하이, 크라잉넛 등 유수의 한국 아티스트가 출연하기도 했고요. 최근까지도 새소년, 바밍타이거, 힙노시스 테라티 등 다양한 아티스트가 SXSW에서 한국의 음악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아티스트 선정과 쇼케이스의 결과는 우리나라의 유명 페스티벌 DMZ 피스트레인의 이수정 기획국장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한테는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는 반드시 가야 하는 자리에요. 사실 네트워킹은 오히려 작은 페스티벌에서 더 유효하기도 해요. 그러나 SXSW는 정말 앞으로 잘 될 다양한 신인의 무대를 가장 처음 볼 수 있는 자리거든요. 엄청난 네트워크를 만들거나 바이어를 만난다기보다 진짜 유효한 쇼케이스를 보러 갑니다."
- "모든 연결엔 만남이 있다. 네트워크로 이루어지는 라이브 뮤직 비즈니스 대담” 이수정,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기획국장 | AAA 매거진

그러나 SXSW가 음악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축제 중 하나인 이유는 또 있습니다. 축제가 열리는 3월의 오스틴에는 음악가와 더불어 에이전트, 프로듀서 등 수많은 음악 업계 관계자가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는데요. SXSW는 프랑스의 미뎀MIDEM, 영국의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와 함께 ‘세계 3개 음악 마켓’으로 불립니다. 실제로 페스티벌 기간에는 공연과 더불어 수많은 컨퍼런스와 세미나가 열리는데요. 아티스트의 쇼케이스와 함께 업계 전반의 네트워킹과 비즈니스가 SXSW를 경유해 열리는 셈이죠. 이 같은 기회를 잡고자 매년 50개국에서 15만 명의 참가자가 오스틴에 모이고, 이들을 위해 1천 건 이상의 쇼케이스와 프로그램이 열립니다. 그리고 SXSW는 관객이 일방적으로 공연을 관람하는 축제를 넘어, 관객과 아티스트, 관계자가 한 데 어우러져 말 그대로 ‘음악을 즐기고 퍼뜨리는’ 축제로서 전개되고 있죠.

바밍타이거 2023 SXSW 무대 | JADED 유튜브 채널


SXSW 공식 홈페이지

SXSW 부대표 제임스 마이너 인터뷰 by AAA 매거진


한국에서 피어오르는 독특한 축제들

2025 미쟝센단편영화제 하이라이트 리캡 영상 | 미쟝센단편영화제 공식 유튜브 채널

앞서 해외 사례를 살펴봤다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례도 놓칠 수는 없겠죠.

흔히 우리나라 3대 영화제로 불리는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무척 훌륭한 프로그램과 지원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작품과 창작자를 발견하기 위해선 독립•단편 영화제를 살펴보는 게 더 효과적일 텐데요. 그중에서도 미쟝센단편영화제는 영화과 학생과 신인 감독 모두가 눈독 들이는 주요 영화제 중 하나입니다. <추격자>의 나홍진, <검은 사제들>의 장재현, <메기>의 이옥섭 등 면면만으로 눈길이 가는 감독들이 이 영화제를 통해 업계로 발을 들였는데요. 특히 이들 모두 훌륭한 실력에 더해 독창적인 스타일을 가졌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죠.

미쟝센단편영화제 트레일러 | 미쟝센단편영화제 공식 유튜브 채널

실제로 미쟝센단편영화제는 2000년대 초, 국내에 미진한 ‘장르 영화제’ 창설을 위해 다수의 감독이 힘을 합쳐 만들어졌는데요. 그러나 2021년 코로나-19의 악화와 후원사의 재정 문제가 겹쳐 폐지 수순을 밟은 안타까운 과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극복해 2025년 새로운 후원사와 영화제를 개최하고,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엄태화 감독이 연출하고 김고은, 구교환이 출연한 트레일러를 공개했죠. 또한 올해에도 수많은 유명 감독과 배우가 영화제에 참여했는데요. 김성수(<비트>, <아수라>), 김성훈(<끝까지 간다>)등 감독과 배우 주지훈, 김태리, 박정민 등이 2025년 미쟝센단편영화제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또 기존에는 ‘희극지왕’, ‘4만 번의 구타’등 해외 작품 제목이 붙어있던 부문별 명칭도 호러와 판타지 부문의 <기담>, 코미디 장르의 <품행제로> 처럼 교체하며 우리나라 영화계의 등용문으로서 포부를 밝히기도 했죠.

더 콰이엇 마스터클래스 | 이미지 출처 : OPCD 공식 홈페이지

또 한국에서는 SXSW와 같이 아시아 최대 규모의 음악 마켓 뮤콘MU:CON을 운영 중인데요. 음악계에서 뮤콘만큼이나 흥미로운 움직임을 만드는 사례는 도봉구 창동에서 운영하는 오픈창동OPCD에 있습니다. 창동은 2027년 음악 특화 전문 공연장 ‘서울 아레나(가칭)’가 들어설 예정인데요. OPCD는 다양한 아티스트 지원 프로그램과 음악 관련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플랫폼입니다. OPCD는 국내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플랫폼에 대한 우려가 무색할 만큼, 꾸준한 창작 지원과 양질의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죠. 예컨대, 올해 ‘Dopamine’을 통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은 비트박서 윙WING이 OPCD의 지원으로 커리어를 발전시킨 대표적 아티스트죠.

2024 OPCD 스테이지 리캡 | OPCD 공식 유튜브 채널

OPCD는 자체적으로 송 캠프, 세미나, 마스터 클래스를 운영하며 다방면에서 신진 아티스트를 지원하는데요. 나아가 오디오비주얼, 유튜브•숏폼 콘텐츠 워크숍 등 음악과 연계된 프로그램으로 그 갈래를 넓히고 있죠. 그리고 2023년부터는 축제 형식의 OPCD STAGE를 열어 유명 아티스트와 함께 OPCD의 신진 아티스트에게 무대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더해 올해부터는 한국대중음악상과 함께 ‘올해의 신인’ 프로젝트를 운영해 더욱 폭넓은 지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단순히 대중적•예술적 성과만이 아닌 ‘앞으로 업계를 이끌어갈’ 원석을 찾는 여러 축제와 시상식이 자리합니다. 특히 단순히 신인을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를 가공할 수 있도록 지속 가능성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죠.


저는 이번 글을 정리하며, 신진 예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행사가 대부분 ‘시상식’보다 ‘축제’에 가깝다는 점에 놀랐는데요. 한 해 동안 발표된 것 중 최고를 선정하는 행사가 그 공로를 치하하는 ‘시상’에 초점을 맞춘다면, 앞으로 내가 사랑하는 예술과 그 업계를 이끌어갈 이들을 발견하는 건 말 그대로 ‘축제’에 가까울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사례 외에도, 공연예술계의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도 좋은 예시로 소개하고 싶은데요. 그뿐 아니라 패션계의 LVMH 프라이즈, 광고계의 YOUNG GUNS 어워즈 등 시상식의 성격을 지닌 경우도 마찬가지로 모두가 행사를 즐기는 축제의 장에 가까운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축제 현장에서 신예들을 축하하기 위해 참여한 업계 선배들이 보이는 모습도 인상 깊은데요. 그 자리에 함께 한 베테랑은 신인을 바라보며 자신의 첫 발걸음을 회상하고, 그들의 열정과 희망을 통해 마음가짐을 다잡곤 하죠. 나아가 업계와 그 관계자 모두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며,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을 얻습니다. 이처럼 예술계가 새로운 인물을 발견하고 지원하는 축제의 장은 업계에 다채로운 기쁨을 채워 넣습니다. 이보다 ‘축제’의 의미에 가까운 사례가 있을까요?